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남성이 숱한 여성들을 아무렇게나, 얼굴을 전기톱으로 잘라내고 부정교합 앞니로 물고 성폭행한 뒤 죽일 정도로 잔인했던 연쇄 살인범이라니.
미국을 대표하는 연쇄 살인마 가운데 한 명이며 뭇 여성들을 성적으로 흥분시켰던 테드 번디(1946~1989)와 사랑에 빠졌던 여성 얘기를 다룬 영화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Extremely Wicked, Shockingly Evil and Vile)는 조 벌린저 감독이 연출해 2019년 선댄스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다. 넷플릭스가 배급해 그 해 공개했다.
마이클 워위가 엘리자베스 클로퍼의 원작 'The Phantom Prince: My Life with Ted Bundy'를 극본으로 매만졌다.
출연진이 나름 쟁쟁하다. 시어도어 테드 번디 역에 잭 에프론, 리즈 역에 '에밀리 파리에 가다' 시리즈의 주인공 릴리 콜린스, 캐롤 앤 분 역에 카야 스코델라리오, 순경 헤이우드 역에 록 그룹 메탈리카의 프론트 맨 제임스 헷필드, 검사 래리 심슨 역에 '빅뱅이론'의 짐 파슨스, 플로리다의 햇볕 얘기를 시니컬한 농담으로 버무리면서 준엄한 판결을 내리는 데이드 카운티 법원의 에드워드 코워트 판사 역에 존 말코비치 등이다.
테드 번디의 살인 행각은 그리 자세하게 그려지거나 설명되지 않는다. 오로지 리즈의 관점에서 어떻게 번디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됐고, 그가 재판을 받는 과정, 사형 당하기까지 10년 동안 둘 사이에 있었던 일에 철저히 집중하는 편이다. 중간에 리즈와 경쟁하듯 번디의 사랑을 얻으려고 끼어드는 캐럴 앤 분이 있지만 대체로 둘이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랑을 나눴는지, 그 사랑은 얼마나 철저하게 배신당했는지, 법대생이며 똑똑했던 번디가 재판 과정을 이용해 사법체계를 농락하려 했는지 등에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번디가 왜 연쇄 살인을 즐겨야 했는지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런 점을 기대하고 본 이들이 있다면 주소를 잘못 찾은 셈이 된다. 이런 이라면 조 벌린저가 직접 만든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디 테이프'를 보면 되겠다.
영화는 괴테의 명제로 시작한다. '소수의 사람만이 현실을 상상할 수 있다.' 정확한 취지를 알 듯 모를 듯하다.
리즈는 술집에서 번디를 만나 사귀게 된다. 리즈는 신문에서 봤던 살인사건 범인의 몽타주가 테드와 비슷하다고 느끼고 경찰서에 신고해 테드를 체포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사실을 숨긴다. 체포된 후 테드는 두 건의 살인, 세 건의 살인 미수 혐의를 모두 부인한다. 번디의 재판을 지켜본 리즈는 자신이 신고해서 테드가 체포되었다는 죄책감에 힘겨워한다. 번디는 법정에 나타나지 않아도 리즈가 자신을 지켜본다고 생각해 눈을 깜박거리고, 전화를 걸어 면회를 와달라고 한다. 번디는 그렇게 큰 누명을 쓴 사람이라면 펄쩍 뛸 일을 그러지 않고 법 지식을 앞세워 잘난 척하며 법정 공방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배심원단은 다섯 건의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를 인정, 사형을 선고한다.
10년 후 번디가 사형당하기 얼마 전, 리즈는 번디를 찾아가 흉포하게 살해된 여성 시신 사진을 보여주며 자백하라고 압박한다. 번디는 면회실 유리창에 '쇠톱'이라고 적어 자신의 소행이었음을 자백한다. 리즈는 충격을 받고 감옥을 떠나지만 그의 곁에는 새 남자친구와 성숙한 딸 몰리가 있어 위안이 된다.
번디는 1989년 1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바로 전날 자신이 30명의 여성들을 살해했다고 자백한 사실이 자막으로 소개된다. 그의 유골은 자신이 살해한 시체들을 매장했던 캐스케이드 산맥에 뿌려졌다고 한다.
사실 영화는 스릴러란 장르 구분이 무색하게 그것보다 법정 드라마에 비중이 가 있다. 말코비치와 파슨스, 에프론이 만든 삼각 긴장감이 볼 거리다. 마지막 면회 장면에서 에프론과 콜린스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도 볼 만하다.
마르코 벨라르미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도 눈여겨 볼 만하다.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의 2악장과 모차르트 '마적'의 '밤의 여왕' 아리아를 벨트라미가 편곡한 '더 트루스(밤의 여왕)'가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ELP의 '럭키 맨', 메탈리카의 '포 호스맨' 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