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坡 李昰應의 蘭
석파(石破) 이하응(李昰應-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구한말의 격동기에 파란 많은 생애를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적 이력 못지않게 묵란화(墨蘭畵)의 일인자로도 널리 소개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삶의 격정들을 토로해내듯 묵란화에 몰두하여 석파란(石破蘭)이라는 독창적인 난 그림을 형성하였다.
이하응의 묵란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서예적 필묵법에 기초하고 있으나,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고도의 필력과 문기(文氣)가 함축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난잎을 그릴 때 세 번의 굴곡을 주는 삼전법(三轉法)과 활달하고 예리하게 끝나는 서미(鼠尾)의 선묘가 특징적이다.
묵란과 함께 어우러진 괴석도 눈여겨 볼 만한데, 그의 묵란에 괴석이 등장하는 것은 60세 이후의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만년(晩年)의 작품으로 갈수록 괴석의 비중이 커지고 형태도 다양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하응의 묵란화는 구도와 필묵법 등에서 독특한 화풍을 창출하여 중국의 난 그림과는 현저하게 구별되는 조선적인 묵란화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대원군 이하응 (1820~1898년) 의 난초그림(墨蘭)은 가짜가 많기로 유명하다. 대원군의 그림 절반 이상이 가짜라는 것이 정설, 대원군의 난초는 그의 생전부터 가짜가 많았다. 당시 그의 난초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 대원군은 그의 사랑방에 사람들을 앉혀놓고 대신 그리게한 다음 자신은 거기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가짜가 많은 것은 대원군의 난초가 뛰어 남을 뜻한다. 추사 김정희의 극찬이 이를 입증한다.
난초 그림은 19세기에 성행했고 그 중에도 대원군과 민영익(1860_1914)이 쌍벽을 이뤘다. 이들의 난초는 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지만 그들의 화풍은 사뭇 대조적이다. 대원군의 난초는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다면 민영익의 난초는 부드럽고 원만하다.
이 대조적인 화풍은 그들의 판이한 인생을 담고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대원군은 여백을 살리고 한 쪽에 한 떨기 春蘭을 즐겨 그렸다. 난은 섬세하고 동적이며 칼날처럼 예리하다. 특히 줄기는 가늘고 날카롭다. 뿌리는 굵고 힘차게 시작하지만 갑자기 가늘어지고 끝부분에 이르면 길고 예리하게 쭉 뻗어 나간다. 반면 민영익의 난초는 여백이 없다. 줄기는 가늘고 고르며 일정하고 끝부분이 뭉툭하다.
민영익의 묵란
대원군의 石蘭圖
대원군의 난초는 힘차고 화풍은 그의 파란 만장한 인생 역정과 비슷하다. 처절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야망과 숱한 좌절이 날카로움으로 표출된것이 아닐까? 해동거사(海東居士)란 낙관이 있는 난초는 실각한 후에 운현궁에 눌러 앉았던 1881년 줄기 하나에 울분이 꿈틀거린다.
한편 민영익은 다르다. 그의 왕실 외척으로 태어나 20대 초반에 미국 유럽을 돌며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요직을 두루 거치지만 야심보다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던 인물이다. 중국에 유폐된 대원군의 귀국을 반대했던 점에서 드러난다. 그는 1894년 중국으로 망명 그곳의 문인 화가들과 함께 사군자를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국립박물관 이원복 학예 연구관은 "그의 중국생활은 국제조류에 뒤지지 않는 독특한 경지의 난초를 탄생시켰다." 고 평한다.
이하응 병란도(병란도) ; 간송미술관 소장
검은 가죽의 작은 안석과 푸른 깁 창문 / 화분 속 몇 줄기 난초에 감탄한다.
강남의 비 구름은 만천 리 이지만 / 청산은 나의 외갓집이리. - 跋文 -
興宣大院君 李昰應 筆 '石蘭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2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1820~1898)이 만71세(1891) 때에
유모(劉某)의 부탁을 받고 그린 12폭 '석란도(石蘭圖)'이다.
그림들은 두 폭씩 대칭구도를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는데, 각 폭에는 다양한 괴석과 난초가 어울려 있다. 난초잎은 뿌리 에서 촘촘히 자라나 위로 한껏 기세를 뿜으며 부드럽게 퍼지게 표현되었는데, 그의 후기 난초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바위의 경우 당시의 서화가인 정학교(丁學敎: 1832~1914)가 그린 괴석의 영향을 반영하여 각진 형태의 바위가 첩첩히 쌓인 모습, 기타 부드러운 바위 등을 폭에 따라 배치하였다.
1~2
흥선대원군의 서체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영향을 받아 발달했으나 만년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선보이게 된다. 행서(行書)로 쓰여진 이 병풍의 그림 제목은 병풍 좌우측에 산문 형식으로 쓰여져 있는데 자신이 이 병풍을 유모 (劉某)라는 사람에게 그려주게 된 연유, 병풍 형식의 변천과정, 이 그림이 진정한 감상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생각 등을 적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폭에는 그림을 그린 시기와 흥선대원국 자신이 회혼(回婚)을 맞은 사실을 써 놓았다.
3~4
이 병풍은 드물게 보는 12폭 병풍으로 각 폭의 아랫부분이 약간씩 상했으나 그림 부분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돋보이는 화면 구성, 활달하고 분망한 필치, 유려한 용묵법 등 흥선대원군의 노년기 원숙한 묵란 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5~6
7~8
9~10
11~12
괴석 묵란도
묵란도
8-1 8-2
8-3 8-4
8-5 8-6
8-7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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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갓집 개라 불리웠던 흥선대원군은 난을 쳐서 술값을 대신하며 일부러 미친척하고
난세를 피했던 분으로 유명하지요? 이민혜 선생님! 좋은 그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좍쟁이라는 죄명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다가 결국은 대세받고 돌아가신 분으로,
한국 천주교 박해사에는 그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여혜당 선생님, 난을 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저의 난 습작품에 지도 선생님께서 제목을 화득만(畵得慢)이라고 지어주고 떠나셨는데
그에 대해 좀 자세히 알고 싶어서요. 혹시 자료를 찾을 수 있나 해서요.
에그~어쩌지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인터넷 검색창을 열어보는데, '畵得慢'에 대한 자료는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