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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주일 [하나된 신앙으로 충만까지 성숙해가는 교회] 김성현감독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주시고, 우리가 그 모습을 온전히 갖출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가 우리를 교회로 세우시고, 그냥 놔두시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그의 계획대로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삶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구원을 얻는 방법의 관점에서만 볼 뿐이다.
그래서, 교회 오는 것, 신앙생활하는 것도 천국 가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한다.
물론 결과는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접근방법이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교회에 와서, 개인의 성취를 통해 자기 스펙을 높이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전혀 맞지 않는 세상에 속한 개념이다.
우리는 주의 교회에 속하여, 하나님의 성취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들이다.
이 부르심은 그의 일을 위한 부르심이다.
그의 기업을 우리가 부분적으로 위임받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함께 그 기업을 해 가는 것이고, 설령 나 한사람만 국한하여 본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주의 기업의 한부분을 맡아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 관점, 내가 좋아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야 한다.
마땅히 요구되는 바이다.
[역할을 해야]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큰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는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자세와는 너무 다르다.
이제 시작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 너무 감사하게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 한것도 없이, 끝났다고 볼 수 없다. 그날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떤 점이 우리의 역할일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은 자로서, 어떤 면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역할일까. 내 성품 자체가 변하는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이 일구신 위대한 성취를 나타내는 일면의 증거다.
내 성품의 변화, 내 인격, 내 마음자세가 변하여, 옛사람이 아닌 새로운 인격 자체가 위대한 하나님의 성취를 증명하는 증거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 일일히, 변한 성품들, 하늘의 영광을 반사하는 듯한 빛나는 얼굴들, 뚜렷하게 변화된 모습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역할을 한 결과물이다.
인류를 죄에 빠뜨렸던 마귀의 모든 일들은 끝났으니, 너희들은 마지막 날을 기다려라.
우리의 변한 성품이 그리스도가 내놓으실 수 있는 증거다. 주님의 자신감을 북돋아, 마지막 날에 대한 경고를 할 수 있는 그의 자존심이 된다.
우리를 이렇게 바꾼 것은 그가 자기 이름을 걸고, 심지어 목숨을 던져 이루신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나 성품이 변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하면,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변한 새피조물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통해 그렇게 된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영원한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마음을 둘 것인가.
진실한 자세가 요구된다.
무엇보다, 복음에 대해서, 일차적으로는 신학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일치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어느 교회든지, 신학적으로 다른 길을 만들어가서는 안된다. 이것은 탈선이다.
주어진 복음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이다.
복음 자체가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다.
복음을 준 것은 그것을 통해, 징검다리처럼 밟고 가라는 것이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너희를 구원한다는 약속을 우리에게 오셔서, 전달해 주신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렇다면, 복음에 대한 자세 자체가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알게 해 준다.
내가 복음을 들을 때, 주체할 수 없는 감격, 차오르는 행복, 솟아오르는 결단이 없으면, 애초에 구원을 안받았을 수도 있다.
복음을 대하는 현재의 내 자세가 결국 천국에 이르게 한다.
복음이 내게 어떤 것인가.
그 자체가 결과론적으로 나를 지옥에서 이끌어낸다.
복음 자체에 대해서 내가 변형하겠다고 하면, 겨우 내게 전달된 구원의 길을 내가 손질하는 것이고, 그렇게 힘겹게 온 구원의 길을 해체하겠다는 것이다.
복음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길이고, 그를 보게 하는 눈이고, 그를 느끼게 하는 마음이다.
나는 구원받았으니, 되었다고 하면서, 여전히 악을 행한다면, 그 사람은 복음의 자세가 나쁜 것이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구원받은 다음에 죄를 범하면, 이치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하는 것이다. 구원의 길에서 질서를 이탈한 것이다.
물론 사람이 죄를 범해도, 살 길은 있다.
빨리 회개하고, 그의 마음이 죄와 결별했다면 기회가 있다.
그러나, 필요없다고 하면서, 죄를 강행하면 돌이킬 수 없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의 구속력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주께서 다 갚으셨으니, 이제 손을 떼라는 것이다.
법적 구속에서 풀려났다.
옛날 노예증서를 없애버린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제 자유라고 하면서, 막 나가면 방종에 이르는 것이다.
죄의 구속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방종이 아니라, 죄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free가 아니다.
해방은 마이너스에서 이제 0으로 온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스스로 주께 나와, 주님과 걸음을 같이 걸어야 한다.
우리가 발걸음을 걷기전에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하신다. 그러나, 발걸음을 시작하면 성령이 도우신다.
우리는 해방된 후로, 다시 뒤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죄는 여전히 우리를 노리고 있다.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죄를 범하려는 생각이 있는 것은 구원받은 상태를 잃은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오해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좋지 않은 것이다.
이 사람이 문제가 된 것은 죄와 결별하지 않은 것이다.
억울해도 참아야 하고, 속상해도 견뎌야 한다.
그런데, 마음에는 계속 세상 사람들이 들어있던 것이다.
죄와 결별을 작정했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자로 만들어 놓고 기다리신다.
우리는 싸울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오늘 두번, 세번 쓰러질지 모르지만, 나는 박차고 나왔다. 그러나, 원수가 계속 생각을 넣으면, 어떻게 교회를 빨아먹을까, 어떻게 속일까 하면서 악을 행하려고 한다.
악한 생각을 계속 품고, 현실화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은 종교적 동선을 밟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정기적인 예배, 식사기도, 이런 것은 겉모양만 있는 것이다. 주님과의 교제가 없는 삶은 참 신앙이 아니다.
주께서 나타나셨을 떄,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겉으로만 신앙생활하고 있었다.
겉으로만 행세하던 가짜 목자들.
우리 신앙생활은 어느날부터 교회생활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소용없다.
내가 주님과 사귀던 날들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 그 어떤 날도 소용없다.
어느 순간에 주님을 공격할 수 있는 자가 입교한 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사귀라고 주셨다. 아들과 걸을 수 있도록.
우리와 매일 행하는 분이 그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사귀는 삶을 갖는데, 특별한 능력이나 방법으로 치우침이 아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성도들의 사귐과 영역이 겹친다.
동시적이다.
어떤 면으로는 성도들과 사귐이 없으면, 주님과 사귐이 없다.
주님과 일대일로 상대하겠다고 하기전에, 먼저 이웃을 사랑했어야 했다.
성도와의 교제 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완벽하다. 이 길만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환경속에서 우리에게 제공하셨다.
우리는 주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개인의 성취만 바라지 말고, 역할을 해야 한다.
복음을 순종하는 자세로서, 완전히 구원에 임하고, 그리스도와 마지막까지 끝없는 사귐을 이어가자.
[하나님의 방식을 통해 이룰 목적]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방식을 통해, 새피조물에게 주신 시스템을 말했다.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를 하게 하고, 교회로 세워지게 하는 업무를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에게 주셨다.
에베소서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것이 골격이다.
교회는 이 시스템으로 간다.
하나님이 주신 공식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진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
바로 믿음의 통일부터 시작한다. 또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첫출발이 나왔다.
[믿음이 연합되는 것]
교회는 도대체 어떤 성질의 것인가.
교회는 믿음으로 연합된 회중이다.
여기 있는 믿음은 무엇일까.
세게 믿는 것, 집중력과는 무관하다.
무엇을 믿느냐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다.
신앙적, 영적 지식의 내용, 교리적 체제를 말한다.
기독교 전체 이론에 대한 체계.
굉장히 객관적이다.
주관적이 아니다. 믿음의 통일을 말한다.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골로새서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과 실제적으로 함꼐 살았던 사도들과 주님의 명령을 받고 세워진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입을 대신하여 말했다.
나와 사도들이 가르치는 내용에만 뿌리를 내려라.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고린도교회는 파가 생겨서, 분열이 되었다.
무엇보다, 신학적인 위치가 다르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다른 신학적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친 것으로 합하라.
하나님의 진리는 이런 파, 저런 파로 나뉠 수 없다. 나뉜다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신학적으로 갈라진 것은 어딘가는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다.
갈라졌다면, 적어도 둘중 하나는 옳은 것에서 떨어진 것이다.
믿음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갈등이 예비된 것이다.
사람을 변케 하는 복음의 유기적인 체계가 우리에게 온전히 순종되지 않으면 싸우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
둘째, 세워진 교회에서 나타나야 하는 구체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구원받게 하는 지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것을 말한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내 죄를 사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이 정도만 알아도 구원받는다.
그 정도만 갖고, 나 구원받았으니, 이제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면 우스운 꼴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고 말하는 것은 원어로 기노스코(ginwvskw)라는 말인데,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아는 정도의 앎이다.
성경의 대부분의 경우, 안다는 표현은 인격과 인격의 교통을 통해 충분히 아는 것을 말한다.
본문의 앎은 단어의 근원은 똑같은데, 더 강한 단어다.
아는 것 위에 있는 단어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충분히 안다는 의미다.
유난히 이 단어를 씀으로, 아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이고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을 충실히 배우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머리에 채워서 지식이 쌓인 정도가 아니라, 내 삶 속에 깊이 심어지고, 내 정신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내 소망으로서 자리 잡은 주의 말씀이다.
미래를 밟고 갈 소망의 징검다리로 생각하고, 순종하고 받아야 한다.
이렇게 배워지는 것이 주를 아는 것이다.
빌립보서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립보서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립보서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주님을 종교적인 지식수준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얼마나 주를 사랑하고 있는지 나타난다.
매 순간 주님을 기쁘게 하고 싶고, 관심이 있다. 이 자체가 사귐이다.
물론 바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그 때, 충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다를 필요가 있는가.
그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똑같이 해야 한다.
영적 지식을 배우는 동안, 성도들과의 교제가 함께 무르익는다.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로새서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교제를 통해, 성도간의 교제도 이루어진다.
빌립보서 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립보서 1: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복음 안에서 교제, 우리의 사귐은 내가 주님과 사귀는 것과 겹친다.
하나님 아들에 대한 지식이 자라나는 것은 자세가 달라야 한다.
나의 선한 모습, 겸손한 모습, 충실한 모습, 사랑가득한 모습으로 주님과 교제해야 한다.
평생동안.
그렇게 해도, 주님을 충분히 아는 것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교제로 인한 바로 이 관계를 주님이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양들은 굉장히 미련스럽고, 둔하다.
그러나, 목자와 마음이 통한다.
이래라, 저래라 안해도, 마음이 통한다.
양들은 목동과 커넥트가 되어있다.
주님은 이런 관계를 원하신다.
본문의 문맥적 성격에 의하면, 믿는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일의 대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라는 말은 믿는 대상을 맞추라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 대한 하나가 됨을 말한다.
그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것이 내게 영생이다.
교회는 성도들간에 교리적 일치가 되어야 하고, 주님을 아는 것에도 통일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 교회도 이렇게 주를 아는 것에 함께 된 감격을 이루기 바란다.
[영적 성숙]
셋째, 영적 성숙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패턴에 따른 구체적인 목표중 세번째는 본문의 세번째에 해당되는 영적 성숙이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여기서 온전은 원어로는 완성, 종결을 말한다.
사람은 여기서 아이에 대비되는 장성한 사람을 말한다.
어린 아이는 경험이 없고, 신체적으로도 미성숙하다. 어리숙하고, 부자연스럽다. 잘 실수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숙의 분량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라고 한다.
백프로 그와 똑같이 되는 것은 그분 자체의 경지까지 가는 것이다.
[아들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그분을 닮기 원하신다.
영적 성숙면에서.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영적 성숙이라는 말에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성숙은 인격적 깊이를 말한다.
영적 성숙이라고 하면, 영적 지식이 많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앞에 영적이라는 말을 붙이면, 내용 자체를 바꾸는 사람이 있다.
아무것에나 영적이라는 단어를 집어넣는다. 사람을 때려 놓고도 영적 사랑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말라.
사람의 마음에 관한 것이다.
영적 성숙은 사람의 됨됨이, 인격적 성숙을 말한다.
사람을 해치고, 악을 행하면서, 영적 성숙은 말은 안된다.
사랑이 없으면 악인이다.
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전히 본질적으로 죄인이다.
옛사람이 그대로 있다.
우리가 주님을 닮는다고 할 때, 성품을 생각한다.
주님이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주님에 대해서 다 모르지만, 대부분을 말할 수 있다.
어떤 성숙함인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인자는 자비가 많고, 긍휼이 많으시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의로우시다.
그는 죄에 흔들리지 않는다. 죄에 이끌리지 않는다.
죄의 유혹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니까, 정의로우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실하시다. 인간들은 늘 속임수를 쓰려고 하고, 항상 뭔가를 꾸미고 있다.
또, 주님은 충실하시다.
사람과는 완전히 반대다.
사람은 목사님 존경합니다. 끝까지 섬기겠습니다 하고서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진짜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마음을 속인다.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 한다고 하지만, 상황이 안좋으면 버린다. 이것은 충성이 아니다. 충성은 마지막 날에만 알아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히 마음이 변치 않으신다. 변덕이 없으시다.
신뢰하기에 합당하시다.
이런 면들이 주님의 본성이다.
우리가 그의 본성을 닮아가는 것이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주님을 방불하게 하는 모습이다.
교회는 그분의 충만함 자체가 되어야 한다. 목표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가 따라갈 목표이고, 우리는 그의 완전하심을 적어도 반사하거나, 작은 광채라도 발할 수 있어야 한다.
요한1서 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그와 함께 걸으라 명령이 되어있다.
걷는 것은 행하는 것을 말한다. 행한 것은 사는 것을 말한다.
걷다, 행하다, 살다 똑같은 말이다.
그리스도로 사는 것.
너희도 그렇게 행하라.
그가 아버지를 향해 항상 바라보고, 순종하심 같이 우리도 똑같이 주님을 향해 그렇게 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모습. 영광에서 영광으로.
더 상승한다.
우리 삶은 우리가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성령이 인도하신다.
성령없이 우리는 기도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한다.
우리가 하겠다고 하면, 능을 주사, 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기도해주시는데, 무엇을 못하겠는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다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우리의 생각대로 안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구속받지 않은 요소가 있다. 우리 육신은 구원받지 않았다.
로마서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함은 알지만, 몸은 구속을 못받고, 거절한다. 그래서, 우리 몸 때문에 알고도 당한다.
로마서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육체는 원수가 이용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완전함을 이루기 어렵다.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성숙함은 가질 수 있다.
계속 향상 시키는 것이다.
골로새서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로새서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완전한 자가 되라고 한다.
노력하고, 분투한다.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해.
어렵지만, 해라.
여기서는 약간 모순된 듯한 느낌이 있다.
[이미 주셨지만, 아직 이루어야]
이미 다 주셨지만, 아직 이루어야 한다. 모순되어 보인다.
현재 어렵다. 당연한 이치다.
나중에 영화롭게 되는 단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아마도 죽음을 지나서.
정하시고, 부르시고, 영화롭게 하실 때.
그렇지만, 그 때까지 힘쓰라.
이미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개념이 동시에 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주셨다.
씨가 심겨졌다.
나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미 씨가 있으니, 최종 완성될 때까지 진행될 것이다.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앞에서는 이미 너희에게 있으니, 유지하라는 느낌이 있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이미 주어진 것 같은데, 미래에 있다.
완성될 씨가 있다. 자라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셨다.
기어코 끝까지 이루게 될 것이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그런데 앞으로 충만을 이룰지어다.
에베소서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에베소서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다. 당신에게 하늘의 복이 이미 주어져 있다.
포기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처음 분량이 내 속에 다 있다.
나는 다가가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목사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것이 이것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이미 주셨다.
지금은 노력해야 하는 황무지를 일구는 느낌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다 있으니, 충실하게 이룰 수 있도록 독려하고 이끌어 가야 한다.
[전체가 함께 힘써야 할 일]
하나됨과 성숙이라는 측면에서 목사에게 주어진 임무가 크다.
이것은 목사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모든 성도가 함께 하는 것이다.
교회는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유업을 맡아, 모두 부름을 받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본문에서는 미래에 무엇이 된다는 표현을 쓴다.
{우리가 다 함께 하나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될 때까지 이루어 갈 것이다}
{우리가 다 함께 온전한 사람이 될 때까지 이루어 갈 것이다}
{우리가 다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될 때까지 이루어 갈 것이다}
열심히 수고하는 그를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축복하실 것이다.
배우고 순종하는 교회 되자.
하나님을 아는데 함께 교제하는 자들 되자.
온전한 예수의 분량까지 함께 달려가자.
우리를 받아주소서.
순종하여 가고, 배움에 있어서, 주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나는 아무것도 없지만, 내게 심어주신, 완벽한 계획으로 완벽한 능력과 보증과 결론을 갖고 계신 하나님 뜻대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