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나가려고 살구나무 지팡이를 챙긴다. 호신용 무기처럼 그냥 들고 나서야 마음이 든든해서다. 어렸을 때 시골 외가 집에는 오래된 살구나무가 있었다. 살구가 익을 때면 어머니를 졸라 외가 집으로 달려갔다. 헛간에 있는 장대를 들고 나와 또래의 외종형들과 살구를 따먹느라 심한 경쟁을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집에 살구나무가 없는 게 아쉬워 살구나무가 있는 큰 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어머니를 졸랐었다.
전원목회를 하려고 북 수원의 외딴 곳을 찾았을 때다. 마을 동구 밖에는 광교산에서 시작한 서호천이 흐르고,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샘물을 마시고 쓰기 때문에 샘내마을이라 부르는 천천동(泉川洞)이었다. 50여 호 정도가 낮은 산 밑으로 고구마처럼 길게 펼쳐있는 중간지점에 농가주택을 구입하여 <수원샘내교회>로 농촌목회를 시작했다. 교회에서 한참 떨어진 산자락에는 높은 담으로 가려진 별장 같은 큰 집이 있었다. 왕년에 은행을 경영했던 할아버지는 가고 소아과 의사로 은퇴한 할머니와 신문사에 다니는 아들네 가족이 사는데 농사를 짓는 동네 사람들은 물론 외부와 교통이 없었다.
아내가 전도를 하여 그 댁의 젊은 부인과 아이들 셋이 교회에 나왔다. 나는 그 집을 심방하면서 넓은 집 구조와 잘 가꾸어진 정원을 둘러보았는데, 얼마 후 서울에 있는 우리가족이 비어있는 그 집 일층으로 세 들어 살게 되었다. 오래 전 외가 집 살구나무보다 모양새가 튼튼한 개량종 살구나무가 있었다. 살구나무는 한 아름 기둥처럼 큰 몸체에서 기름진 가지가 사방으로 쭉쭉 뻗어 정자나무 같았다. 봄이 되자 연보라 꽃향기가 그윽했고 여름엔 그늘이 좋아 시원한 쉼터였다. 거기다 붉고 누렇게 잘 익은 살구는 새콤달콤한 맛이 유별해 외가 집 살구보다 더 나은 것 같았다.
몇 해가 지나고, 서울 J신문사에 다니는 젊은 주인이 미국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상당기간은 떠나있어야 하는데 규모가 큰 집이 문제가 됐다. 세를 놓자니 그 수준에 맞게 들어올 사람이 없고 팔려고 해도 작자가 선득 나서지 않았다. 교회에 나오는 여주인 L집사는“목사님께서 우리 집이 빨리 팔리게 힘써주세요.”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목사가 도와 줄 일은 기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기도하며 고민 끝에 내가 매입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서울 집을 급히 처분한 후 은행대출을 받아 문제를 해결했다.
살구나무가 있는 큰 집을 갖게 되어 가슴이 벅찼다. 대문에서 들어오는 길목 양편에는 6그루의 포도넝쿨이 아취형 터널을 이루고, 잔디가 깔린 마당가에는 앵두 사과 호두 밤 대추와 모과나무들이 보기 좋게 심겨져 있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제 각기 다른 열매들이 열리고, 살구나무는 마당이 아닌 곳에 각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까운 원예시험장에서 전 집주인이 품질 좋은 유실수를 구해 심는 게, 내 꿈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살구나무는 1층 사택에서 2층 예배당으로 오르는 전면 계단 앞에 있었다. 다른 나무들 보다 가깝게 있어 사랑받는 보호수가 되었다. 연못가로 부터 담장 옆으로 늘어선 늘 푸른 향나무들은 유실수를 지키는 경비병들처럼 이고 사이사이에 있는 몽우리가 큰 검붉은 장미들로 정원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외등에 벤치와 바비큐 시설이 돼 있는 잔디밭 한쪽으로 지하수 연못이 있어 잉어와 향어들이 헤엄을 치는 모습이 수채화 같은 정경이었다.
전원의 아름다움에 묻혀 회고에 잠겨보았다. 베트남에서 귀국하여 부산에서 살 때가 생각났다. 세 아이들이 태어나 세례 받고 가족들이 나가는 교회를 위해 무언가 드리고 싶었다. 마침 오래된 교회를 다시 재건축하는 데 토지매입 건축헌금으로 14년 복무한 퇴직금 86만원에 14만원을 꾸어다가 100만원을 드렸는데 베트남에서 살아온 것을 생각할 때 많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 년 후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는 살던 집을 팔아 3분의2인 120만원을 헌금했다. 이것도 부족하다 싶어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나와 공사감독으로 봉사하고 예배당이 봉헌된 다음 서울로 이사를 했다.
주어진 여건들이 전원생활에 대한 꿈을 마음껏 펼치기에 좋았다. 돌이켜 보니 이토록 분에 넘치게 좋은 예배당과 사택을 갖게 된 것이 우연히 아니구나 싶었다. 부산 대연교회에서의 일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 것으로 믿어져 벅찬 가슴으로“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시편23편”을 들어 하나님을 찬양을 했다. 담장 밖 밭에는 채소와 콩 고구마 감자를 심고 외딴 집이라 경계용으로 진돗개와 다른 개 외 거위도 두 쌍을 길렀다. 집에 딸린 뒤 산 자락 천 여 평을 개간하여 호박을 심고 골프연습장처럼 높게 망을 둘러치고 칠면조와 오리 닭 오골계를 놔길렀다.
살구나무 아래는 야외 응접실 겸 식탁을 마련했다. 잠시 앉아 쉬노라면 고양이가 살짝 닥아 와 낯짝을 비벼댄다. 어느새 대문가에 있던 누렁이와 점둥이가 알고 짖어대면서 달려온다. 고양이는 속이 상한 듯“너희들 참 치사 해 날 잡아봐라 야옹”하면서 몸을 휙 날려 살구나무위로 올라가 버린다.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이면 뒷동산 잡새들과 까치들이 날아와 살구나무가지에서 짹짹 재잘거린다. 집 뒤에 있는 닭과 오리 칠면들이 꼬꼬댁 꿱꿱 꾹꾹거리며“너희들 우리 집에 왜 왔어”라며 텃세를 부렸다. 살구나무 한쪽에는 아내가 타는 작은 오토바이와 내가 타는 자전거를 보관했다. 7.8월 비가내리고 나면 집을 지으면서 베어버린 참나무 그루터기에서 자연산 표고버섯이 마구 돋아나 좋은 찬거리가 됐다. 담 너머에서는 자연산 머위와 케일이 무성하게 지천으로 자라 아무에게나 제공했다.
늦가을에는 뒷산에서 인분과 개똥을 먹고 묵직하게 자란 황금빛 호박을 살구나무아래 모았다. 농촌출신 집사들은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주어 도토리묵을 만들고 상수리나무로 참숯을 구워냈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때는 참숯으로 칠면조 바비큐를 하고 연못의 향어로 회와 매운탕을 만들어 먹는 통에 지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호박을 썰어 고지로 말리고 한 겨울에는 호박떡을 만들어 먹었다. 믹서에 으깬 호박으로 찹쌀가루를 덩어리지게 풀고 완두콩을 넣어 끓인 호박죽은 아내의 일품 별식이었다. 그래서 교인들과 방문객들에게 호박떡과 호박죽은 인기였다. 가끔은 향어와 칠면조 요리까지 맛보고, 돌아갈 때에는 잘 익은 호박을 한두 덩어리씩 안겨주었던 풍성한 시절이 추억으로 묶이게 됐다.
어느 날 수원시로 부터 택지개발을 한다는 통보가 왔다. 전원의 꿈이 깨질 것 같아 억장이 무너져 내렸지만 목사의 입장에서 국가의 일이라 순수하게 받아드려야 했다. 이듬해 살구나무에는 열매가 예년보다 더 많이 열렸다. 가을이 끝나는 대로 집을 비워야하는데 강아지처럼 따르던 고양이가 떠나버리고 200년 묵은 거북이도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다 누렁이마저 밖에 나갔다 오더니 며칠 전 낳은 새끼를 끌어안고 킁킁거리다가 죽어버렸다. 살구나무는 잎이 일찍 지는 가 싶더니 시들어가고 오직 예배당 쪽으로 뻗은 가지 하나만 잎이 싱싱한 채로였다. 이상하고 신비한 일이다 싶어 그 가지을 베어 만든 지팡이가 20년이 됐는데, 구약시대 이스라엘 제사장 아론의 살구나무지팡이를 생각하며 정년을 맞은 목회생활의 기념품이 되었다.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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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