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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리넷(coo2.net)
작성자 : 윤병진
[사료소개]신라의 일본정벌기록
일본은 고대에 외침을 한번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려말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려다가 실패한 그 훨씬 이전에 일본은 신라에 의해 정벌되었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신라의 일본정벌에 관한 기록들을 발췌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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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정복 동사강목 제2상
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 고구려 봉상왕 4년, 백제 책계왕 10년(진 혜제 원강 5, 295)
봄 계림이 왜를 정벌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 왕이, 왜인이 자주 침범하고 백성을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함을 분히 여겨, 백제와 함께 동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에 들어가 칠 것을 도모하니, 서불한(舒弗邯) 홍권(弘權)이 간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험난을 무릅쓰고 원정(遠征)하면 생각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백제는 속임수가 많고 항상 병탄할 욕심을 가지고 있음에리까? 더불어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좋은 말로 여겼다.
【안】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에는,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2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8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 유례왕 8년 신해는 서력 291년임, 신해년은 응신 22년임
2.동사강목 제3상
계묘년 신라 진평왕 5년, 고구려 평원왕 25년, 백제 위덕왕 30년(진(陳) 후주(後主) 지덕(至德) 원년, 583)
2월 신라가 왜(倭)의 서변(西邊)을 토벌하였다. 왜사에서 보충
【안】 《해동기(海東記)》에는,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서변을 토벌하였다.” – 서력 583년임
고 적혔으나 신라와 백제가 왜와 접경하여 그 환(患)을 자주 입었는데 교빙과 정벌에 대하여는 사적(史籍)에 드물어서, 바다를 건너서 왜국을 정벌하였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왜사(倭史) 《연대기(年代記)》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신라의 유례왕(儒禮王) 때를 당하여,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와서 흰 말을 죽여 맹서를 받아 간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나라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하고, 또
“신라가 토벌하여 온 일이 두어 곳이[번] 있었다.”
적혔으나, 우리 역사에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지금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駐蹕)하였던 곳’이라 한다. 신라는 조그마한 한 구석진 땅이로되, 육지로는 능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적하고, 바다로는 왜국을 정벌하였으니, 그 병력의 웅대함이 삼국을 통일할 만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겠다. 후세에 해동의 온 땅덩어리가 섬나라 오랑캐[島夷]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의당 그 방어책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3.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정사년(광해 9, 1617) 10월 18일(기묘)
일본은 아득하게 하늘 동쪽에 있어 사방이 큰 바다이므로 외국 군사가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를 보니, 소위 ‘응신천황(應神天皇) 22년[서력 291년]에 신국(新國) 군사가 왔다.’ 하였고, 딴 본(本)에도,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했다. 명석포는 대판까지 겨우 1백여 리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구롱(丘壟) 하나가 있는데, 왜인들이 가리키면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이라는 것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들어왔으므로 일본 사람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백마를 잡아 맹세하고 말을 여기에다 묻은 까닭이다.’ 하였다. 이세(李稅)의 일을 추적(追跡)해 알았으나 밀교(密敎 임금의 비밀 전교(傳敎))에 관계된 것이므로 별도로 계초(啓草 계본(啓本)의 초고)를 만들고 여기에다 다시 갖추어 기재하지 않는다.
日本邈在天東。四面大海。外兵不入。但見其年代記。其所謂應神之二十二年。新國兵軍來。一本則曰。新羅兵入明石浦。石浦距大坂纔百有餘里。赤間關之東有一丘壟。倭人指之曰。此是白馬墳。新羅兵深入日本。日本人請和解兵。刑白馬以盟。埋馬於此故云。跟尋李稅之事。係是密敎。故別具啓草。不復具載於此。
4. 안정복/ 순암선생문집 제1권
시(詩)
우리 역사를 보다가 느낌이 있어 악부체를 본떠 읊다[觀東史有感 效樂府體]
백마총행(白馬塚行)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사상록(槎上錄)에 이르기를, “일본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倭皇)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대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오니 대판(大阪)과의 거리가 겨우 1백 리 정도였다.’라 하였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가 바로 백마(白馬)의 무덤인데, 신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맹약한 후 그 말을 저 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였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유례왕 8년이 맞음]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晉)의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 되는 해[서력 291년]인데, 그 사실이 동사(東史)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해동기(海東記)에 의하면, 달민천황(達敏天皇) 계묘년[서력 583년]에 신라가 서비(西鄙)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元正天皇)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서력 720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
일본 지역에 백마총이 있는데 / 白馬塚在日域
왜인들이 대를 이어 그 무덤을 손질하며 하는 말이 / 倭人世世勤封築
옛날에 신라 왕이 쳐들어 올 때 / 謂昔羅王憤侵軼
수만 명 정병이 바다에 떠 밀려오니 / 精兵數萬浮海伐
물귀신도 뒤로 주춤 해신(海神)도 길을 비켜 / 馮夷淪易海若奔
큰 바다 동쪽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네 / 大海印無涯藩
용 깃발을 휘날리고 타고를 울리면서 / 揚龍旆擊鼉鼓
선발대가 곧바로 명석포를 공격하니 / 前茅直擣明石浦
왜왕이 겁에 질려 화친을 청하고는 / 倭王失色事和親
짐승 잡아 맹세 쓰고 신명께 고하였네 / 刑牲載書告明神
그 후로는 오랜 기간 바다가 조용했고 / 從此鯨波久不涌
천고의 유적으로 저 무덤이 남았다네 / 千古勝蹟留遺塚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 / 絶影又有古壘寨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 / 後人說是太宗臺
총알만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 / 彈丸羅地在一隅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 / 猗歟兵力何壯哉
어쩌다가 후세 들어 옛날과는 정반대로 / 歸來後世事反古
우리 나라 전역이 적의 침략 늘 당하고 / 大東全地受侵侮
지금도 해상에는 허구 많은 공갈배가 / 至今海上多虛喝
제 욕심 채우려고 해마다 손 벌린다네 / 穀帛年年充其欲
생각하면 그리 된 것 까닭이 왜 없겠는가 / 靜思其故豈無因
서생이 부질없이 국경을 안정시킬 계책 짜본다네 / 書生謾有安邊策
5. 이긍익/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변어전고(邊圉典故) /서쪽 변방[西邊]
○ 보충. 일본 신응(神應) 22년[서력 291년]에 신라의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板)과의 거리가 1백 리라,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달라고 애걸하며 흰 말을 잡아서 맹서하였다. 호원(胡元)이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했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신경준(申景濬)《여암고(旅菴藁)》
6.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65권
병전 兵戰 /여몽정벌(麗蒙征伐
응신 22년(291)에 신라의 군사가 대판(大阪 오오사까)에서 1백 리 떨어진 명석포(明石浦 아까시[明石])까지 깊이 들어오니, 일본이 강화하고 적간관(赤間關) 동쪽 땅에서 백마(白馬)를 죽여 맹약(盟約)하였는데, 지금도 그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흠명(欽命 540~571) 때에 신라가 일본을 치고 임나를 멸망시켰다.
7. 金世濂(1593-1646) /海槎錄/聞見雜錄
일본은 멀리 하늘 동쪽에 있고, 사면이 큰 바다이므로, 다른 나라의 군사가 침입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이른바 응신(應神 응신천황을 일컬음) 22년(222)[291년]에 신라(新羅)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하였는데, 명석포는 대판(大坂)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편에 큰 무덤 하나가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깊이 들어오니, 일본 사람이 화호(和好)를 청하여 군사를 해산하고, 흰 말을 베어서 맹세하고, 여기에 말을 묻었다.’ 한다.
8. 일본서기
"응신 22년[291년],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응신왕이 여섯현을 떼어주었다
日本書紀』巻十応神天皇二二年(辛亥二九一)秋九月辛巳朔庚寅《十》
庚寅。亦移居於葉田〈葉田。此云簸娜。〉葦守宮。時御友別參赴之。則以其兄弟子孫。爲膳夫而奉饗焉。天皇。於是看御友別謹惶侍奉之状。而有悦情。因以割吉備國封其子等也。則分川 嶋縣封長子稻速別。是下道臣之始祖也。次以上道縣封中子仲彦。是上道臣。香屋臣之始祖也。次以三野縣封弟彦。是三野臣之始祖也。復以波區藝縣封御友別弟鴨別。是笠臣之祖也。即以苑縣封兄浦凝別。是苑臣之始祖也。即以織部縣賜兄媛。是以其子孫於今在于吉備國。是其縁也。
9. 일본 덕천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창일본傳" – 원문 미확인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元康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
10. 신경준/旅菴遺稿卷之三/ 序 /送使之日本序
昔百濟臨政太子。乘舟入日本。都周防州。號大內殿。傳四十七世而絶。其從者之裔。代襲其土。都安藝州。卽秀吉驍將輝元之祖也。余竊以臨政爲王子豐。豊甞質於日本。百濟亡。百濟宗室。迎立爲王。豐乞師於日本以拒唐。及敗不知所之。是必與倭俱東也。方蘓烈以十三萬兵。杖鉞而來合新羅。共滅百濟。而豊以覆巢餘卵。嬰孤城而號咷。其亡不日。誰肯與之同其禍乎。然而白江之敗。血戰四合。海水盡赤。倭船焚者。四百餘艘。其不焚而逃者。不知幾艘。其致兵何其多也。其得死心。又何以至此也。百濟六百五十年之間。倭寇史無一見。至其亡救不得。則以王子歸。分土存祀。此不可謂只以利結也。新羅昔于老。儐倭使言曰。早晩以汝王爲塩奴。王妃爲爨婢。此戱耳。而侮之則深也。于老以是爲倭所焚。而于老之妻。又焚殺倭使以復讎。羅人之易倭可知。日本神應之二十二年。新羅兵入明石浦。浦距大阪纔百里。日本人乞和解兵。刑白馬以盟。今赤間關之東。有白馬墳云。日本環以重溟。外兵莫加。胡元大擧。廑至日歧島而卒大敗。歷代能深入取勝者。惟新羅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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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明石浦는
현재의 일본 明石市(あかし)로, 兵庫県南部의 明石해협에 면한 곳이다.
동경 134도 59분, 북위 34도 38분.
大阪은 동경 135도 30분, 북위 34도 40분으로 양지점간 직선 거리는 48km임.
[ ]는 제가 보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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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극에 들렸다가 이런 좋은 자료가 있어 구리넷(coo2.net)에서 퍼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라가 일본을 정벌한 시기는 이때가 아니죠.
이와 관련된 남당 박창화 선생의 유고에 신라가 왜왕의 처자를 잡아오거나 왜를 직접 정벌한 기록입니다.
옛날에 '시라기'님이 신라왕의 비석이 있는 곳이 오오사카(大板)가 아니라 니이가타 인근이라고 들었는데,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 어느 사이트에 분명히 표기된 지도도 보았는데 지금은 검색으로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은 신라왕 비문의 출처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출처 : 남당 박창화 유고 및 삼국사기 신라본기
작성자 : 정성일
[사료1]신라가 왜왕의 처자를 잡아온 기록
눌지마립간(남당유고)
水馬 二十六年也
수마(水馬=壬午, A.D.442) 26년이다.
寵德等 深入野地 虜其王后王子 而還
총덕(寵德)등이 야국의 땅 깊숙이 들어가 야왕의 후(后)와 왕자(王子)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二月 野人吉思登 請和 留之不送
2월 야인(野人) 길사등(吉思登)이 화친을 청하였으나, 머무르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黑羊 二十七年也
흑양(黑羊=癸未, A.D.443) 27년이다.
四月 放吉思等 歸國
4월 길사등(吉思等)이 방면되어 (왜국으로) 돌아갔다.
七月 蘇相儀生 王女秋氏 蘇乃野后也 王別立其宮 而寵幸之 群臣爭之 不聽
7월 소상의(蘇相儀)가 왕의 딸 추씨(秋氏)를 낳았다. 소(상의)는 야후(野后, 왜왕후)다. 왕이 소상의의 궁을 별도로 세워 총행(寵幸, 임금의 총애)하였다. 군신들이 그 일을 따지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木猿 二十八年也
목원(木猿=甲申, A.D.444) 28년이다.
正月 蘇時昩生 子武公
정월 소시말(蘇時昩)이 아들 무공(武公)을 낳았다.
四月 野人大擧入寇 蘇可同等 內應之 寵德兵敗 野人入 圍金城 王命多甘等 敵之
4월 야인(野人)이 대거 몰려와 도둑질하고, 소가동(蘇可同, 고자가야)이 내응하였다. 총덕(寵德)의 군사가 패하니, 야인들이 들어와 금성(金城)을 둘러쌌다. 왕이 다감(多甘)등에게 대적하도록 명하였다.
十月 野人粮乏 而退 王追 及獨山之東 敵圍之數重 忽昏霧 不辨咫尺 敵畏而遁去
10월 야인(野人)들이 양식이 떨어져 물러나니 왕이 추격하여 독산(獨山)의 동쪽에 이르니 적들이 여러 겹으로 둘러쌌다. 문득 혼무(昏霧, 어두운 안개)로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워지니 적이 두려워하여 피하여 달아났다.
火豕 三十一年也
화시(火豕=丁亥, A.D.447) 31년이다.
三月 以子可爲西高村主 子可者 野王子也 降我而忠 故命率諸降衆 以居其地
3월 자가(子可)를 서고촌주(西高村主)로 삼았다. 자가는 야왕(野王, 왜왕)의 아들이고, 우리에게 항복하여 충성을 다하니 그런 연유로 그들의 항복한 여러 무리들을 거느리도록 명하고 그들의 땅에서 살도록 하였다.
눌지마립간(삼국사기 신라본기)
28년 여름 4월,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보내 추격하려 하자 측근들이 “병가의 말에 '궁한 도적을 추격하지 말라'하였으니, 왕은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수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독산 동쪽에 이르러 접전하였다. 왕이 이 전투에서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장병이 절반이 넘었다.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적이 여러 겹으로 산을 포위하였다. 이 때 갑자기 어두운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적은 하늘이 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사료2]신라가 왜를 정벌한 기록
법흥왕(남당유고)
二十三年 赤龍 正月 命苔宗肜吹比助夫等 爲三路將軍 以餮舟楫收 伐野國 守知諫之 不聽
23년(A.D. 536) 적룡(赤龍=丙辰) 정월 태종(苔宗), 융취(肜吹), 비조부(比助夫) 등을 삼로(三路)장군으로 삼았다. 이로써 탐하여 주즙(舟楫, 배와 삿대, 배를 통칭하는 말)을 거두어들이고, 야국(野國, 왜)을 치고자하였다. 수지(守知)가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群臣上帝號曰 神國金天大帝 始改元曰 建元 元年 大赦國中 賜八十以上衣酒 加耶福優 爵馬有次
군신들이 제호(帝號, 제왕의 칭호)를 높이어 신국금천대제(神國金天大帝)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연호를 고치어 건원(建元) 원년(元年)이라고 하였다. 나라 안에 대사면을 하였다. (나이) 80이상자에게는 옷과 술을 내리고, 가야(加耶)에서 복비를 냄이 넉넉하였으며, (가야제국에) 작위와 말을 내림에 차례가 있었다.
四月 帝幸碧院 親酌出征諸將 賜甲馬
왕이 벽원(碧院)으로 행차하여 출정하는 제장(諸將)에게 친히 술을 따랐다. 갑마(甲馬, 갑옷을 입힌 말)를 내렸다.
二十五年 黃馬 正月 阿尸良盡平 苔宗都督之
25년(A.D. 538) 황마(黃馬=戊午) 아시량(阿尸良)을 모두 평정하여, 태종(苔宗)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지증왕(남당유고)
十五年 正月 以阿羅爲小京
15년(A.D. 514) 정월 아라(가야)를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七月 命六部及南地 選饒戶 充阿羅國中
7월 육부(六部)와 남쪽에 명하여, 넉넉히 살고 있는 집을 골라 아라국(阿羅國)을 채우도록 하였다.
帝以暑疾 崩於凉宮 太子卽祚 與后行祥 大赦天下 進白官爵一級 奉諸殿君公主 以碧花爲天后 保道爲地后
지증왕(삼국사기 신라본기)
15년 봄 정월,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하여, 이 곳에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지증이라하였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법흥왕(삼국사기 신라본기)
23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건원 원년이라고 하였다.
結語
혹자는 아시량(阿尸良)을 아라가야라고 하나, 아라가야는 지증왕 15년에 멸망하였으니 아시량이 곧 아라가야는 아닐 것이다. 또 아라가야를 치기 위해 신라가 대규모의 선박을 징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의 연표에 신라가 왜를 쳐서 왜왕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나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없으니 진실을 알기 어렵다. 다행히 남당유고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혹자는 남당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 서릉고에서 근무하였다고 하여 그를 식민사학자라고 욕하는 이도 있다. 이는 남당유고를 제대로 탐독하지도 않았으면서 그가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하였다는 기록만을 살펴보고 욕하는 것이다.
지금 그가 살펴본 원본을 살펴볼 수 없는 입장에서 그가 진실로 어떤 저본을 보았는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그가 식민사학자라는 오명만은 씌우지 않아야 할 것이다.
첫댓글 저기에 나오는 소상의, 소시말 등이 모두 비유왕의 누이들입니다. 인덕천왕 혹은 웅략천왕에게 시집간 신제도원의 경우 소시매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사강목 등에 신라의 일본침략 기록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신라의 일본침략이 '사실' 인 게 분명해진 뒤에야 <남당유고> 의 신라 일본침략 기사를 통해 <남당유고> 의 신뢰도가 제고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도 신라의 일본침공 사실이 적혀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