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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청지기(누가복음 12:38~48) 2024년 12월 29일
성락교회 2025년 섬김•헤드팀장 임명식(주일연합) 설교: 김성현 감독
(누가복음 12:38~4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친히 주신 비유의 말씀으로써 세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그 스타일을 그대로 묘사한 것입니다. ‘천국이 이런 모습이 되고,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와의 관계에서 이렇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역사하시는 것인가?’ 궁금할 일이 없는 것이 대략 그 기본 구성이 여기 다 밝혀져 있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진실을 다해야 되겠죠. 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가운데 진실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날을 준비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방탕하고 즐기게 됩니다. 그 즐기고 있는 그 당사자는 사실 그 인생을 걸쳐서 주인을 기다려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열심히 했어야 됩니다. 몸만 세게 힘을 주고 하는 것이 아닌,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겠죠. 자기 주인이 올 때까지,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마음으로 진정 사랑하고 섬기고 의무를 착실하게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 타락한 인간이 잘 못하는 면입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하는 것,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거듭난 자들, 신실한 자들은 누가 보지 않더라도 평생 동안 주님을 마음으로 예비하는 자일 것입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그분만을 위해 자기를 움직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그분을 기다리지 않고 있다면 반드시 잘못될 것입니다. ‘왜요? 그건 주님이 하늘에 임하시고 나타나시는 그 날에 준비하지 않고 있던 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 아닌가요?’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차별 두지 말고 모두가 똑같이 그 날을 준비해야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신앙생활 전체가 잘못될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맞지 못하게 될 것이다.’ 주인이 갑자기 들이닥쳤는데 얼토당토 않는 일을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죠. 청지기는 주인이 혹시 밤에 오실 수도 있으니, 졸려도 참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말씀은 우리 삶에 또 우리 교회의 삶에 정확하게 적용돼야 될 거룩한 법입니다. 성경에 거의 모든 말씀이 매주 만나는 우리 교회의 삶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여기 중요한 하나의 말씀이 있는데, 성경 전체를 요약해보면 계속 같은 뜻을 가진 새로운 문장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한번 만들어 보자면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순종하여 죽도록 충성하자.’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행복할 날을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또한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충성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다만 천국에 가서는 “당신의 영광을 나눠주십시오.” 하는 것은 해도해도 너무한 것이죠. 이치적으로 논리가 성립이 좀 안 되잖아요. ‘나는 실컷 놀게요. 하지만 당신의 것은 내게 나눠주셔야 합니다.’ 하는 괴상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주의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은 그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정하게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회는 다 이런 식으로 이 구도 안에서 살고 있는데, 만약 그렇지 않은 교회가 있다면 대단히 문제입니다.
사실 제가 보아왔고 체험해 왔던, 계속 연이어졌던 많은 세월들을 보자면 우리는 문제가 있을 것을 예약해 놓고 산 것 같습니다. 대단히 아슬아슬하게 지내왔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모범적일 수가 없었던 이유 하나가 있습니다. 많이 있는데, 다 꺼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적어도 두 세대 이상이 여기 있으니까, 오늘은 교육의 날로 삼아서 듣기 바랍니다. 이전에는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칠 일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법 자체가 우리에게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판단할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법이 각 사람 안에 보유 됐으면 좋겠습니다.
지도자 되어 한을 풀자
우리 신앙의 근본적이 면에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지도자 되려고 하는 생각입니다. 세상에서는 지도자가 되기 어려운데 교회는 뭔가 허점이 많고 약한 데가 많으니 ‘여기서 내가 한번 힘을 내서 다른 사람을 쓰러뜨리고 지도자가 돼 보자!’ 하는, 마치 세상에서의 그 한을 푸는 식의 그런 모습이 무슨 약속이 된 것처럼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하는 갖는 것, 특별히 기관장 같은 직분을 맡는 것을 교회에서 자기 영향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여겼습니다. 교회의 직분 가운데 사람들이 높게 보는 그런 직분을 맡게 되면 그것을 개인적인 성공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람들의 어떤 성공담에 대한 굶주림이랄까? 과거 70년대, 80년대 이런 영향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그런 조직이 돼 버렸습니다. 세상에서는 평생 일해도 과장 정도밖에 못 올라가니, 교회에서 그 못 이룬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부장급은 올라가야 되겠다.’ 교회 직분을 세상적인 성공으로 본 것입니다.
말로도 서로 계급 정하기를 합니다. “자네, 뭐 이렇게 했나?” 이렇게 상대방을 살짝 눌러보고 상대방이 반발하지 않으면 “어, 자네 그럼 이렇게 해.” 하고 그 사람의 이름은 ‘자네’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은 조직입니다.
자기가 못 이룬 인간적 권세욕을 여기서 손쉽게 이루려고 하는데, 이는 정확하게 성경과 반대가 되는 개념입니다. 침례 교회는 더욱이 아닙니다. 침례 교회는 장로교적인 피라미드의 수직 관계같은 엄한 질서 같은 것이 없습니다. 여기는 개념이 다릅니다. 침례 교회는 담임 목사가 모든 회중을 인도하는 유일한 인도자입니다. 목자입니다. 담임 목사가 교회의 모든 삶을 결정합니다. 침례 교인 아닌 사람이 왈가불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에는 교만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교만이 나타나면 부정적으로 보고 경계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표정에서부터 교만함이 서려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마다 다 그렇지마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교회 안에 서열이 다 있습니다. 오만 방자합니다. 거만은 마치 권세의 표 같았습니다. 거만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등급을 나눕니다.
이런 데에는 옛날의 삶에서 배워온, 사회에서 본 습관이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위력으로 제압하는 것. 힘으로 힘없는 자를 제압하는 그 풍조,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세상 사회 질서를 가져온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소위 영적 지식이라 뭘 많이 알면 그것이 계급을 높이는 데에 약간 보너스처럼 여겨졌습니다. 이 방향성이 각 개인의 위력에서의 자연 질서를 교회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방향론이 좀 이상했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성경과 전혀 안 맞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 부분은 뒤로 미뤄놓았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회장이 너무 많습니다. 직원이 한 만 명 되는 그런 곳에도 회장이 있는데, 여기도 회장이 있습니다. ‘회장’이라 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또 그렇게 며칠 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더 권위적으로 됩니다. 또 기관 사이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약간 높은 기관이 있고 낮은 기관이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의 등급이 정해집니다.
그럼 기관장은 어떨까요? 좀 큰 기관의 기관장이라면? 이쯤 되면 교회의 신임 목사들, 안수받은 지 10년 안쪽의 부목사님들은 어린아이로 봅니다. 디모데서에 보면 이런 태도를 굉장히 나쁘게 봅니다. 예수님도 30세 중반까지 밖에 못 사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신 그 젊은이에게서 왔습니다. 사도들의 대부분이 다 젊을 때 죽었습니다.
제가 이런 걸 어떻게 아냐고요? 저는 너무 잘 압니다. “목사님, 밥 먹었어요?” 이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너, 밥 먹고 왔냐? 너 네 계급 잘 알지?’ 이러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혹시 우리 성도들이 그런 모습을 봤다면 그런 모습은 배우지 마세요. 목회자는 당신의 목자입니다. 기관장이라고 목사에게 호통을 치기도 하는데, 영적으로 목회자는 어버이 그룹에 들어갑니다. 그 목회자가 부목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에게 호통하는 것은 어버이에게 호통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목사가 하나님을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하나님을 불러오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을 열어서 그 영혼에게 하나님의 빛을 비춰주는 사람, 하나님과 소통하게 해주는 자입니다. 목회자 없이 성도들 스스로 못 합니다. 그런 영적 권세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특별히 높은 기관에서는 교회를 도리어 낮게 봅니다. 이건 완전히 세상 사람인 것입니다. 불신자, 지옥의 자식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 세상에서 나이 많아질수록 사회 계급도 조금 높아지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나이 많으면 더 높은 사람으로 대우받으려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 많은데, 하나만 보자면, ‘너희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라. 너희 중에 큰 자라면 오히려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결국 낮아지게 될 것이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내가 그를 높이리라[1].’ 했습니다. 이 말씀을 지지하는 같은 내용의 말씀이 신구약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하는 그런 높은 자들이 하는 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또 이런 일들이 한없이 그냥 가다 보니 사람들의 생각들이 계속 오염돼서 교회는 굉장히 아슬아슬한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가 리더로, 어디 무슨 장이라든지, 목회자라든지 세워주자 마음이 변해서 오히려 사람들을 선동해서 저를 공격하고 치려고 했습니다. 그 이름과 얼굴까지 다 기억합니다. 내 나이 듦과 함께 망각되지 않는 한,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직분을 죽을 때까지 하려고 합니다. 임직을 바꾸면 나에게 복수를 합니다. 왜 그런 일들이 있을까요? 임직을 받았으면 저에게 고마워해야 되거든요?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임무를 주었는데 지금은 저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그는 그로 인해 받은 혜택이 어마어마합니다. 저는 이런 점에 대해서 너무 일관된 반응이랄까? 나름대로 그 악한 질서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철저하게 대책을 세워서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은혜를 베풀면 은혜 받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 받은 자가 은혜 베푼 자의 손을 물어 뜯습니다. 임직을 바꾸면 저에게 복수를 합니다. 저는 자기가 원할 때만 필요한 사람이지, 그 외에 상관하면 귀찮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런 데 대해서 기관장들에게 교육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상태로 유지해 왔습니다. 사회적 조직으로 우리 교회가 그냥 왔습니다. 그래서 장을 오래 한 사람이 ‘원로님 돌아가시면 우리가 교회를 인수하자.’ 이렇게 모의를 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 마음의 계획은 현실적으로 더욱 구체화되고 강화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목사들 중에는 ‘원로님이 돌아가시면 저쪽이 먼저 손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쓰자. 우리가 빼앗자. 우리가 높다.’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건 마귀 거든요? 마귀는 우리에게서 잘라버리고 멀어져야 합니다. 마귀가 교만합니다. 근데 그 성질이 그대로 나타나서 ‘이제는 하나님 위에 내가 똑같이 겨루어 보리라.’ 한 것입니다. ‘어!? 가만히 보니까 나도 꽤 높지 않느냐? 나도 지극히 높은 자와 한번 겨루어 보리라!’
하나님이 그 자를 반드시 음부 맨 밑의 구덩이에 빠뜨린다고 했습니다[2].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절대 반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했습니다[3]. ‘주 앞에서 낮추어라. 그러면 주께서 너를 높여 주시리라.’ 우리를 높여주는 것은 주님입니다. 기독교회에서 이렇게 자기를 나타내면 안 되는데, 자랑을 한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 같지 아니하고 신사적이고 귀부인 같은 사람들이 많다고 했는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하는 사람은 다 빠져나갑니다.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신사적이어야 합니다. ‘신사적’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영국에서는 지위가 높을수록 친절합니다. 친절한 사람일수록 지위가 있거나 계급이 높은 사람입니다. 지위가 없고 계급이 낮은 사람일수록 사납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랜 시간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직을 이어가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 했는데 우리 교회는 잘 안 참습니다. ‘온유하고…’ 온유하지도 않고, ‘투기하지 않고…’ 투기, 너무 잘합니다. ‘자랑하지 아니하니…’ 자랑도 잘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무례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자기 유익만 구하고, 성을 잘 내고, 악한 일을 생각하고, 불의를 좋아합니다. 정말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겐 해당되지 않는 먼 나라일 같습니다.
기관장을 한 다음에는 보통 자문위원이 됩니다. 회장자리에 있다 있던 자가 마음의 아쉬움을 달래 주려 2~3년을 자문위원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우리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에 사태가 난 것은 갑자기 발생된 일이 아닙니다. 사태 때 우리 교회는 예배당들이 ‘본교회로부터 우리 예배당을 보호하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배당, 우리 거다. 담임 목사로부터 우리 예배당을 보호하자.’ 너무나 우습지 않습니까? 마치 초등학생이 ‘우리 엄마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 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엄마가 아무래도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고 우리의 권리를 빼앗으려는 것 같다! 우리 엄마를 구속하자!’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의식은 예배당마다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보호하자. 교회가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자.’ 그래서 기관장 같은 사람이 나서서 교회에게 “우리 건들지 마시오.” 합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에 대해 걱정을 안 합니다. 사태가 났으면 ‘빨리 수습해! 빨리 방어해! 빨리 지켜! 빨리 회복시켜!’ 하지 않고 오히려 ‘잘 됐다.’ 하면서 사태를 이용해 서로 자기 유익을 얻어내려 합니다.
우리 젊은 세대는 사태로 교회 생활을 시작한 셈인데 당신들의 자녀들에게 절대 얘기하세요. ‘우리 그때의 모습을 절대 따라가지 말자.’ 결심하는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린 절대 그렇게 하지 말자.’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를 다 뽀개!’ 하고 자폭하려 하는데, 저는 어떻게 할까요? 이 무지하고 무능한 사람이 열심히 사랑하는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목자를 제거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너무 불쌍한 사람이 있어서 내가 은혜를 베풀어 주면, 도리어 내게 복수를 합니다.
촛대 옮겨질 것
우리는 촛대가 옮겨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변하지 않으면, 절대 옮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멈추고 재건해야 합니다.
성경에 여러 말씀들이 이런 데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예비치 아니하고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4].’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지도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많이 달라 하실 것입니다. ‘너, 한 것이 뭐냐? 내놔라.’
또 ‘주께서 이것을 말하지 않았으면, 성경 말씀에 있지 않았으면 죄가 아니라고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이젠 핑계 대지 못한다[5].’ 했습니다. 제가 선포했습니다. 이제는 ‘나 그거 모르는 사실인데요.’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의의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나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도를, 하나님의 진리를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지옥 갈 자들입니다. 마귀 자녀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켜서 살려주셨으니, 그 앞에 통회하는 것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할 일입니다. 우리 마음에 소망이 70프로라면 30프로는 아픔입니다. 마음 한 켠에는 늘 죄송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이 주님을 향한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함께 갖고 가야 합니다.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반드시 그가 벌하시는데,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 영혼을 소생시킨다고 했습니다[6]. 겸손한 자에게 구원을, 생명을 부어준다 뜻입니다.
희생과 사랑
우리 교회는 모든 기관이 다 희생과 사랑으로 이루어져서 우리는 희생과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기관장이 무엇일까? 이제 ‘기관장’이라는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회장’이라 하면 왠지 무릎께부터 힘이 빠져서 건들건들해지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포즈가 느슨해지는데, 쓰러지지 않게 힘주세요. 회장이라는 이름을 우리는 이제 버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뭐라고 하느냐? ‘섬김팀장’ 혹은 이와 유사한 ‘헤드팀장’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헤드팀장’이지만 섬기는 자입니다. 그건 계급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능적인 것입니다. 그분들은 뭐냐? 거느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감독의 목회적 방침을 자기 팀원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감독님이 뭐 저렇게 하래~” 이렇게 말만 전하는 자가 아니라, 감독의 심령으로 전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이렇게 하니, 우리가 생각할 때 교회,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합시다. 아셨습니까?” 하고 팀원들에게 전하고, “감독님, 팀원들에게 이렇게 전달했는데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그러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하고 저에게도 전달해 줍니다. 그리고 팀원들에게 “우리 이렇게 교회를 따릅시다. 감독님을 따릅시다!”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십여 년 동안 ‘우리 감독님에게 능력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서운 하나님의 이적이 일어나고 있어서 저는 압니다.
그런데 무책임하게 어떤 섬김팀장은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섬김팀장은 뭘 섬긴다는 것이죠?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팀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팀에게 뭔가 하려 한다면 섬김팀자이라는 그 이름이 자기 팀에 대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는 제어 구실을 합니다. 그가 섬긴다는 것은 우리 전체를 섬기고, 감독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기능을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기관장은 감독이 보낸 연락자입니다. 감독이 보낸 스피커인 것입니다. 마음까지 가동하는 스피커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관장들이 사후 설명은 하지 않고 “여러분, 다 이거 하래요~” 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좋은 태도는 자기가 다 취합니다. “아이고, 딱해라, 많이 힘들죠? 근데 저거 하라는데? 어떻게 하라고…” 하는 식으로 해석을 묘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풍조를 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 부목사님들도 본교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예배당 같은 곳들은 저와 다 절단돼 있습니다. 내가 저들을 먹이고, 저들을 양육하고, 저들을 축복하려는 나의 소원을,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기 위한 나의 열정을 잘라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게는 마귀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섬김팀장이 됐든, 헤드팀장이 됐던, 목회자가 됐든 감독을 순종하는 자, 협력하는 자입니다. 교회에 목회자를 보내면 그곳 영혼들을 구원해야 되는데, 도리어 영혼들을 어둡게 하여 내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없고, 거듭 나지 않은 사람 같이 합니다.
주의 교회는 예수님도 섬겼습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을 보면, 나옵니다. 교회는 예수님도 섬기는 집입니다. 집을 지으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예수님도 교회를 섬깁니다. 그 집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서비스, 봉사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 집 섬기는 아들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의 뜻을 이루신 것은 그의 집입니다. 과거에는 그 집이 이스라엘이었고, 이제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새 이스라엘.[7]
‘이때는 성령을 시험치 말라.’ 했습니다. 너희 마음부터가 달라져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마음이에요. 마음이 주님 앞에 굴복하고,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
죽도록 충성하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8].’ 했습니다. ‘죽도록’이 무슨 뜻일까요? unto death, 죽을 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기관장이 됐습니다. “아, 우리 이제 시간이 좀 지났는데, 회의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야지.” 당신은 기관장인데 집에 갑니까? 나도 장이거든요? 난 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나도 장인데, 나, 죽을 것 같습니다. 내게 24시간이 다 섬기는 시간입니다. 나, 휴식도 없습니다. 나, 내 마음을 위로할 것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집에 가서 쉽니까? 기관장이? 이런 분은 기관장이 하지 마세요. 진짜로.
죽도록 충성하고 그 대가로 무얼 얻습니까?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라 하니 빵빠레가 울리면서 어떤 영광을 받는 모습이 떠오릅니까? 그야말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내게는 면류관보다 더한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죽을 때까지, 힘든 것을 하는 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힘든 걸 바쳐라.’ 뽐내는 것은 우리 교회에서 이제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끝입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들이나, 우리 교회 직원들이나 이 부분에서 저와 맞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최고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지막, 비틀비틀거릴 때까지 마지막 것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빼앗아 먹을 생각을 하지 말고.
우리 이제는 촛대가 옮겨지지 않기 위해 주님 앞에 회개한 모습으로, 통회한 모습으로 뭉쳐서 나갈 것입니다. 빨리 다음 세대도 걱정해 줘야 합니다. 아버지들 가운데 자기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서 임금 노릇하려고 하고,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고, 한마디도 지지 않고 아내고 자녀고 그냥 다 꺾으려고 하는 사람. 다음 세대는 예수님의 닮은 꼴들입니다. 다음 세대로 이어줘야 합니다. 당신이 뼈가 되어서, 당신의 온 마음과 온 인생이 다음 세대들의 거름이 되어서, 토양이 되어서 그들을 받쳐줘야 합니다. 다음 세대가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오를 수 있도록. 교만하게 ‘영원히 앞으로 나오는 온 세대가 내 세대를 섬길지어다!’ 할 수 없습니다.
섬김팀장을 감당하면서 에너지가 남으면 진짜 문제입니다. 다만 에너지를 다 쏟아내서 혹시 연중 어느 때든지 더 이상 힘을 못 쓰는 것 같다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넘겨주세요. ‘아, 장 비슷한 거 다른 거 하고 싶어요.’ 어디 필요한 데 있으면 어떻게 도와보겠지만, 웬만하면 세상에서 장 노릇하시고, 교회는 섬겨주세요. 당신 에너지를 다 쏟으란 말입니다. “어…감독님, 나 더 못 하겠습니다. 나 지금 이렇게 마른 거 보이시죠? 나 병 나가지고요, 이걸로 병 얻어서 지금 쓰러질 거 같아요.” 그런 사람에게 저는 박수 쳐 줄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영원토록 그 사람은 사랑받을 것입니다. 에너지가 다 빠질 때까지 하고, 빠지지 않았으면 유지를 하면 됩니다. 다만, 더 이상 에너지가 안 나오는 것 같다 싶으면 바꿔줘야 합니다. 어느 때든지 기여를 못하면 바꿔줘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기여를 하고, 이 사람이 진짜 우리를 위해 도움되는 희생을 하는 자라면, 나이가 들어도 하세요. 일을 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체력이 약하고, 누구든지 아이디어가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럼 쉬세요. 얼른 다음 사람이 하도록.
교회와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은, ‘교회가 마음에 안 들어. 교회가 이러시면 안 되는데.’ 하는 것은 교회가 나쁘든지 당신이 나쁘든지 한 것인데, 이런 생각이 드는 자는 그만 두세요. 당신이 생각하는 악한 교회가 해야 되는 일을 해야 됩니다. 이런 자는 나가주세요. 교회랑 맞지 않으면 물러나야 합니다. 우리 후배 성도들이 부끄럽지 않게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사태를 통해 지금 매우 비싼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태를 일으킨 자들로 인해 우리 교회는 수천억의 손해를 입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왠만한 사회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알 것입니다. 오늘부터는 옛날 우리의 잘못된 그런 길, 전부 잘라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하자고요. 이제부터는 정말 순종하시고, 섬김팀장은 교회 섬기는 사람, 감독 섬기는 사람으로서 감독의 심정으로 팀원들에게 잘 의견을 전달하시고, 그들의 의견은 다 다시 저에게 알려주세요. 그 리애종(liaison), 연락책임자입니다.
우리 모든 기관은 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운영할 것임을 오늘 이 자리에서 선포합니다. 절대 다른 아이디어, 절대 우리 교회에 허용 안 됩니다. 주 예수 이름으로 이것을 여러분께 명합니다. 절대로 이 뜻에 순종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당신에게 복을 명하는 길입니다. 내가 ‘당신의 인간적인 권위를 다 누리십시오. 즐기십시오.’ 하는 것은 저주하는 말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하나님께 유리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유리하게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신하고 순교할 작정 되신 분만 섬김팀장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종이 주의 권위로 선포한 바와 같이 우리 교회가 앞으로는 주님의 뜻을 섬기는, 주님의 명을 따라 서로 연결하여 사랑으로 세우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여 이렇게 새로 우리의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기관장이 자기의 권위를 누리고 남을 지배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닌, 교회를 섬기는 헌신적인, 겸손하고 통회하는 성도들이 될 것을 서로 결단했사오니 우리를 받아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0~12)
[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2~15)
[3]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4]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눅 12:47)
[5]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6]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7]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1~8)
[8]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출처] 20241229 진실한 청지기(누가복음 12:38~48)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