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장모 최은순씨가 부동산을 차명으로 사들이는 과정에서 통장 잔고증명서를 위조한 혐의(사문서위조 등)로 지난 21일 항소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월요일(24일)까지도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법정 구속 직후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사법부 판결에는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게 원칙", "법원 판결에 무슨 입장이 있겠느냐? 앞으로 법적으로 잘 다퉈서 대법원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지난해에 윤석열 정권은 외교부를 앞세워 강제징용에 관한 사법 절차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최은순 사건과 관련해서만 삼권분립을 운운하는 태도는 정권의 일관성 결여만 드러낼 뿐이다.
10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인들은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왕실 외척이나 사돈의 문제를 떠올렸다. 직계 자녀나 형제의 비위보다 외가나 처가의 비위가 더 중하게 인식된 이유가 있다. 자녀나 형제는 국가지도자와 일가이지만, 외가나 처가는 당연히 다른 가문이었다. 그래서 외가나 처가가 권력을 행사하면, 왕실 이외의 또 다른 가문이 왕실 행세를 하는 듯한 인상이 조성됐다. 이것은 왕실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징표로 인식됐다.
왕실 사돈이 '비선 왕실'이 되어 권세를 행사하는 것은 '정통 왕실'이 약해졌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왕실이 곧 국가인 왕조 국가에서, 왕실이 약해지는 것은 나라가 허약해진다는 신호였다. 그래서 역대 왕실들은 외척이나 처가의 발호(跋扈)를 특히 경계했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국가지도자의 자녀나 형제보다 외가나 처가가 저지른 비위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 문제가 가장 두드러진 시기는 전두환 집권기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했지만, 이 시기는 여흥 민씨의 세도가 끝난 뒤로 근 100년 만에 '왕실 사돈'이 발호하는 때였다. 전두환의 신혼 생활과 출세에는 이순자 집안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이로 인해 전두환은 처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988년 11월 17일 자 <동아일보> 3면 좌단 특집기사는 전두환 정권의 부조리를 양산한 '검은손' 집단으로 '전씨 일가'와 더불어 '이씨 일가'를 언급했다. 그런 뒤 "이순자씨를 중심으로 아버지 이규동씨, 삼촌 이규광씨 및 그의 처제 장영자·이철희 부부, 남동생 이창석, 여동생 이신자·홍순두 부부, 여동생 이정순·김상구씨(12대 국회의원) 부부 등이 비리에 관련돼 있다"며 이순자 일가를 열거했다.
이는 전두환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이들의 발호는 상시적인 민심 이반 상태를 초래했고, 이는 중산층이나 중도 성향 국민들이 1987년 6월항쟁에 가담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됐다. 전두환 정권이 처갓집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점은 집권 3년 차인 1982년에 벌어진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으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순자의 작은아버지인 이규광의 처제가 저지른 이 사건은 '단군 이래 최대 어음사기 사건'으로 불릴 정도로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짜장면이 300원에서 350원이던 1980년대 초반에 장영자는 7111억 원어치의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했다. 이 돈의 상당 부분이 '집권당인 민정당에 들어갔다', '이순자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기 규모가 거물급의 비호 없이는 시도하기 힘든 데다가 이순자와 민정당의 연루 의혹마저 번졌지만, 전두환 정권은 장영자 개인의 비리로 몰아가며 이순자와의 관련성을 차단했다.
전두환의 최측근 실세 참모들인 허화평·허삼수는 1979년 12·12 쿠데타 주역들을 다시 모아 비밀회의를 연 뒤 '친인척 비리가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전두환에게 건의했다. 그 정도로 정권의 안위에 영향을 주는 중대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건의는 허화평·허삼수가 전두환의 신임을 잃고 정권에서 쫓겨나는 결과만 초래했다.
장영자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결과로, 전두환 정권은 민심이반을 항시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1980년만 해도 광주에서 서슴없이 학살을 자행했던 전두환 정권이 1983년경부터 태도가 누그러진 데에는 이런 요인도 작용했다. 친인척 비리를 적당히 눈감아주는 이 같은 대처법은 친인척들이 계속 발호하도록 만들었고, 이는 6월항쟁 이듬해에 전두환이 퇴임하자마자 친인척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통령 장모가 구속된 지 사흘이 지나도록 공식 논평이 없는 윤석열 정권과 달리, 전두환 정권은 비슷한 상황 앞에서 반성하는 듯한 시늉이라도 보여줬다. 장영자의 사기 행각에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장영자의 형부이자 이순자의 작은아버지인 이규광이 검찰에 연행된 당일인 1982년 5월 17일, 민정당은 긴급 당직자회의를 열어 대책을 숙의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연행된 이규광이 18일에 구속되고 19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자, 전두환 정권은 대폭적인 당정 개편을 선보였다. 20일에는 민정당의 사무총장·정책위의장·총재비서실장·대변인을 경질하고, 21일에는 법무부 장관을 포함한 11명의 장관을 경질했다.
21일 발행된 <매일경제> 기사 '새 출발 의지 다진 대결단'은 "장영자 여인 어음사기 사건을 근인(近因)으로 하는 대폭 개각과 집권 민정당의 당직 개편은 국가 최고 통치권자인 전두환 대통령이 최근의 난국을 전격적으로 해결, 민심을 수습해보려는 정치적 결단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평했다. 전두환 정권은 처갓집 식구가 구속되는 "최근의 난국" 앞에서 내각과 민정당을 일신하는 모습이라도 보였다. 미봉책에 불과해 민심을 되돌리는 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런 모습이라도 보여주고자 했다.
윤석열 정권은 그 정도도 하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미래는 훨씬 암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장모가 구속되기 이틀 전에 윤석열 대통령은 부인 김건희 여사와 함께 미국 전략핵잠수함 켄터키함을 둘러본 뒤 "직접 눈으로 보니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켄터키함은 안심을 줬을지 몰라도, 지금 윤석열함은 위험에 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