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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33. [역경의 열매] 김봉래 (1-13) 진정한 교정은 법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만 가능
1975년부터 30년간 교도관으로 생활 출소자 도우려 김치공장 차리는게 꿈
김봉래 목사가 29일 충남 홍성군 홍성교도소교회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 목사는 1997년 국내 최초로 교도소 내에 교회를 세우고 재소자와 교도관, 경비교도대원을 위한 전도에 힘써왔다. 예배당 뒤로 감시대가 보인다.
인생은 60부터라고 한다. 나에게 60은 나눔의 나이다. 60년을 받았다면 후반생은 주는 삶을 살고 싶다. 1975년 교정직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처음 발령받은 곳이 제주교도소였다. 그로부터 30년을 교도관으로 살았다.
사람들은 교도소라고 하면 색안경부터 쓰고 본다. 물론 이해한다. 교도소에 오는 사람들은 분명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부러 죄를 지었든, 우발적 범행이든 일단 그들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역시 죄를 지으면 교도소에 가야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 잠정적 수감자인지 모른다.
빵 한 조각을 훔쳐 19년이나 감옥에 살아야 했던 장발장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다. 너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쳤다는 이유로 소년원을 거쳐 교도소로 들어오는 어린 소년들이 있다. 그들은 경미한 죄를 짓고도 합의금이 없거나 방패막이가 되어 줄 보호자가 없어서 소년원과 교도소 신세를 진다. 어린 나이에 교도소에 들어오면 사회를 탓하게 된다.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고 다시 돌아간다 해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 죄가 죄를 낳는다는 말처럼 막장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았다.
그동안 참 많은 수감자를 만났다. 1만명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그들을 대하면서 마음에 확신 하나가 생겼다. 진정한 ‘교정(correction)’은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교도관으로서, 그리고 전도자로 살아오며 그 사랑을 목도했다. 하나님 사랑은 때때로 상처를 받지만 더 강해졌고, 미약했지만 위대했다. 단순 절도범에서부터 가정파괴범, 무기수도 그 사랑 앞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하나님 사랑은 차별이 없다. 재소자들도 동일한 구원의 대상이다.
나에겐 꿈이 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수감자였다가 출소한 형제자매들의 자활을 돕고 싶다.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은 김치공장이다. 출소자들의 손으로 직접 김치를 만들어 판매해 수익을 창출하고 무의탁 재소자들에게 영치금을 넣어주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출소자들은 김치공장에서 일하면서 매월 급여를 받아 가족을 부양하게 된다. 또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에 힘을 보태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훈련을 받게 된다. 좀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출소자들을 위한 신앙훈련을 지속하고 자연 사랑을 배우는 배추농사도 해볼 계획이다.
김치공장을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출소자들은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있어도 취직하는 것이 힘들다. 그만큼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 나는 교도관으로 지내면서 그 비참한 현실을 지켜봐야 했다.
우리는 출소자들을 진정한 사회인이자 신앙인으로서 환영해야 하며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배는 고프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가 못하면 하나님은 하실 것이다. 주님은 돌이라도 쓰실 것이다. 이제부터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소상히 밝히고 싶다.
홍성=정리·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봉래 (1) 진정한 교정은 법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만 가능
* [역경의 열매] 김봉래 (2) 교도소 담 안의 형제들도 복음에 갈급해 한다
* [역경의 열매] 김봉래 (3)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고백에 신기한 체험
* [역경의 열매] 김봉래 (4) 재소자 전도 원칙 "나이와 죄명을 묻지 말라"
* [역경의 열매] 김봉래 (5) 홍성교도소 신우회 조직… 감동의 첫 감방예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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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봉래 (13·끝) 죄와 벌 넘어 담 안 형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약력=1948년생. 1975년 제주교도소 교도관. 2005년 홍성교도소 교도관 은퇴. 1997년 전국 교도소 중 유일하게 교도소 안에 교회 설립. 2001년 교정대상 본상부문 교화상 수상. 대한신학대학원 목회연구원. 2005년 예장(백석)에서 목사 안수. 2011년 총회신학대학교 목회대학원(석사과정) 졸업 현 홍성교도소교회 담임. 전국직장선교목회자협의회장. 홍성교도소 교정위원. 법무부 대전교정청 운영위원.
***[역경의 열매] 김봉래 (2) 교도소 담 안의 형제들도 복음에 갈급해 한다
고집 센 무기수들도 회심 후 죄 고백, 성경공부 11명… 모범수로 새 삶 살아
교도관으로 정년퇴직한 김봉래 목사는 여전히 재소자들을 만나 교제하고 있다. 김 목사가 2005년 교도관 시절 홍성교도소 재소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나는 교도관으로 1975년부터 30년을 일하다 2005년 홍성교도소를 끝으로 정년퇴직했다. 하지만 여전히 교도소를 드나든다. 교도소 안에 교회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담 안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대부분 무기수의 경우 찾아오는 가족이 없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 가족들도 포기한 경우가 많다. 나는 교도관 시절부터 이들을 위해 영치금을 넣어줬다. 그때는 월급에서 조금씩 뗐고 지금은 매달 받는 연금에서 뗀다.
내가 만나는 무기수는 모두 6명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이들을 보러 간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6명의 나이는 40∼70세다. 이들과 형 동생 하며 지낸다. 갈 때마다 말씀으로 위로하고 수감생활을 묻는다. 방문할 때는 물론 양손 무겁게 간식도 챙긴다.
무기수 중 가장 나이 많은 인물은 박광성(가명·70)씨다. 올해로 15년째 복역 중이다. 치정에 의한 부인 살해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박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손을 떨었다. 알코올 중독에 의한 손떨림 현상이었다. 세상을 비관하며 술에 취해 살았다고 했다. 교도관 시절부터 그를 만나면서 복음을 전했고 영치금을 넣어줬다.
지난달 그를 만나 영치금을 잘 쓰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안 써요.” 이유를 묻자 “혹시 나가게 되면 월세는 내야죠” 했다. 그동안 이렇게 저렇게 모은 영치금이 100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나는 놀랐고 한편으로 기뻤다. 사람이 변했던 것이다.
박씨는 “제가 밖에서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날마다 죄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어 기쁘고요. 교도소에서나마 반성하며 사는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라고 했다.
무기수들에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고집이 세다. 그리고 생각이 짧은 측면이 있다. 그러다보니 큰 사건을 저지르거나 연루됐다. 자신들도 그런 성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앞뒤 없는 전차(지하철)’라고 불렀다. 전차나 지하철이 앞뒤 따로 없이 달리듯 이들 인생은 방향 없이 살아온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희망과 방향이 생겨 다행이다.
무기수와의 만남 외에 나는 11명의 재소자를 위한 교리 공부도 병행하고 있다. 일명 ‘성경통신대학’인데 이 과정은 2011년까지 교도소 경비를 담당했던 경교대원을 위한 성경공부였다. 경교대는 법무부 소속 교도소 경비교도대로 3년 전 폐지됐다. 홍성성교도소교회에서 나는 이들 경교대원을 위한 성경공부 과정을 운영해오다 지금은 이를 재소자 성경공부로 이어가고 있다. 11명은 모두 모범수로, 성실히 성경공부에 임하고 있다.
나는 또 한 달에 한 번 재소자 신입교육도 맡고 있다. 일종의 교도소 생활 오리엔테이션인데 목사로서 신앙교육을 안내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은퇴 후에도 줄곧 교도소를 찾는 것은 재소자들의 눈과 발이 되자는 다짐 때문이다. 희망 없는 그들에겐 길잡이가 필요하다. 그들이 무기수이든 형기를 마치는 출소 예정자이든 중단된 인생을 잇기 위한 도움이 절실하다.
내가 교정공무원이 된 것은 마산보호관찰소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한 친형님의 영향이 크다. 20대 시절 형님과 함께 기차를 탔는데 밖에서 누군가 돌을 던졌고 돌은 어느 여성의 몸에 맞았다. 이를 본 형님은 기차가 출발하고 있는 도중에 몸을 던져 뛰어내렸고 돌을 던진 사람을 붙잡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멋있던지 나는 형님처럼 교도관이 되고 싶었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3)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고백에 신기한 체험
삶에 대한 회의로 두번의 자살 시도… 저절로 간 교회서 내 몸의 죄가 몽땅…
김봉래 목사 가족이 지난해 가을 담양으로 여행을 떠났다. 오른쪽부터 아들 성연, 김 목사, 이영의 사모, 딸 선경, 며느리 이명선씨.
나는 전남 함평군의 영화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모님은 꼬박꼬박 제사를 지내며 조상을 섬겼다. 어머니는 가끔 절에 다니시며 ‘기도 공력’을 쌓으셨다. 3남 1녀나 되는 자녀를 키우면서 제사로는 모자랐던 것 같다.
내가 교회를 처음 접한 것은 군에 입대하면서다. 어떤 강한 신앙의 힘도 아니었지만 세례까지 받게 됐고 예배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제대 후엔 원래 생활로 돌아갔다. 20대 초반이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고 ‘교회쯤’은 안 나가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존했다.
그러다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중병에 걸려서도, 감동적 전도를 받거나 간증을 통해서도 아니었다. 나는 젊은 패기와 그럭저럭 먹고사는 것에 큰 걱정 없던 집안 덕분에 젊음의 시간을 낭비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한 적도 허다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성실히 사는 인생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 누가 보상해주나 생각하며 깊은 상실감에 젖었다.
그런 상실감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자초했다. 나는 목적 없이 흘러가는 날들이 싫어 몇 번이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돌아왔다. 1975∼76년 나는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했었다. 물론 모두 실패했다. 당시 교도관으로서 제주교도소에 발령을 받았는데 교도관 생활도 후회가 밀려왔다. 온갖 죄를 지은 나쁜 놈들이 감방에 모여 있다고 생각했고 1년은 극심한 소외와 거부감 속에서 일을 했다.
주님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다. 나는 정말 뜻하지 않게,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인도함에 이끌려 교회를 찾았다. 그것은 아주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내 마음이 저절로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 교회는 제주도 한라교회로 지금은 없어졌다.
나는 예배당 의자에 털썩 앉아 “하나님, 여기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긴 한숨과 함께였다. 아마 기도의 첫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눈물을 흘렸다. 얼마동안 그렇게 앉아서 울며 기도했는지 모르겠다. 내 몸 속에 있던 쓰레기 같은 불순물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스치고 지나가는 과거의 일들. 군에서 세례 받은 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제주 성안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
본격적인 믿음의 성장은 평생 신앙의 동반자였던 아내를 만난 후부터다. 교회를 나가게 되면서 어느 날 피아노 반주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찌 그리 심금을 울리는 연주를 하는지 주일마다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서 ‘저 자매와 꼭 결혼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1년 후 이뤄졌다. 77년 12월,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처가는 믿음의 가정이었다. 그때까지도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어머니도 아내를 만나 신실한 종이 되셨다.
아내는 나의 정신적 동반자 이상이다. 아내는 든든한 신앙의 동반자이며 인내자이며, 희생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람이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은 교도소 특수선교를 위해 모든 것을 갖춘 집사람을 준비시켰다.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타오는 급여 대부분을 전도를 위해 썼지만 아내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내 월급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그 수입으로 근근이 생활비를 충당했다. 홍성으로 이사 왔을 때는 거의 모든 예배와 행사에 참여하며 사역을 했다. 그러던 아내에게 일이 터졌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4) 재소자 전도 원칙 “나이와 죄명을 묻지 말라”
암수술 등 두번의 위기 겪은 아내 가난에도 30여년 믿음으로 지켜줘
2005년 교도관으로 정년퇴임한 김봉래 목사가 이영의 사모와 함께했다.
나는 지금까지 교도소 전도에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재소자들의 나이와 죄명을 묻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범죄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 선입견 때문에 전도에 지장이 생겨서다. 교도관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담 안 형제들과 교제할 때부터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알게 되더라도 잊으려고 했다. 주님도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
아내는 이런 나를 이해해줬다. 아내는 내가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애썼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나 쇼, 예능 프로그램도 멀리했다. 아내는 뉴스를 챙겼고 늘 조용히 내 곁에 있어줬다. 그러던 아내가 16년 전 자궁에 혹이 생겨 큰 수술을 받았다. 자궁 혹은 아내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나는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안절부절못하는 지경이 됐다. 모두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나는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제발 아내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주님, 혹시 수술이 잘못되어 아내가 반신불수가 되더라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못하는 허수아비가 되어도 좋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수술 날짜가 다가올수록 낮이나 밤이나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한번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내를 풍족하게 해주지 못했다. 참 나쁜 남편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바가지 한번 긁지 않고 묵묵히 동반자가 돼주었다.
드디어 수술 당일. 4시간 수술은 1000년처럼 길었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며 그동안 아내와 함께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홍성에 처음 와서 가진 것이 없어 다음날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공무원증을 쌀집에 맡겨놓고 쌀 한 말을 팔았고 아내는 그 쌀로 밥을 지었다. 아내는 그때 내게 힘을 내라며 긴긴 인생에 할 얘깃거리가 많겠다고 미소 지었다.
아내는 내가 재소자들에게 영치금을 넣어주어야 한다면 단 한번도 반대하지 않았고 자신이 금식하며 저축해 두었던 돈까지 내어주며 격려했었다. 아내는 내가 신학 공부를 할 때도 학우들이 집을 찾으면 언제든 간식을 만들어 주었고 웃음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수술은 서울대병원에서 받았다. 수술이 잘 되면 빨간색 이름에서 파란색 이름으로 바뀌어 회복실로 옮겨지는데 갑자기 빨간색 아내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아내 이름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수술실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황당하게 나를 바라보던 간호사가 빨개진 얼굴로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더 놀라 “아내가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간호사는 “그게, 저어…”만 했다. 앞이 캄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서로 얘기를 하다가 환자 이름을 입력시킨다는 게 그만. 죄송합니다. 수술은 잘 됐습니다. 정말 잘 됐어요.”
단 몇 초간이었지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나는 간호사가 가리키는 쪽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아내는 신음을 하며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아내를 보고 눈물이 솟구쳤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내의 생명을 살려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아내와 함께 주님만 믿고 살겠습니다.”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감사하게도 집사람은 회복이 빨랐다. 아내는 6년 전에는 갑상선암 수술도 받았다. 그때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주님의 신실한 역사를 지켜봤기에 낫게 하실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아내는 지금도 홍성교도소교회에서 반주를 돕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5) 홍성교도소 신우회 조직… 감동의 첫 감방예배를
교도소 당국 반대에 믿음으로 설득… 8평 좁은 공간서 40여명 참회의 예배
감방예배는 김봉래 목사가 교도관을 정년퇴직할 때까지 계속됐다. 2000년대 초반 김 목사가 감방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기도하고 있다.
나는 1987년 2월, 홍성교도소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모든 것이 서먹서먹했다. 하지만 전도에 대한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 손엔 항상 성경책이 들려 있었다. 틈만 나면 재소자들에게 말씀을 펴고 읽어줬고 동료 교도관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국제기드온협회가 제작·보급하고 있는 얇은 신약성경도 여러 권 들고 다니며 나눠줬다.
주변에서는 이런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내가 기도에 너무 열을 올리자 직원들은 나를 다른 곳으로 전출해야 한다는 농담도 던졌다. 한번은 서무과에 근무하는 문서부 부장님이 “본업과 부업을 분간하지 못 한다”며 쓴소리를 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남들을 위해 성실히 생활한다면 재소자들에게도 우리 모습이 그대로 보여 그들 나름대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나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홍성교도소로 보내셨는지 깨닫게 됐다. 나는 홍성교도소에 신우회를 조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직전에 근무하던 군산교도소에서도 신우회를 조직하고 전도를 해봤던 경험이 있었다.
신우회 창립예배는 당시 홍성장로교회 장균재 목사에게 부탁을 드렸고 초대 회장으로 이재찬 장로, 부회장에는 지규근 장로, 나는 총무를 맡았다. 신우회를 조직하면서 나는 신학 공부를 병행했다. 전도를 하면서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근무조를 바꿔서 야간근무를 자처했고 주간에는 신학교에 다녔다. 당시 교도관 근무는 3부제였다. 24시간을 근무하면 이틀을 쉬었다. 나는 이틀간 쉬면서 지역주민들을 위해서도 전도활동을 했다.
신우회의 최우선 목적은 재소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감방예배를 드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교도소 당국은 반대했다. 26.4㎡(8평) 남짓한 감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들어갔고, 매주일 예배를 드렸다.
예배에는 신우회장과 총무가 들어갔다. 감방 안에 들어서자 악취가 진동했다. 화장실 냄새였다. 당시만 해도 감방 내 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라 재래식이었다. 화장실 문을 꼭 닫아도 냄새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냄새가 모두 배었는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재소자들의 반응은 회가 거듭될수록 뜨거웠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함께 기도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다. 어떤 재소자는 자신이 경찰과 검찰에서도 자백하지 못한 죄가 있다며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용서를 구했다. 우리는 그들의 고백과 기도에 힘을 얻었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재소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선사할 것인지 기도했다. 감방예배가 거듭되면서 화장실 냄새는 향기로 변했다. 신기했다. 8평 공간에는 40명이 넘게 예배를 드렸다.
얼마 후 신우회장이 정년퇴임하면서 나 혼자 예배를 인도하게 됐다. 그런데 동역자 없이 감방에 들어서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재소자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서 호신용 기구를 가슴에 품고 예배를 인도했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감방에서 나와 먼 하늘을 보는데 구름 사이로 십자가 형태의 빛이 나왔다. 마치 내가 제주에서 통회자복할 때의 빛 같았다. 그리고는 음성이 들렸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이 너를 물겠느냐?”
음성 앞에 나는 참회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두려움 없이 예배를 드렸다. 더없이 뜨거운 은혜로 재소자들을 섬길 수 있었다. 호신용 기구만 생각하면 아직도 창피하다. 그때 함께 예배 드렸던 형제들에게 사죄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6) 죄는 미워도 정녕 사람을 미워해선 안됩니다
승합차 싹쓸이 절도범 자해 소동… 수술비 대주고 정성 다하자 새 삶
김봉래 목사가 2000년대 초반 재소자들과 상담하면서 기도하고 있다.
교도소에 사는 형제들은 죄명도 각양각색이지만 성격 또한 맞추기 어렵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과 뜻이 맞지 않으면 만나지 않으면 되고, 보기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다. 그런데 교도소는 보기 싫어도 봐야 하고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한다. 그래서 화목이 중요하다.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다.
1980년대 후반쯤이었다. 교무과 근무를 하던 중 하루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한 재소자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옥상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해를 했다.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뛰어내린다는 것이었다.
그를 찬찬히 살펴보니 왕기(가명)였다. 그는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교회 후원을 받아 천안순천향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왔었다. 나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왕기야, 어서 내려와라.” 왕기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엉엉 울면서 사무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고 수술까지 도왔던 나를 보고 미안했던 것 같았다. 직원들도 나더러 “들어가세요. 지금 왕기는 누구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마디 더 하고 싶었다. “왕기야, 너를 믿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마라. 인식이를 생각해야지”라고 했더니 그는 더 이성을 잃은 듯 날뛰었다. 왕기 부모님은 늦게 신앙생활을 하셨다. 아들 사랑이 깊어 면회 올 때면 항상 손자인 인식이를 데려왔다.
나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소장님께 부탁해 창살 밖에서 면회를 하도록 했다. 인식이가 창살 너머의 아빠를 보면 상처가 클 것 같아 특별 면회를 시켜주었고 왕기 모친은 손자에게 아빠는 기도원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인식이는 그 말을 믿었다. 왕기는 특수절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승합차에 슈퍼마켓을 차릴 정도로 싹쓸이하는 절도단 두목이었다. 그는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왕기가 난동을 부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체념하고 의무과로 옮겨 자해 부위 봉합 수술을 받았다. 의무병동에 누워 있는 왕기를 찾았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눈을 감았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다. 왕기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뒤늦게 후회했다.
왕기는 그 후 진주교도소로 이송됐다. 홍성교도소에서 예수를 영접했고 진주에선 성경통신대학 교재로 말씀을 공부한다고 연락이 왔다. 왕기는 나에게 사랑이란 단어를 마음속에 새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백내장 수술을 받으면서 도망치려 했었다. 하지만 나를 생각하고 자신의 욕구를 참으며 도주하지 않았다. 그가 써준 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왕기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내 주머니에 돈이 없어 이 사람 저 사람, 이 교회 저 교회 찾아 하소연하던 그때 아내가 선뜻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내어주며 격려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왕기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다닐 때 사람들은 재소자들에게 무슨 수술을 시키느냐면서 반대했었다. 마찬가지로 교도소 감방 시설이 너무 좋으면 안 된다.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무슨 선풍기와 TV가 필요하냐고 말하는 기독교인도 만나보았다.
사람들은 교도소는 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소자들은 사회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혹독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선 안 된다.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지금은 처우나 생활환경이 많이 개선됐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7) 회심한 조폭, 광천 5거리에 교회 간판 세워 보답
교도소 다시 들어온 조직폭력배… 목사님과 협력해 전도 ‘예수 영접’
교도소 안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된 일균씨가 자신에게 복음을 전한 광천평지교회 신흥식 목사를 위해 교회 간판을 제작해 설치했다.
홍성에서 근무한 지 2년이 되어 갈 무렵이다. 나는 광천 폭력조직 일균(가명)이를 만났다. 면회할 때마다 자주 입회해 대화를 나눴고 서로 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벌금형을 받고 출소를 했다. 얼마 후 광천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우연히 일균이를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반가워하며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우리는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얘기꽃을 피웠다. 잠시 후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고 사무실 뒷문으로 연결된 또 하나의 방을 통과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화장실 옆에 놓여있는 운동기구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나는 일균에게 용도를 물었으나 운동기구라고만 대답했다. 나는 순간 그 기구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이 갔다. 그 기구는 보통 조폭들이 흉기로 쓰는 물건이었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솟았다. 나는 헤어지면서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때부터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 임무가 무엇인가. 재소자들을 교화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던가. 비록 담 밖에 있는 형제였지만 일균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홍성교도소 미결수 수용동에서였다. 설마 했었는데 그는 또다시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나는 일균이와 상담을 시작했다. 일균은 차츰 심적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는 독방에 다녀오면서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감방에서 담배를 피우다 적발돼 독방 신세를 졌다. 잠시였지만 독방의 혹독한 환경을 경험하자 그는 예수님을 찾았다.
이런 일균에게 좀더 확실한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광천평지교회 신흥식 목사님을 찾았다. 신 목사님은 검찰공무원으로 근무한 이후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됐다. 그는 광천을 사랑했고 광천의 조직폭력배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으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신 목사님에게 일균에 대해 말했고 서로 기도하며 전도하기로 했다. 목사님은 나에게 일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며 수번과 주소를 요청했다. 그때부터 목사님의 선교와 ‘철창 전도’가 시작됐다. 일균은 예상 외로 목사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였고 미결수 감방에서 몇몇 재소자들과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어느 날은 자신의 방에 성경 찬송이 없다고 해서, 그 즉시 성경 찬송을 넣어준 일도 있었다. 일균은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혹시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교도소에 오면 내 방으로 보내주세요.” 나는 웃으면서 “아니, 도대체 그런 분들이 뭣 때문에 여기 오겠냐” 하고 말했다. 그는 “아니, 그분들은 사고도 안 내시나요? 교통사고 내고 어쩔 수 없이 오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 모두는 한 치 앞을 모른다. 실제로 교도소에는 종종 장로님이나 집사님 같은 신앙인이 들어온다. 대전교도소에서는 목사님 한 분이 교통사고를 내고 교도소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목사님은 감방에 들어온 날부터 전도했는데 교도관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일균은 나중에 벌금형을 받고 출소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택시 승강장 단장부터 교회 성도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착한 일을 실천했다. 그를 이끌어준 신 목사님을 위해서는 광천 오거리에 교회 간판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현재 곰탕 식당을 운영한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8) 경교대원 노천예배 때 소나기 그치는 기적이
교도소 교회 없어 노천예배 중 폭우…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자 빗발이 ‘뚝’
1990년대 중반, 홍성교도소 경비교도대 대원들은 예배당이 없어 내무반에서 예배를 드렸다.
1992년 12월, 나는 홍성교도소 보안과 소속 경비교도대(경교대) 소대장 직임을 받았다. 앞서 짧게 언급했지만 경교대는 전국 교도소와 구치소 등 법무부 교정시설에서 군복무를 하는 부대와 그에 속한 대원을 말한다. 교정시설 경비를 맡은 군인으로 보면 되겠다. 나에겐 매우 생소했다. 사실 재소자 선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처음엔 실망을 많이 했지만 또 다른 선교의 길을 열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 생각했다. 일종의 군선교였던 셈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경교대 대원들이 모두 자식처럼 보였다.
대원들은 육군 논산훈련소와 예비사단에서 훈련을 마친 후 법무부로 전입된다. 이들은 다시 법무부 연수원에서 6주간 훈련을 마치고 각 교도소로 배속 받아 2년을 복무한다. 그때까지 나는 군선교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없었다. 그래서 일단 무엇이든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신병이 오면 그의 거주지 주소지와 가까운 교회에 연락해 주보와 청년부 소식을 받아볼 수 있게 했고 서신왕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가까운 거리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찾아다녔다.
간혹 거절당할 때도 있었지만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전도했다. 전역하는 대원들에겐 직접 고향에 있는 교회로 찾아가 등록 절차를 밟아주었고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의 새로운 신자가 늘어날 때마다 벅찬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당시 교도소 안에는 교회가 없었다. 이 때문에 경교대 대원들은 외부 교회를 이용했는데 한 번 나가려면 3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을 유지하기에는 좋은 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무반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마저도 눈치를 봐야 했다. 고심 끝에 마련한 게 노천예배였다. 경교대 운동장 옆 공터에 둘러앉아 찬양 예배를 드리고 생일잔치나 진급자 축하예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노천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자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자고 말했다. 어쩌면 엉뚱한 행동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간절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에 전율이 흘렀다. 입은 얼얼했고 몸이 뻣뻣해오는 느낌과 함께 평안이 밀려왔다. 전신은 땀으로 축축했다. 나는 대원들과 더 열심히 통성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잠시, 정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말 그대로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예배를 무사히 마쳤고 대원들은 모두 내무반으로 복귀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모세의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기적이 성경 속에서나 나오는 얘기로 알고 있다. 하지만 기적은 이 시간에도 일어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건은 훗날 경교대 교회당을 건축하는 예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바로 그 노천 자리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날 기적으로 말할 수 없는 힘을 얻게 됐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경교대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쌓고 계셨다. “주님, 기도 응답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이 종, 오늘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육적으로 살고자 했던 것을 이제 모두 버렸습니다.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십시오.”
그날 나의 입속에선 끊이지 않고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9) 5년 인고의 기도끝에 전국 첫 교도소교회 설립
전세금·결혼 패물·돌반지 건축헌금… 노천예배 드리던 곳에 경교대교회를
김봉래 목사가 1997년 3월 28일 홍성교도소 내 경교대교회 입당예배에서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아니, 교도소 안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질 수 있습니까? 당신 사기치고 있는 거 아니오?”
홍성교도소 안에 교회를 짓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교화위원인 한 장로님의 말이었다. 교도소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의심은 당연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전까지 교도소 안에 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은 1993년 따뜻했던 어느 늦은 봄에 시작됐다. 경비교도대 대원들의 생일과 진급자들의 축하예배가 있었다. 마침 여러 모로 신경을 써준 홍성장로교회 여전도회 김정순 권사님과 나는 예배를 마친 후에 차를 마시며 담화할 시간을 갖게 됐다. 그런데 얘기 도중 권사님은 뜬금없이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전도사님, 이곳에 예배당을 세우면 참 좋겠네요.”
“네? 교도소 안에 예배당을 짓자고요?”
나는 그것이 감당하기엔 턱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끌려가듯 했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교도소 안의 예배당, 참 좋은 생각이네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고 한번 해봅시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믿음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문구처럼, 홍성교도소 교회(경교대교회) 예배당 건축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고의 세월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 시절, 나는 기필코 해내고야 말겠다는 확신이 마음속에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교도소 교회. 상상만 해도 은혜와 감동의 물결이 마음을 벅차게 했다. 군인들을 선교하고 재소자들을 교화하는 것, 이보다 더 뜻 깊은 일은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세세한 계획을 세웠다. 경교대 중대장과 상의하면서 교도소 소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중대장 의견은 허술했던 경교대 내무반과 생활공간 없는 대원들을 위해 면회실과 목욕 시설을 신축하면서 예배당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마침 이듬해인 94년 7월,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복지관 신축 승인을 받았다. 교회를 세울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공사비가 문제였다. 복지관 건립 금액은 총 1억원이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돈을 마련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당시 홍성장로교회 김성 전도사와 긴밀하게 의논하면서 후원 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후원은 고사하고 왜 경교대 대원을 위한 교회를 건축하느냐는 반문만 돌아왔다. 경교대 예배당은 대원과 교도소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였다. 내 확신은 더 분명해졌다. 나와 아내는 전세금 일체와 결혼 패물, 아이들 돌반지까지 건축헌금으로 내놓았다. 그렇게 5년이 흘러 모인 후원금은 550만원이 전부였다.
그러던 차에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내무반 건물을 신축하게 되면서 편의 시설도 포함됐다. 예배당은 바로 앞에 따로 세우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노천예배를 드리던 바로 그곳이었다. 총공사비도 5000만원으로 재조정됐다. ‘바울과 베베선교회’에서도 건축을 돕겠다고 연락이 왔다.
후원금도 답지했다. 당시 MBC 미술국장이며 순복음교회 안수집사였던 홍순찬 집사가 모금을 도왔다. 그렇게 해서 모금이 진행됐고 500만원을 남겨놓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동일교역의 박원호 사장이 1000만원을 헌금했다. 박 사장은 가수 싸이(본명 박재상)의 부친이기도 하다. 교회 건축은 96년 11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 3월 28일 완공됐다. 전국 최초의 교도소 내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었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같았다(고후 6:9∼10).
***[역경의 열매] 김봉래 (10) 수인번호 66번 살인범 ‘속죄의 66권 성경 필사’
“자네 번호는 성경책 66권과 똑같다” 믿음의 격려에 예수 영접후 새 삶을
2001년 10월, 정수씨는 한 선교회가 모범수를 격려하기 위해 제정한 ‘우남면학상’을 받았다.
정수씨가 작성한 성경 필사본.
정수(가명)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12월이었다. 살인죄를 저질러 무기수로 감방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괴로워하며 몇 번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포기했다. 어머니와 아내, 자식이 보고 싶어 차마 목숨을 끊을 수 없다며 하소연했다. 그는 다른 재소자와 달리 뉘우치는 표현을 자주 했다.
“피해자에게 너무나 죄스러울 뿐입니다. 지금 와서 이런 얘기 해봤자 소용없지만 정말 괴롭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나도….” 정수는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반성의 태도를 참작해 항소심 재판부는 그에게 20년형을 선고했다.
일반적으로 20년 이상 장기수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래서 안 그래도 팍팍한 교도소 생활을 잘못 풀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장기수도 꽤 있다. 모범수 대부분은 그들 생활의 중심에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교도소도 규율과 조직이 있는 작은 사회다. 재소자들은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허락하는 범위 속에서 근면과 부지런함으로 일을 하며 보낸다. 이를 통해 속죄의 삶을 사는 것이다. 교도관으로서 나의 일은 그들에게 규율을 부여하고 감시하는 것보다, 그들의 비뚤어지고 엉킨 인생의 실타래를 풀어주기 위해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정수 역시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생활했었다.
홍성교도소에 오기 전까지 그에겐 종교가 없었다. 수인(囚人)번호는 66번이었다. 정수는 자신의 번호를 가리키며 “육땡이네요”라며 웃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자네 번호가 성경책 66권과 똑같다는 것을 알 때가 있을 거야”라며 답했었다. 그러던 정수에게 시련도 있었다. 아내에게 이혼 소송장이 날아온 것이다. 재소자들이 교도소 생활 중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 가족관계다. 특히 기혼자인 경우 이혼이나 부모님 상(喪), 아이가 아플 때 가장 어려워한다. 정수는 결국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아이는 어머니가 양육을 맡으면서 모든 것을 잊으려 했다.
그가 예수를 영접한 것은 복음가수가 인도하는 찬양 집회에서였다. ‘내가 너를 도우리라’는 가사가 나올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는 몇 번이고 가사를 되뇌며 입으로 따라 불렀다. 그럴 때 하나님이 자신을 돕는다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고 했다. 그런 시기에 무기수에서 20년형을 받았고 주님의 인도를 의심치 않았다. 예수를 믿게 된 그는 성경통신대학 과정을 시작해 성경을 공부했고 불교신자였던 어머니까지 전도했다.
하지만 항상 모범수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주위의 넘치는 온정과 사랑으로 자만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정수는 자주 말썽을 피웠다. 나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는데 이를 너무 이용했던 것 같다. 보안과 관계자도 “정수를 위해 전도사님이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교도관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다.
나는 정수에게 교만을 꺾으라고 수차례 주의를 주었고 정수가 제자리를 찾도록 기도했다. 기도 응답은 빨랐다. 어느 날 정수가 성경을 열심히 필사해서 나에게 갖고 와 제본을 부탁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필사했다고 했다. 누구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 정수의 징역살이도 그랬다. 정수는 이후 다른 교도소로 이감됐다. 그동안 편지 왕래를 했는데 몇 년째 소식이 끊겼다. 봄이 오면 한번 찾아가봐야겠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11) 어느 무기수의 딸 “아빠와 단 하룻밤 만이라도”
“태어나 백일 즈음에 아빠 교도소로…” 간절한 편지에 ‘만남의 집’ 건립돼
2003년 5월, 홍성교도소 만남의 집 개관식에서 당시 교도관이던 김봉래 목사가 기념촬영을 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재소자와 그들 가족의 관계는 교도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교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교도소 시설 중엔 가족과 만나는 장소가 있다. 면회실이 잠깐의 재회를 위한 공간이라면 ‘만남의 집’은 가족과 하룻밤 지내며 못다한 정을 주고받는 곳이다. 만남의 집은 콘도식으로 지어져 가족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재소자를 만난다. 그러나 모든 재소자에게 1박2일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범수나 딱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이용이 가능하다.
만남의 집은 2000년대 초반까지 각 지방교정청 산하 주요 교도소에 설치돼 있었지만 당시 홍성교도소에는 없었다. 그래서 주로 대전교도소까지 재소자들이 가야 했고, 순서를 기다리는 것도 오래 걸렸다. 그러다가 2003년 홍성교도소에도 만남의 집이 생겼다. 지방교정청 산하 만남의 집과 달리 개인 후원자들에 의해 건립됐다. 홍성교도소 만남의 집 개관은 어느 무기수 딸이 보내온 편지 한 통이 계기가 됐다.
그해 1월 중순이었다. 교도소 교무과에 예쁜 편지봉투와 편지지에 작은 글씨로 또박또박 쓰인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사연은 이랬다. 소녀가 태어난 지 100일 즈음 아빠는 교도소에 무기수로 입소했다. 소녀는 홀로 남겨진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소녀에게 아빠가 소녀를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좋은 분이라고 말해줬다. 소녀는 아빠가 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녀는 아빠와 만나 하룻밤만이라도 보내면서 여느 집처럼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당시 담당은 홍성교도소 최초의 여성 교무과장인 정형숙 과장이었다. 정 과장과 나는 평소 만남의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재소자들이 끊어진 가족과의 사랑을 이어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한 달 안에 완공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후원자가 필요했는데 무리였다. 경교대교회를 세우는 것도 5년이 걸렸는데 한 달 안에 어떻게 짓는단 말인가. 그래도 해야 했다.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선 정 과장과 교정협의회 회장이었던 서산순복음교회 백승억 목사님을 찾아갔다. 백 목사님은 우리 얘기를 듣더니 흔쾌히 돕겠다고 허락했다. 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후원자들을 찾아나섰다. 놀랍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만남의 집 건립 계획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돕겠다고 했다. 물론 후원이 잘 된 것은 아니었다. 만남의 집을 짓는 과정에서도 온갖 시기와 질투, 모함이 많았다. 구걸하는 거지처럼 대하는 사람, 순수한 마음을 몰라주는 비판도 있었다.
만남의 집은 2003년 5월 완공됐다. 전국에서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지어진 교도소 내 첫 사례였다. 당시 청주교도소에도 모금에 의한 만남의 집 건립이 진행 중이었으나 홍성교도소보다 완공이 늦었다. 만남의 집 개관 이후엔 수많은 재소자들의 가족이 다녀갔다. 가족과 허락된 하루 생활을 통해 헤어진 아내가 돌아왔고 자녀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교도소로 편지를 보냈던 무기수의 딸도 아빠와 만났다.
만남의 집을 위한 후원에는 지역 교회와 성도들의 도움도 컸다. 그중 대천중앙감리교회 김요찬 감독은 끊임없는 기도와 후원으로 도왔던 분이다. 하지만 만남의 집 개관예배에는 오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례식이나 위문예배 등 교도소 행사에 빠지지 않으며 ‘담안 선교’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12) 암으로 출소 무기수 “목사님 저 살아났어요”
핀으로 눈 찌르는 등 수차례 자해 소동 믿음·사랑으로 인도… 양성 진단 나와
2010년 홍성교도소 무기수 대상 세례식에서 조영래 애본교회 은퇴목사와 김봉래 목사(왼쪽 서 있는 이)가 세례를 주고 있다.
재소자들 중엔 속을 썩이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중에 자해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중구금 시설 교도관들에 따르면 못으로 자신의 발등을 찍고 바늘로 눈을 꿰매고 칫솔을 먹는다 한다. ○○○번 병만이(가명)가 그랬다.
어느 날 병만이와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전도사요? 그런데 왜 나랑 상담 안 하오?” 했다. 나는 다음 날 그와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그날 침핀으로 자신의 눈을 찔렀고 밤중에 소동을 피워 만날 수 없었다. 그는 며칠을 못 가 칫솔을 먹고 외부 병원으로 실려갔다 돌아왔다. 어쩌려고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얼마 후 병만을 만나러 그의 두 평 남짓한 독거실에 들어갔다. 이는 수형자 상담 원칙에 어긋났지만 나는 병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들어갔다. 담당 직원도 놀라 문을 열어놓고 주시했다. 나는 병만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다음 날엔 성경책을 사주고 읽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며칠이 안 돼 병만은 자신의 손가락을 문에 넣고 닫아버려 봉합수술을 받았다.
나는 다시 병만의 독방 문을 열고 들어가 기도했다. 붕대로 감겨 있는 그의 손가락을 보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병만도 뉘우치는 것 같았다. 그는 성경을 필사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변화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교도소로 이감됐다. 나도 2005년 정년퇴임했고 그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나는 경교대교회를 맡으면서 담안 형제들을 위한 사역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치고 출입문을 바라보는데 병만이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무기수였다. 16년 수감생활을 했으니 아직 형기가 남아 있었다. ‘설마 탈옥을 했나’ 생각하며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담낭암 진단을 받고 형 집행정지로 나왔다고 했다. 의사 말로는 6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느낀 서운함 때문에 출소하자마자 일을 벌이려 했다고 한다. 어머니에게도 감정이 있어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출소해보니 어머니는 하얀 백발이 되었고 얼굴에 주름살이 깊이 패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고민하던 그는 나를 만나러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에게 기도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는 강남금식기도원에 이어 천마산기도원,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등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원자력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술 한 번 받고 싶어 갔다고 했다. 병원을 찾았을 때 병만은 말했다. “목사님, 저 살았어요. 악성이 아니라 양성이래요. 제 목숨 참 모질지요.”
병만은 그때 나에게 묵직한 박스를 건넸다. 상자를 열어보니 흉기가 들어 있었다. 나는 놀라서 얼른 닫았다. 그는 범행을 저지르려고 물색하다가 탈진해 병원으로 실려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형기를 다 마치는 날 흉기를 돌려달라고 했다. 그것으로 간증을 다니겠다고 했다.
병만은 재수감됐다. 대전교도소에서 한 차례 소동을 일으켜 교무과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다. 나는 송금을 하고 병만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징벌 기간이라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발길을 돌리면서 하나님께 그의 변화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병만은 어디 성한 곳이 없다. 심지어 양쪽 발목 아래 아킬레스건에 상처를 내 자신을 혹사시켰다. 무기수인 그는 언제 출소할지 모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역경의 열매] 김봉래 (13·끝) 죄와 벌 넘어 담 안 형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눈물·말씀으로 30년 교정 선교 매진… 남은 꿈은 출소자 위한 김치공장 설립
지난해 12월 말 김봉래 목사(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 신우회 예배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김 목사 오른쪽은 이소민 판사.
2005년 12월 교도관으로서 정년퇴임하고 더 열심히 갇힌 자와 소외된 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기한이 있고 시기가 있나 보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걸어가려고 한다. 30년을 교정선교에 매진해오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병도 얻었으나 지금은 회복 중이다.
건강을 위해 매일 걷는 편이다. 그러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전도한다. 몇 년 전에는 운동하러 갔다가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가을 농사만 짓고 꼭 교회에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를 만나 물어보았다. 돌아가셨다 했다. 어르신은 돌아가시면서 나를 찾았다고 한다. 전도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시행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홍성 지역 복음화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앞으로의 전도는 가가호호 방문보다는 직장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장은 그리스도인이 생활하는 곳이다. 그의 일을 통해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직장 속에서 자신을 숨기기도 한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일터에서 자신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식사 기도만 한다고 기독교인은 아니다. 크리스천 직장인이라면 동료 이웃을 사랑하고 일 자체를 기독교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차원에서 만나는 직장인마다 신우회를 설립하자고 호소했다. 특히 공직 사회에서 신우회 조직은 부정부패를 방지하고 시민을 향한 친절 행동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했다. 그런 호소에 동참이라도 하듯 2003년 홍성검찰청을 시작으로 신우회들이 하나둘 창립되기 시작했다. 성령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홍성군 직장연합회 창립예배를 드렸고 경찰서 신우회, 군청 신우회가 줄줄이 생겼다. 지난해에는 홍성 직장선교대학도 개설해 명실공히 홍성 직장 선교를 위한 훈련센터를 만들었다.
경교대교회는 2011년 경비교도대 제도가 폐지되면서 홍성교도소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교회를 거쳐간 대원들만 해도 1000명이 넘는다. 95년부터는 브니엘성경대학을 개설해 깊이 있는 성경공부를 제공했다. 브니엘성경대학은 군부대 최초의 성경대학이었다. 사연도 많아 입대하면서 몸에 지녔던 부적을 찢어버린 대원, 전역을 앞두고 진로를 위해 금식하며 철야기도를 드렸던 대원,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신학대로 편입한 대원 등 16년간 주님의 일꾼을 배출했다.
돌이켜보면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던 일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재소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시작으로 교도소 안에 교회를 세우고 만남의 집을 완공한 것 등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역대하 말씀에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너희와 함께 하리라”(20:17)는 말씀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나는 그 일하심에 힘입어 또 다시 꿈을 꾼다. 바로 김치공장이다. 출소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다. 그들의 땀과 정성으로 김치를 만들고 그곳을 통해 복음이 전해진다면 이보다 더 뜻 깊은 일도 없으리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복음을 듣는 게 우리들 인생의 목표가 아닌가 싶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쉼 없이 계속될 것이다.
끝으로 가족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자신의 투병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자리를 지켜준 아내와 애교 넘치는 편지로 용기를 더해주는 딸 선경이, 신학을 공부하며 아빠를 응원한 성연과 며느리 명선 내외는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