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선작 *
후일담
13세기 네덜란드 화가 카스크 씨는 잠이 없는 사람 턱을 고인 채 먼 나라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들은 대로 그려 본다 잠이 안 와서
비늘로 덮인 고래의 몸과 두 발 달린 물고기를 그려 놓고 신중하게 세필로 서명한 다음
잠시 눈 붙이고 일어나면 나팔 코를 치켜든 코끼리를
또 완성할 것이다 본 적도 없이
본 적도 없이 속을 보여 주는 일은
커다란 백지
얼마든지 접어 주고
접다 보면 사라지는 흰 새처럼 불길하고 아름다워서
자기 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깃털이 묻었나 하고
우리는 대양과 대륙과 세기를 넘어온 이 기이한 착오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추측하느라 그림 앞에 오래 서 있다 한 복도를 지나 다음 복도가 끝날 때까지
할로겐 조명에 구두 끝을 맞추고 서 있다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상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결국은 카스크, 그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누군가 귀 기울여 주어서 밤이 온다
파도가 온다
보글보글한 양 떼를 몰고 와 백사장에 부려 놓는 꿈을 꾸면서
놀라 뒤척이면서
푹 자요 카스크, 내일은 우리
날씨 얘기나 해요
* 심사평 *
정재리 시인의 「후일담」은 미적 가상의 세계는 체험 이전에 솟구치고, 본질은 하나로 환원하지 않으며, 날씨 같은 변화 속에서 미결정적이고 불연속적이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원리와 존재의 본질을 다감하고 유쾌하게 사유한 시편이다 (김효숙 평론가)
* 당선소감 *
가상의 화가 카스크는 왜 새벽마다 잠이 깨었을까 먼 나라 이야기를 마음에 새겼을까 모르는 그림을 완성해야만 했을까 카스크는 왜.
잠에서 자주 깨어나거나 늘 깨어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오늘의 고독한 카스크들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어 막막한 백지를 얼마든지 접어주겠다 약속하는 일
그러나 이내 사라질 것을 알아 오히려 든든하리라
돌아설 능력이 없어 지속되는 불가해한 사랑
재리라는 이름 때문에 늘 놀림 받고 울던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쓴 일기장과 글짓기장이 더러 헤졌는지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나일론 끈으로 묶어 불로 그을린 매듭까지 차곡차곡 보관해주신 부모님께 마음으로 큰절 올리며
언제나 따듯하고 공정하며 기후환경문제에도 앞장서는 시산맥의 어여쁜 미래지향에 대해 인사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 드립니다
용인 주말농장엔 늦은 벚꽃이 이제야 만발했어요 해마다 세상의 모든 벚꽃이 다 졌다는 뉴스를 듣고 나서야 겨우 피어나는 산벚꽃
느리게 살아가다 먼 미래에 우리는 어떤 후일담을 나눌 수 있을까요
각자의 색깔로 웃으며
모든 약한 생명체에게 새롭고 자유로운 시간이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