부모 그 무게와 기쁨 / 오정선
'하루해가 길다.' 하고 생각할 즈음 잔잔해진 무논엔 산 그림자도 누워 잠든다. 마을 언저리 묵정밭에서는 깨지는 듯한 꿩 울음소리가 잠든 산을 돌려 눕히고, 뻐꾸기 소리가 닭의난초꽃을 깨워 불러내는 초여름 한낮이 뜨겁다. 이즈음이면 논둑 밭둑 마을 길가의 잡초도 문제지만 부지런한 후손들은 마을 어귀 선산을 덮은 풀을 놔두지 못해 애벌 벌초를 하기도 한다.
예초기로 정리하는 길섶을 지날 때면, 달리는 자동차에서도 진한 풀 내음이 난다. 인간 기준의 난폭한 무력을 용서한 풀들의 향기 같기도 하고, 다시 일주일 후에는 여지없이 새잎으로 부활하는 식물성 에너지의 여유인 것도 같다. 풀의 부모는 흙이라서 아픔을 회복하는 여유를 주나? 풀뿌리가 잎을 기르니 상처 아랑곳하지 않는 여유인가?
초여름 발 빠른 김 씨의 논에 이르게 심어 놓은 모가 푸르름을 더해 가고 있었다. 양파야 마늘이야 거두는 틈틈이 주변 잡초를 정리하던 김 씨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기계를 멈췄다. 예초기 날에 전해오는 뭉클한 감촉과 꿩의 외마디 비명이 거의 동시여서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까닭을 살폈다. 튕겨 나와 풀 섶에 축 처져버린 암꿩은 이미 숨을 거뒀고 그 앉았던 자리에 품고 있던 푸르스름하고 창백한 알은 온기로 따듯했다. 그 시끄러운 기계 소리가 지척에 오도록 부모 되려는 꿩의 의지가 두려움을 견디게 했을 터, 이미 벌어져 버린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먼 발소리 만으로 ‘푸드덕 꿩 ~~꿩’ 소란스레 달아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새였으니 더 마음이 아팠다. 미안한 생각으로 꿩알들을 가지고 얼른 집으로 와서 닭장에 알을 품고 있던 암탉의 둥지에 넣어 주었더란다. 난데없이 고아가 된 꿩알들을 자기 집 암탉에게 입양시킨 것이다. 자기 집 달걀들은 영문도 모른 채 옆집의 위탁 양부모 닭장으로 보내졌다. 3 주가 지나고 태어난 꿩들은 보지도 못한 부모의 품성을 빼어다 닮았다. 다섯 마리가 하나같이 먹이는 물론 물도 안 먹고 좌충우돌 성급히 나가려고만 힘쓰다 어미 뒤를 따르고 말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성급한 꿩을 사육하려면 눈가리개를 해주고 부딪쳐 다치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산다고 했다. 이 새끼 꿩들에게 꿩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 보살핌 속에서도 연명하지 못한 일화나, 베 짜기 새의 사례를 들어보면 태생적 유전으로 전해지는 유산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양계장에서 알을 낳다가 늙은 폐계가 되어 개인 집에서 키우면 간간이 알을 낳기는 하나 알을 품을 줄 모른다고 한다. 어미 품에서 태어난 닭은 더 어려도 시기가 되면 알을 품는다는데 말이다. 진돗개도 어미와 일정 기간 함께 지낸 뒤라야 그 특성이 모두 이어진다니 이렇게 보고 배우는 일 또한 부모 자식 사이의 큰일이려니 생각된다.
이 무렵 사위를 채우는 뻐꾸기 울음소리는 구슬프다. 다른 새의 둥지에 탁란하고 어미 울음소리라도 들리게 하려는 뜻 같아 밉지 않다. 탁란하는 위탁모의 알 크기나 문양을 연구해 뻐꾸기알도 비슷하게 진화해 왔고 부화할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이미 40도 체온의 몸속에서부터 부화를 시작한다고 하니 그도 육추의 노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그런 부모의 길을 택했는지??
이렇게 새나 짐승이나 모두 자신들의 종족 보존을 위한 노력을 하며 이어져가는 우리 생태계를 생각해보면 차라리 사람들의 부성과 모성은 때때로 약해 보일 지경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좀 더 지켜보고 기다려 줘야 할 때 조급하고 마음 아프지만 '안 된다'고 해야 할 때 너그럽다. 베 짜기 새의 알을 베 짜기 새가 없는 환경에 부화시키고 그 알에서 부화한 알을 다시 부화시키는 방식으로 삼대째 부화시켜서 한 실험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어린 새는 본 적 없던 베 짜기 새의 둥지를 완벽하게 재현해 놓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무게나 부모가 되는 기쁨은 둘 다 가늠키 어려운 신세계이다. 오랫동안 학교에서 근무하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동안 상당히 많은 부모님도 만났다. 부모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단지 부모가 언제까지 곁에 있었느냐의 차이일 뿐.
더 해주지 못해 안타까운 부모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건 천군만마가 될 터이니 있어 보이는 부모가 아이의 원만한 성장을 위해 일부러 안 해주는 상황에서 아이가 느끼는 상실감과는 다른 힘이 되는 것이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가 중3인 자기에게 의지하다시피 살아가는 아이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은 또래 아이들과 다른 삶의 목표를 가지고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꿈을 꾸었다. 아버지는 수준에 못 미치는 아들이지만 대단하게 생각했다. “야, 너 컴퓨터 잘하지 않냐? 컴퓨터과 가.” “아이, 아버지 그건 남도 다 그 정도 해요!” 하고 대답하지만, 기분 좋은 표정 역력하고 자기를 대견해하는 아버지가 있어 아이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개척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술은 절대 안 먹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술 담배 조심하라는 잔소리로 생기는 의지와는 사뭇 강도가 달랐다. 아이는 아버지를 싫어하진 않았다. 다만 연로하신 할머니를 속상하게 해서 마음 아파했을 뿐 아니라 할머니께 효도하고 싶어서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보통의 중3 아이들이 할 수 없는 생각이 그 아버지가 물려준 중요한 유산이랄까?
[인생은 아름다워라]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아이가 아버지 귀도에게서 받았던 정신적 유산을 자기 혼자 갖기 아쉬워 만들었다고 한다.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노래하고 죽음의 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던 큰 부모는 자기 아이만 잘 키우는 게 아니다.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잘 자라 세상을 키우는 더 큰 부모가 많이 생기도록 해야겠다. 준비된 부모가 더 많아져서 부모 됨의 무게보다 부모 됨의 기쁨을 노래하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 되도록 해야 사람다운 삶이 아닐까 한다.
첫댓글 꿩, 닭, 뻐꾸기 얘기보다는 제목에 걸맞게 부모가 되는 일의 무게와 기쁨을 집중적으로 다뤄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