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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등록 영조(英祖) / 영조(英祖) 17년(1741) / 8월 15일
경상도(慶尙道)에서 갑오년(甲午年) 이후에 창건한 서원을 조사하여 장계를 올리는 건
비안현(比安縣):백천정사(白川精舍)는 현령 유포(柳砲), 중랑장(中郞將) 변용(卞勇), 중훈대부(中訓大夫) 이훈(李薰), 찰방(察訪) 장문서(張文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무술년(戊戌年) 7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이집(李㙫)이고 현감은 홍언도(洪彦度)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변태화(卞泰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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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와(近窩) 유식(柳栻)1755년(영조 31)~1822년(순조 22) 경보(敬甫) 진주(晉州)
近窩先生文集卷之六 / 跋 / 卞處士孝行錄跋
*卞勇 14?? ? 密陽 敏夫 華巖 孝子中郞將華巖卞公 [勇] 旌閭碑銘 幷序 旌閭碑 響山集
昔吾夫子謂子賤曰。魯無君子。斯焉取斯。紫陽氏釋之曰。子賤能尊賢取友以成其德。今比安卞處士。其亦取斯之懿乎。夫比安卽我先祖嘉村先生杖屨之鄕也。先生以純孝至行。聞于朝廷。賜號嘉里。㫌閭復戶。士林又從而俎豆之。嗚呼至矣。繼而有
中郞卞先生。縣監李先生。察訪張先生。俱以孝行。
與吾先祖幷腏享焉。
盖比安是十室之邑。而吾先祖倡之於前。諸公踵之於後。名於世者若是夥焉。則倘所謂魯多君子者非耶。嗚呼。自是而後。世級日降。風敎益衰。民之興行者。寥寥無聞。而乃若卞處士。以中郞公後裔。聞諸先生之風。而尊慕尙友。以成其德者也。處士五歲而遭父喪。哀毁如成人。事母夫人盡誠。親極甘旨之供。病革而嘗糞。遭艱而廬墓。生死葬祭。自能如禮。若其溫泉之自湧於階前。堂燕之隨巢於墓幕。苟非其孝之出於誠心。烏能如是哉。孝子臨沒也。取平日日記而焚之曰。無使後人疑余於孝。噫。世之人。苟有一藝一能則便要人知。而孝子至行純默。生而不以孝自居。沒而不以孝求聞。正南軒所謂無所爲而爲者耶。嗚呼。孝者百行之源。而處士能之。其餘所存。雖未詳知。而大抵爲君子人也。其資質固有過人者。而先輩遺風之遠及。亦可想見矣。其子之恭氏。要余一言。余固文拙。而重有感焉。遂書此以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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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와(近窩) 유식(柳栻)1755년(영조 31)~1822년(순조 22) 경보(敬甫) 진주(晉州)
근와집(近窩集) 유식(柳栻) 이미실(李美實) 2012
일상적인 안부를 나눈 것 외에 성리학의 논제와 禮制 등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받은 것이 대부분으로 저자의 사상적 연원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권2는 스승 정종로에게 보낸 13편이다. 선조 柳砲, 柳達尊, 柳宗仁의 행록... ... 柳宜三이 그의 부친 晩隱 柳沂龍의 언행을 기록한 「感慕錄」과 경상도 比安에서 효행으로 정려된 선조 嘉村 柳砲에 이어
白川書院에 향사된 處士 卞勇의 「孝行錄」에 붙인 것과 자신이 편성한 「四子類說」과 「補釋通考」에 대한 小識가 있다.
*卞勇 14?? ? 密陽 敏夫 華巖 孝子中郞將華巖卞公 [勇] 旌閭碑銘 幷序 旌閭碑 響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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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 卞勇의 「孝行錄」에 붙인 것과 ->處士 卞某의 「孝行錄」에 붙인 것과
*而乃若卞處士。以中郞公後裔。
卞處士는 卞勇 14?? ? 密陽 敏夫 華巖의 후손이다. 변용이 아니다.
향산집 별집 제4권 / 비(碑) / 효자 중랑장 화암 변공 정려비명 병서〔孝子中郞將華巖卞公㫌閭碑銘 幷序〕
영남의 비안현(比安縣) 천서리(川西里) 한길 가에 효자 중랑장(中郞將) 변용(卞勇)의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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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여재(臨汝齋) 유규(柳水+奎)1730년(영조 6)~1808년(순조 8) 수부(秀夫), 사극(士極) 풍산(豐山)
臨汝齋先生文集卷之四 / 序 / 順天張氏族譜序
族必有譜。譜所以收其族也。周禮小史氏。掌邦國之志。以奠系世辨昭穆。而後世之譜法肇焉。蓋以先王之立世敎也。不如是則無以管攝天下人心。以收宗族而厚風俗也。高麗之三太師。俎豆於花府之精祠。圃陰張先生卽其一也。權金兩家。累世烜赫。收族之編。汗牛充棟。而獨圃陰之後寥寥焉何哉。我先祖文忠公永慕錄。略著張氏世德代系。又撰察訪公墓誌。只敍外先源流直派而已。至於合譜則固有待於各派子孫之用意焉耳。今年鳴蜩月。遠孫泰殷。與其族人巘。奉草譜若干帙。來示不佞曰。譜役先世之所未遑。而不肖等蓋懼愈久而愈怠也。謹以活鑄圖壽其傳。子固文忠公之後孫。盍有一言以弁其首。余蹶然而喜曰禮不忘其本。樂樂其所自出。張氏之斯役。其庶幾於禮樂乎。因敬受而奉翫。則圃陰先生實爲鼻祖。文章道學。遠自中朝。颺名海外。菀然爲一世儒宗。不但翊社開國之勳。爲可腏食於百代也。四世有松溪公。克紹先德。生五子幷封君。六世平章事。又生五子亦封君。兩世十封君。何其偉哉。八世至巖谷。官侍中尙書謚定懿。九世十世連爲尙書。十一世金紫光祿大夫封順天君。自是以後。世世隆赫。以及於達山先生。精忠卓節。直與籠冶二贒。幷美齊休。山南章甫奉享于
屛山之白川書院。達山之後。世有官爵。至二十三世。以孝行被薦。躋享于白川。卽我文忠公所撰狀察訪公也。祖孫同廟。吁亦盛矣。有祖如此。宜思無忝之道。順天諸君子。盍相與勉之哉。不佞竊謂宦業之通達者。係乎天數。德行之綿遠者。屬乎自己。諸君但當盡力於屬己者。裘葛於忠孝。茶飯於詩禮。使本源充積而英華發達。則圃陰舊家。安知無再昌之期。而與權金兩族。幷垂耀於亡極耶。旣以是勉兩君。因書所感於中者。以竊附我先人誌錄之遺意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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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여재선생문집 (臨汝齋先生文集) / 順天張氏族譜序
해제 이미지
族必有譜、譜所以收其族也。周禮小史氏掌邦國之 志以奠系世辨昭穆。而後世之譜法肇焉。蓋以
고려 삼태사 중의 한 분이 圃陰 張先生이다. 權金 두 집안의 족보는 한우충동한데 포음의 후손은 쓸쓸하다. 금년 5월에 泰殷氏가 찾아와서 “譜役을 선대에 못했는데 시일이 더 가면 더 게을러질 것이므로 活鑄하여 후손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문충공의 후손이 서문을 써 주십시오”라고 했다. 장씨 집안의 이번 일은 禮樂에 가까우므로 나는 공경히 받아 보았다. 포음 선생은 비조로 문장과 도덕이 해외에 이름난 유학의 종장이며, 4세 松溪公은 다섯 자제를 두었는데 다 封君하였고, 6세 平章事가 다섯 자제를 두었는데 또 封君하여 兩世十封하였다. 11세는 금자광록대부로 순천군에 봉해졌고, 達山 선생은 충절이 빼어났으며, 休山과 南章은
屛山의 백천서원에서 봉향한다. 조상들이 이와 같으니 순천의 여러 군자들은 서로 권면하라. 벼슬이 높게 오르는 것은 天數에 달렸지만 덕행을 닦는 것은 자기에게 달렸으니 제군들은 덕행에 진력하여라. 후손이 詩禮와 忠孝를 닦노라면 포음 가문도 再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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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 비안현(比安縣)
【속현】 안정현(安貞縣) 정(貞)은 정(定)이라 된 곳도 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아화옥(阿火屋)ㆍ병산(屛山)ㆍ비옥(比屋)ㆍ병옥(幷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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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년(헌종 8)~1910년(순종 4) 관필(觀必) 직재(直齋), 모암(某巖) 진성(眞城)
響山文集別集卷之四 / 碑 / 孝子中郞將華巖卞公㫌閭碑銘 幷序
嶺之比安縣川西里逵路傍。有孝子中郞將卞勇之碑。其文曰泣血斷指。負土成墳。三年廬墓。一不到門。碑久而泐。其後孫海龍謀改竪。使弘默,龍在來請銘於晩燾。按孝子字敏夫號華巖。草溪人。議政府贊成事諱玉蘭玄孫。左承旨諱仲良,成均司藝諱九祥,進士諱球其三世也。文章道藝。葢其家傳。而孝弟卽天性也。九歲進士歿。泣血哀毁如成人。喪闋人諭以禮限。然後始強采。自是篤志講習。無意從仕。惟以養偏親爲事。躳勤漁稼供甘旨。每進食必備二區。請其所與。褻衣手澣。便旋之器。不使人治之。侍疾屢年。晝宵擁抱。臨革至嘗糞斷指。及喪哭踊無時。葬自執負土之役。廬墓三年。躳供烹爓。繪母幀朝夕拜哭一如事存之儀。其遇國恤。素餐三年。刺史聞國。國聞天朝。㫌門閭。官中郞將。復其戶。卽成化間事也。輿地覽載之。白川祠享之。李公萬敷,蔡公獻徵及吾宗鏡潭公守貞皆舖皇之。有足不朽。顧余蔑裂。何敢復述。竊念其嘗糞斷指。其負土廬墓。有一於此。人各稱孝。垂之𨓏牒。况兼是四者於一人之身乎。然廬墓先儒許於支子。斷指則曰不可以爲訓。而若出於人子迫切之情。固自無害。葢孝子之心。爲吾所當爲而已。何暇以先儒之言而勉強取舍者耶。若泛論吾東之人。其二連,孫順之倫也歟。銘曰。
帝準東海孝子。昔幸爲東海之人。晉土餘一石皇澤。今因孝子而長存。凡百君子來勸來乂。夫孰非惟皇上帝降衷之民也耶。
향산집 별집 제4권 / 비(碑) / 효자 중랑장 화암 변공 정려비명 병서〔孝子中郞將華巖卞公㫌閭碑銘 幷序〕
영남의 비안현(比安縣) 천서리(川西里) 한길 가에 효자 중랑장(中郞將) 변용(卞勇)의 비석이 있다. 그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피눈물을 흘리며 손가락 잘랐고 / 泣血斷指
흙을 져다 날라 봉분을 만들었네 / 負土成墳
삼 년 동안 여묘에서 지내며 / 三年廬墓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네 / 一不到門
비석이 오랜 세월에 마멸되자 그 후손 변해룡(卞海龍)이 다시 세우려고 도모하여 변홍묵(卞弘默)과 변용재(卞龍在)를 보내어 만도에게 명(銘)을 부탁하였다.
살펴보건대 효자의 자는 민부(敏夫)이고, 호는 화암(華巖)이고,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변옥란(卞玉蘭)의 현손이요, 좌승지(左承旨) 변중량(卞仲良),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변구상(卞九祥), 진사(進士) 변구(卞球)가 삼대이니, 문장(文章)과 도예(道藝)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것이요 효제(孝弟)는 곧 그의 천성이다.
나이 아홉에 부친 진사 공이 세상을 떠나자 마치 어른처럼 곡을 하고 거상(居喪)하였다. 상이 끝나고도 사람들이 “법도를 넘어서 과하게 슬퍼해서는 안 된다.”라고 타이른 뒤에야 비로소 억지로 상복을 벗었다. 이때부터 독실하게 학문을 익혔지만 벼슬에 나갈 마음은 품지 않고 오로지 홀어머니 봉양에만 전념하였다. 몸소 부지런히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어 맛난 음식을 올렸으며, 매번 식사를 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술과 고기반찬을 마련하였고 남은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여쭈어 보았다. 평상복은 손수 빨았고, 요강과 타구(唾具) 등은 직접 닦았다.
몇 년 동안 간병하며 밤낮으로 보살폈으며, 병이 위중하자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살피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기까지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시로 곡을 하고 발을 굴렀으며, 장례를 할 때에는 직접 흙을 져 날랐다. 삼 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며 몸소 제수를 만들어 올렸다. 어머니의 영정을 그려 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곡하였는데, 그 범절이 살아 계신 분을 모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상(國喪)을 당하였을 때는 삼 년 동안 소찬(素餐)을 먹어, 이 사실을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고, 조정에서는 중국에 알렸다. 마을에 정문이 내리고 중랑장 관직이 제수되었으며 집안은 요역이 면제되었다. 성화(成化) 연간에 있었던 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렸으며 백천사(白川祠)에서 향사하였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우헌(愚軒) 채헌징(蔡獻徵) 및 우리 종실 경담(鏡潭) 이수정(李守貞)이 모두 서술하여 빛내 주었으니 영원히 전해지기에 충분하다. 못난 내가 어찌 감히 다시 서술하겠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대변을 맛본 일과 손가락을 자른 일, 흙을 져 나른 일과 여묘살이를 한 일 등은 이 가운데 하나만 행하여도 사람들이 효자로 일컫고 역사에 남기는데, 한 사람이 이 네 가지를 모두 행한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여묘살이는 선유(先儒)가 지자(支子)에게 허락하였지만,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교훈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만약 절박한 자식의 마음에서 나왔다면 실로 무방하다. 효자의 마음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을 행한 것일 뿐이니, 선유의 말을 가지고 억지로 취사선택할 겨를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동방 사람들에게 범론(泛論)하여 적용한다면 이련(二連)과 손순(孫順)의 무리가 될 것이다. - 손순(孫順)은 신라 사람이다. 효성스럽지만 가난하여, 아들을 땅에 묻으려다 종을 얻었다. 왕이 종소리를 듣고 그에게 생업을 꾸려 갈 재산을 후하게 내렸다. - 명은 다음과 같다.
황제가 동방의 효자로 인정하였으니 / 帝準東海孝子
옛날에 다행히 동해의 사람 되었네 / 昔幸爲東海之人
천하에 황제의 은택을 입은 비석이 / 普土餘一石皇澤
지금 효자로 인해 영원히 보존되리 / 今因孝子而長存
군자들이여 와서 감동받고 배울지어다 / 凡百君子來勸來乂
누군들 하늘이 본성을 부여한 백성이 아니랴 / 夫孰非惟皇上帝降衷之民也耶
[주-D001] 변옥란(卞玉蘭) : 1322~1395.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예빈시 승(禮賓寺丞)과 진주 목사를 거쳐 이조 판서를 지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여 개국 원종공신이 되었다.[주-D002] 변중량(卞仲良) : ?~1398. 변옥란의 둘째 아들이고, 변계량의 형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데 기여를 하였으나,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참살당하였다. 저서에 《춘당유고(春堂遺稿)》가 있다.[주-D003] 변구상(卞九祥) : 변중량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예와 교수를 지내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주-D004] 매번 …… 보았다 : 술과 고기는 원문의 ‘이구(二區)’를 증자의 고사에 따라 의역한 것이다. “증자가 부친 증석을 봉양할 적에 밥상에 반드시 술과 고기반찬을 마련하였으며, 밥상을 물릴 때면 증자는 반드시 ‘누구에게 주시겠습니까?’ 하고 청하였다.[曾子養曾晳 必有酒肉 將徹必請所與]”라고 한 고사를 인용한 표현이다. 《孟子 離婁上》[주-D005] 이만부(李萬敷) : 1664~1732. 본관은 연안,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이다.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밀암(密庵) 이재(李栽) 등과 교유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주로 서울의 서호에 머물며 강학하였으나, 34세에 상주 노곡(魯谷) 식산에 자리 잡고 평생 학문에 정진하였다.[주-D006] 채헌징(蔡獻徵) : 1648~1726.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문수(文叟), 호는 우헌(愚軒) 또는 여물헌(與物軒)이다. 예천 용궁(龍宮)에서 살았다. 홍여하(洪汝河)와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다.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시강원 필선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진주 목사, 인동 현감, 영해 부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 《우헌문집(愚軒文集)》 3책이 있다.[주-D007] 이수정(李守貞) : 1709~1795.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자는 계고(季固), 호는 경담(鏡潭)이다. 퇴계의 6대손인 이집(李集)의 아들이다. 1762년(영조38) 학행으로 천거받아 목릉 참봉이 되었고, 영춘 현감(永春縣監) 재직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주-D008] 지자(支子) : 장남이 아닌 지차(之次) 자식을 가리킨다. 주희(朱熹)는 “상주가 장례를 치르고 나면 신주가 이미 집으로 돌아와 집이 거상(居喪)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상주는 더 이상 산소 옆의 여묘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끝내 잊히지 않으면 아우들에게 묘소 옆에서 머물며 때로 한 번씩 성묘하게 할 수 있다.[主喪者旣葬當居家 蓋神已歸家 則家爲重 若念不能忘 却令弟輩宿墓 時一展省可也]”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다. 《朱子大全 卷63 答胡伯量》[주-D009] 이련(二連) : 소련(小連)과 대련(大連)을 말한다.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소련과 대련이 거상을 잘하여 3일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3개월을 해이하게 하지 않고, 1년을 슬퍼하고, 3년을 걱정하였는데, 이들은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하였다.[주-D010] 황제가 …… 되었네 : 초계 변씨의 시조가 중국 당나라 사람 변원(卞源)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규필 (역)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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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2집(효자도 권5,6,7,8)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제5권 주해 효자도 제5권 목록 변용부토(卞勇負土)변용부토(卞勇負土)
卞勇負土
中郞將卞勇比安縣人 親喪負土成墳啜粥居廬三年一不歸家 恭憲大王朝㫌門
Ⓒ 필자 | 이성 / 1617년(광해군 9)
듕낭쟝 변용은 비안현 사이라 어버의 상애 져셔 무덤을 일우고 쥭을 마시고 시묘기 삼년을 고 적도 지븨 도라가디 아니니라 공헌대왕됴애 졍문시니라
Ⓒ 필자 | 이성 / 1617년(광해군 9)
변용부토 - 변용이 흙을 지다
중랑장 변용은 비안현 사람이다. 어버이의 상을 당하매 흙을 져서 무덤을 만들고 죽을 마시며 시묘 삼년을 하였다.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더라. 공헌대왕 명종 때 정문을 내렸다.
Ⓒ 역자 | 정호완 / 2015년 5월 15일
중랑장(中郞將) : 고려 시대의 무관직. 중앙군에 있어서 장군(將軍) 다음가는 계급으로 정5품관이다. 문종 30년(1076)에 개정된 전시과에 의하면 제6과에 속하여 전(田) 70결, 시(柴) 27결을 지급받았다. 중랑장의 총수는 2군 6위를 90인을 포함하여 도부외(都府外)에 1인, 충용위(忠勇衛)에 12인 등 모두 1백 3인이 편제되어 있었고, 2군6위에는 장군 밑에 각기 두 사람의 중랑장이 있는데, 이들은 장군의 보좌관으로 여겨진다.〈한국고전용어사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져셔 무덤을 일우고 : 흙을 져서 무덤을 만들고. ‘’은 단독형 ‘’에 목적격 조사 ‘-’이 통합됨에 연철이 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적으로 ‘’은 ‘’에서 비롯한다. 기원적인 ‘’의 의미는 ‘해’ 곧 태양으로 상정할 수 있다. 뒤로 오면서 추상화되어 ‘사이[間]’를 중심 의미로 하여 많은 단어족을 형성하였다(정호완, 우리말의 상상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