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설경을 낭만적이라 했나?
10월 초가 되자 기온이 급강하 하고 싸래기눈이 뿌리기 시작 했다. 이 지역 전체가 월동준비에 들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골프장도 벌써 문을 닫고 내년 4월에나 다시 개장 한다고 했다. 전 주인 에릭과 레나가 지나는 길에 들렀다면서 여름철에 가동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돌아가는 제빙기 (손님들이 얼음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가져가게 사무실 옆 외부에 설치 했다) 를 멈춰야할 때라고 일러준다. 그거 전원만 차단하면 되는것 아니냐고 묻자 그들은 웃으며 그랬다가는 한 겨울에 제빙기로 들어가는 수도물 공급 파이프가 터져 큰일 난다고 한다.
온김에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하고 그가 하는것을 열심히 배웠다. 우선 전원 스위치를 내리고 건물 내부에 있는 수도물 공급 파이프의 밸브를 잠그고 제빙기내에 들어있는 물을 드레인 밸브를 열어 모두 뽑아낸후 얼음통을 깨끗이 청소했다. 이 정도면 내년에는 나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주차장에 눈이 쌓이는것에 대비해서 미리 전문적으로 눈을 치워주는 제설업체에 전화를 해서 우리 모텔을 그들의 작업 1순위에 올려 놓으라고 한다. 즉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하면 그 업체로 하여금 우리의 연락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를 1차작업 대상으로 알고 그날의 스케줄을 짜게하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곧이 곧대로 행하기에는 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주차장의 눈을 치울것인지 그냥 놔둬도 될것인지는 또는 언제 치워야 할 것인지는 주인이 일단 보고 나서 결정해야 하는것 아닌가?
그래서 이 충고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는데 그 해 겨울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다. 11월 중순, 아침 7시에 사무실 문을 열고 보니 눈이 30센티 이상 쌓여 있었다. 이정도의 눈이면 모텔에 투숙한 손님들이 차를 빼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님차들이 모두 있는 상태에선 제설차를 부를수도 없게 되었다.
이윽고 첫 체크아웃 손님이 차를 빼려는데 역시나 차는 헛 바퀴만 돌고 그자리에서 꼼짝을 못 했다. 내가 삽을 가지고 나가 차 주인과 교대로 차가 나갈 방향의 눈을 대충 치워 길을 만들어서야 겨우 빠져 나갔다. 2번째, 3번째 손님 모두 그런식으로 차를 빼다보니 벌써 허리가 아파온다. 그리고 그 날 따라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손발이 시리고 이거 보통이 아닌데 하다 보니 벌써 이마에선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군대시절 철원 최전방에서 제설작업 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지만 나 혼자가 아니었고 더구나 그 땐 젊었었다. 그런데 지금 환갑이 넘은 내가 이게 무슨짓인지 모르겠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하여튼 거의 모든 차들이 빠져 나간후 제설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지금 눈을 치우지 않은 상태에서 오후에 예약손님들이 들이 닥치면 큰일이다. 할수없이 전 주인 에릭에게 전화를 했다. 에릭은 전화를 받고나서 전에 자기가 해준 충고대로 제설회사에 부탁을 했냐고 묻는다. 깜빡 잊고 전화를 못 했다고 하자 알았다며 전화 끊고 좀 기다리고 있으란다. 으그.... 한시가 급한 판인데. 그 사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조금후에 에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제설업자와 연락이 되었는데 4시경이 되어야 오늘 스케줄이 끝나니 그 때 와서 우리 주차장을 치워 주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4시 전에 오는 예약손님은 어떻게 받냐고 하자 자기가 소형 제설차를 가진 사람 ( 큰 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이 있는 사람이 자기 집과 큰 길까지 눈을 치우기 위해 소형 제설차를 소유하기도 함) 을 아는데 그에게 우선 아쉬운대로 하이웨이로부터 모텔까지 진입로의 눈을 치우고 방 몇개만 골라 그 방 앞 주차공간의 눈도 치워놓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4시경에 제설차가 오면 전에 자기가 이야기 한 대로 부탁을 해 두라고 신신 당부했다. 다행히 4시 전에 제설차가 와서 눈을 대충 치운후 손님들이 체크인을 해서 큰 혼란은 없었으나 몸과 마음이 어지러웠던 긴 하루였다.
이후에는 큰 눈이 내릴 때 마다 제설차가 알아서 아침 일찍 와서 하이웨이까지 출구를 대충 만들어 체크아웃 손님을 돕고 후에 모두가 간 후에 다시와서 주차장을 깨끗이 치워 그 날 손님을 받는데 지장이 없게 해 주었다. 그리고는 2번 출동에 대한 청구서를 어김없이 보내왔는데 자기집에서 모텔까지 오는 시간 30분을 또 보탰다. 이건 횡포에 가까웠지만 필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텔은 2층 건물이며 1층 객실 앞에 기둥을 촘촘히 세워 2층 객실의 통로 겸 베란다를 만들었기 때문에 1층 객실앞 1.5미터 정도는 천정이 있는 형태여서 고객들이 비나 눈을 맞지 않고 사무실을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제설작업을 할때는 그 기둥들이 문제였다. 기둥 사이로는 대형 제설차의 블레이드 ( BLADE : 제설차의 앞 부분. 눈을 밀어내고 들어 옮기는 역할을 한다 ) 가 너무 커서 들어 가지 못해 그 부분의 제설은 언제나 주인의 몫이었다. 눈은 사정없이 그 기둥 안쪽으로 쌓이는데 그 부분은 제설차가 제 구실을 해내지 못했다.
큰 눈이 내리는 날은 예외없이 몹씨 춥고 바람이 심했다. 눈이 쌓인 것을 보면 웬수덩어리를 보는것 같았다. 2년 정도 그렇게 하다 꽤를 내서 눈 올 때만 파트타임으로 그 부분의 눈을 치우는 사람을 구해 그 일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가끔 그 친구가 제 때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유를 물어 보니 자기 집에서 큰 길까지 나오는 길이 눈으로 막히곤 했던 것이다. 후에 필자가 드라이덴을 떠나게 된 데에는 이 눈도 한몫 했음을 부인 할 수 없겠다. 눈이 오면 운동장에 나가 눈을 맞고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던 그런 낭만적인 눈이 아니었다.
한참 뒤. 드라이덴 생활을 접고 이곳 밴쿠버로 온 뒤 겨울철, 친구들로부터 비가 지긋지긋 하다며 차라리 눈이라도 내렸으면 하는 소리를 들을 때 마다 필자는 말한다. " 너희는 제설작업으로 등골이 휜 나를 앞에 두고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천하에 괘씸한지고. "
첫댓글 - 이글을 올리고 보니 제목이 잘못올랐습니다.
- "나의 인생 견문록 (22)/ 정관일" 로 보아주십시오.
캐나다스런 곳에서 사셨네요.
하룻밤에 2미터씩 내리는 곳에서도 일을 해봐서 그 심정 이해가 됩니다.
캠루프 지나 어디쯤에서도 록키를 가다가 오밤중에 포기하고...
강릉에서도 점심 먹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대관령이 섬짓해 숟가락 놓고 귀경하다 미심적어 용평 콘도로 들어 갔더니 얼마 뒤 고속도로가 막혀 길위에 수많은 차들이 갇혀 뉴스에....
헬기로 비상 식량투하....다음날 늦게 개통...아침에 주차장에 제 겔로퍼 찝차가 완전히 눈 속에 파묻혔더군요.
아프리카에서 온 환갑쟁이 젊은이(?)가 영하 1도에도 난리예요
캐나다 사람되었으니 스키라도 배워 즐기라니 츕다고 동네 스케이트 장도 안 가보았다네요.
다양한 세상 좋은 경험하시니 좋은 글거리도 됩니다.
건강하세요
- 그렇게 추운 곳에 있다 이곳 밴쿠버로 와서 한동안은 괜찮았는데 요즘은 이곳도 겨울만 되면 으슬으슬 추워요. 아무래도 나이 탓이 아닐까 합니다.
- 열대 동남아지역으로 피한을 가야 할듯. 필리핀이나 캄보디아에서 열대 태양을 쐬여 몸을 좀 녹이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ㅎㅎ
이쪽 캐내디언 시니어들은 12월에서 다음해 3-4월 까지 중미 자메이카 쪽으로 많이 갑니다.
부부나 친지들 몇명이 집 한채를 임대해서 살면 이곳에서 사는 것보다
싸고 언어도 별 문제가 없어 해마다 떠나는 이들이 많더군요.
자메이카는 캐나다 연방이 돠겠다고 오래전 부터 추진 중이라고도...
- Good idea 입니다.
- 그 쪽도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