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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 이 시집
바보들의 시 읽기
이동재(시인, 소설가)
―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 이병초,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 (걷는사람, 2024)
― 이영광, 『살 것만 같던 마음』 (창작과비평사, 2024)
― 이애리, 『동해 소금길』 (시로여는세상, 2019)
지난 5월 22일, 시인 신경림(본명 신응식)이 세상을 떠났다. 1935년 충주에서 태어나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낮달」·「석상」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고인은 향년 89세, 시력 68년의 원로시인이었다.
그는 등단 17년 만인 1973년 첫 시집 300부를 자비 출판했다. 그의 첫 시집 출간이 이토록 늦어진 것은 그가 등단 후 시골로 내려가 10여 년간 농사를 짓거나 광산일, 혹은 공사장 노동자로 전전하면서 산 것과 연관이 있다. 물론 당시의 문단 행태나 시국에 대해 실망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첫 시집을 창작과비평사에서 1975년 재출간한 『농무農舞』로 인하여 그는 일약 유명 시인으로 등극했다. 『농무』는 창작과비평사 제1호 시선으로 문학과지성사 제1호 시선인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와 함께 오랫동안 창비와 한국 문단의 상징적 표상으로서 독자들에게 각인되어 왔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이라도 갈까
하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신경림, 「파장罷場」 전문
대부분의 시인들은 자신의 첫 시집의 특징과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인들의 대표작이 그의 처녀시집과 관련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처녀시집이 나오기까지 최소 2·30년 이상의 삶의 경험과 내공이 녹아 있는 데 반하여, 그다음부터 나오는 시집은 보통 빠르면 1년에서 5년 정도의 삶의 흔적이 담기기 때문이다. 신경림의 경우도 십여 권에 달하는 시집 모두가 나름대로 문제작이지만, 대부분의 독자에게 그는 여전히 「농무」의 『농무』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을 듯하다.
신경림은 한국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시대, 산업화 시대에서 다시 정보화 시대로 넘어가는 현시점까지를 살며 시를 썼지만, 그의 시의 특징은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시대로 넘어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시들에 있다. 첫 시집 『농무』를 비롯하여 『새재』(1979)·『달넘세』(1985)·『남한강』(1987)·『목계장터』(1989) 등의 그의 주요 시집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고향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한 농경 정서에 깊게 침윤되어 있던 시인이었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으로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고, 다시 산업화의 그늘에서 허덕이던 가난한 농촌을 체험한 시인에게 급격히 몰락해 가고 있던 당대의 농촌 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가 포착하여 시로 승화시킨 그러한 시들로 인하여 그는 일약 당대의 문학적 미학과 부합하는, 민중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창비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운이었고, 창비의 행운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경림이 『농무』와 그 이후의 시집에서 다룬 농촌이 산업화로 인하여 우리의 농촌이 몰락해 가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농촌 자체가 소멸 위기에 처한 시대다. 얼마 전 나는 경북 의성의 한 시골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문명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사람들이 떠나자 한 시대 문명의 상징이요 부의 상징이었던 고택들이 여기저기 텅 빈 채 무너져가는 모습은 잠시 스쳐 가는 사람이 보기에도 너무 씁쓸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마을 구멍가게에서 이제 더 이상 동네에 술 마실 사람이 없어서 술조차 가져다 놓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된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림이 다시 살아온다고 하더라도 못난 놈들의 ‘농무’는 커녕 학교도 마을도 텅 빈 마을에서 이젠 더 이상 술 마실 사람도, 악을 쓸 ‘조무래기들’도, 꽹과리를 치고 섰다를 할 사람도 없는 시골의 현실 앞에 망연자실할 것만 같다. 요즘 시인들은 또 어떤 시로써 이 시대와 인간들을 위로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인생 초년의 고생과 1975년 자유실천문인협회의회 결성,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인한 옥고를 치르며 어려움도 겪었겠으나, 그는 대한민국에서 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을 거의 모두 누리다 세상을 뜬 몇 안 되는 시인 중 하나다. 그는 시 바보로 살았으나 수많은 애독자를 거느린 시 사랑꾼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아름다운 시 「묘비」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쓸쓸히 살다가’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묻힌다. 아니 이제는 그런 목가적인 무덤조차 기대할 수는 없다. 쓸쓸히 살다가 그냥 납골당으로 간다. 하지만 그는 ‘시인답지 않게’(?) 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환송 속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도 점차 세월의 풍화 속에 잊혀 가는 인간의 운명을 피해 가지는 못할 것이다. 다가오는 AI시대, 더욱더 멀어져 가는 농경 정서와 함께.
이병초 시인은 학교 바보다. 남들은 잘 버티고 있는 학교에서 쫓겨나서 바보고, 그 학교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못하니 또 바보다.
우리나라 사립학교의 비리는 크게 교비횡령(등록금 및 정부 지원금 유용 혹은 횡령)과 인사 비리다. 이러한 사학 비리는 대학의 85% 정도가 사립인 우리나라에서 교육사업을 변형된 수익사업 정도로 여겨온 설립자와 운영자들의 기본적인 태도와 구조적 시스템의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 나름 이 분야의 전문가인 나는 여기서 비슷비슷한 우리나라 사학들의 구체적인 비리 사례와 실태를 다시 나열하거나 분석하고 싶지는 않다.
이병초의 시집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의 제3부 ‘농성 일기’ 편은 이러한 대학 비리와 그 비리에 의해 희생된 교직원들의 서글픈 일상적 모습을 비교적 담담히 그려내고 있는 시편이다.
동료들이 강의에 들어간 뒤
나는 다시 홀로 되어
사기 접시에 향나무 토막을 깎아서
태우곤 했다 악연이 나만
피해갈 리 없다고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위는 물을 친 듯 조용했다
덜 탄 불씨 뒤적거리며 향냄새가
내 몸을 염습斂襲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지금 세상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 셈인데, 생의
한꺼풀을 벗는 순간은
이렇게 홀가분한 것이구나
다음 생엔 풀잎과 이슬과 여치 소리를 본적지 삼자고
머릿속에 쓴 축문을 되새기다가
누가 똑똑 문을 두드리면
나는 덜 쓴 축문을
후다닥 벗어 던졌다
― 이병초, 「덜 쓴 축문」 전문
함께 동조 농성을 하던 동료 교수들이 강의를 들어간 후 농성 천막 안에 혼자 남은 화자는 향나무를 깎아서 향을 피우며, 잠시 저 세상을 생각하는 모습이다. 해직자가 감당해야 할 온갖 모멸과 현실적인 곤경, 그리고 급격히 표변하기 시작하는 주위의 인간관계는 순간적으로 삶의 의욕을 앗아가기도 하며, 그럴 때마다 해직자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해직자들이 그러한 모멸감과 곤경 속에서 죽음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생을 달리하기도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온갖 스트레스로 인한 합병증으로 일찍 세상을 뜨기도 한다.
전교조 교사들이 교단으로 복직하는데 보통 10년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사립대학의 해직 교수들은 간혹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은 이사장을 만나서 운 좋게 복직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해직 교수들은 그걸로 평생 끝이다. 일단 교수들의 해직을 합리화(?)·합법화(?) 시켜주고 있는 편리한 교수 재임용제도라는 것이 재단의 교수 해직을 법적으로 편리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사립학교라도 초중고 교사의 월급의 대부분은 국고에서 지급되는 데 비해 사립대학 교수의 월급은 사실상 학생들의 등록금일 것이지만, 명목상 사립 재단에서 나가므로 사립학교의 교직원 인사에 국가나 사회의 개입이나 영향이 미칠 수 없다. 모든 것이 지리한 민사 소송으로 가야만 한다. 설사 재판에서 이기더라도 대형 로펌을 동원한 재단의 장기전에 교수 개인이 맞서는 데는 한계가 명확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지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초중고 교사들 인사만도 못한 대학 인사 제도의 현실이다. 어떻게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으로 올라갈수록 이 땅의 교육과 제도는 질이 나빠지고 망가지는지 모를 일이다. 비리 사학 재단은 그러한 제도를 악용하여 수많은 교수들을 내쫓고, 심지어는 폐과로써 응징하기도 한다. 왕조시대에 삼족을 멸하는 수준이다. 그러다가 스스로 무덤을 파서 어쩌다 폐과가 아니라 폐교로 돌려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해직자들의 일상과 삶이 모두 망가진 이후이기 쉽다. 가정 파탄은 기본이고, 수십 년 흘러가 버린 시간과 유무형의 비용은 어디 가서 보상받을 길이 없다. 재취업은 어림도 없고, 전도양양한 학자에서 하루아침에 인생 파탄자가 돼버리기 일쑤다. 성폭력 교수는 혹시 재취업이 될 수 있어도, 재단에 반기를 들었던 교수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병초 시인의 경우도 그나마 지금까지 그를 버티게 해주고 있는 힘이 그래도 시라면 믿겠나? 해직의 협박과 현실적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할 것인가, 얌전히 주는 월급이나 받아가며 교수 노릇을 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내가 그래도 시인인데 그럴 순 없지!’였었고, 해직된 후에도 ‘내가 그래도 시인인데 저런 비열한 인간들과 세상 앞에 굴복할 순 없지!’였다. 시가 술 한잔이나 밥 한 끼도 해결해 주지 못하고, 누가 내 시를 열심히 읽어주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이병초 시인 또한 그런 시를 믿고 스스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그놈의 시가 뭐고, 시인이 뭐라고?
이제 그런 대학들도 체계적인 교육 설계와 개혁이 아니라, 인구 절벽 앞에 심판을 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 그동안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에 기대서 명줄을 이어왔더라도, 조만간 그 끝도 보이는 듯하다.(세상 일이란게 변수라는 것도 있으니 아직은 또 모르는 일이긴 하다.)
앉아서 돈 받아 가며 부실대학을 설립 인가 해주고,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교육부 관료와 정치인 및 법조인들, 그리고 내부 부역자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것이지만, 시인은 불의와 부정이 있는 곳에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소진해 가면서도 끝까지 저항하는 존재다. 그럴 때 시인은 시인이다. 바보 이병초가 그러한 시인 중 하나일 거다.
나는 가끔 ‘교수 시인’들을 보면 반문하고 싶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떻게 이렇게 문제가 많은 대한민국의 대학에서 시인이란 사람들이 정년퇴직이란 걸 할 수 있지? 그러고도 당신들이 정말 시인인가? 그걸로도 모자라서 예술원 회원이 되고 학술원 회원이 되려고 서로 발버둥 친다면, 사적 욕망에 눈이 멀어 지금 나라를 파탄으로 끌고 가고 있는 저 정치 자영업자들이나 기레기 언론·방송인, 영혼도 없고 염치도 없는 고위 공무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병초 시인이 타의(의도된? 재단에 대들면 잘린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으니까)에 의해서 학교에서 밀려난 바보라면, 이영광 시인은 스스로 그 학교를 걸어 나온 바보다. 어렵게 된 교수 노릇을 잘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가 다시 야인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안 것은 그와 나의 지도교수였던 선생님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나는 그의 퇴직(?)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 문제에 대해서 “왜? 다시 시인처럼 살고 싶었어?”가 내가 그에게 말한 전부였다. 대답은 듣지 않았다. 언젠가 교수가 된 다음에 쓰는 시들이 별로였다고 말한 적도 있는 듯하기도 하다. 사실 나는 그가 조금 더 월급쟁이로서 일상 인의 삶을 살기를 바랐다. 진짜 시인으로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나도 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시인으로 돌아온 이영광 시인이 최근 출간한 시집이 『살 것만 같던 마음』이다. 이병초 시인에게서 ‘죽을 것만 같던 마음’을 읽었다면, 이영광 시인에게선 ‘살 것만 같던 마음’을 읽는다.
내가 우는 건 좀 하지
낮부터 저녁까지 일하다가
밤이 깊으면,
다 큰 어른이나 된 듯
술병을 딴다
새벽에 잠들어 아침 늦게 일어난다
스물 때도 이랬는데
조금만 마시거라,
나무라기도 달래주기도 하던 말씀이
이젠 없고
어느 먼 곳이다
― 이영광, 「어린 아침」 부분
이번 시집은 이영광의 사모곡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몇 년 사이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저세상으로 보낸 시인은 이제 완전 고아다. 우린 언젠가 모두 고아가 된다. 그리하여 쓸쓸한 자유인이 된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조금만 마시라고 걱정해 줄 사람도 없다. 먼 곳으로 갔다.
(바보야, 그래도 혼술은 조금 줄여! 한밤중에 혼자 술 마시다가 질질 짜지나 말고! 그래도 시집이 나왔으니 나랑은 한잔하자!)
강릉에 사는 이애리 시인은 고향 바보다. 누구나 고향 시편을 한두 편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지만, 지고지순 고향에 바치는 시를 쓰기는 쉽지 않다.
『동해 소금길』은 오롯이 자신의 고향에 바치는 이애리 시인의 연가다. 동해가 고향인 시인은 현재 강릉에서 살며 그 일대를 열심히 자신의 시에 담아내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지극히 로컬 시인이지만, 휴가철이면 전 국민의 바다가 되는 동해에 자리 잡은 터줏대감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시인의 시는 전 국민의 시심을 사로잡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그 가능성을 아직은 포기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이애리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은 벌써 강릉행 열차에 몸을 싣고 있다. 명주溟州, 아슬라, 하슬라, 그 이름처럼 아득히 멀어서 그리운 곳.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의 한순간을 그곳에 묻은 적이 있다. 어느새 강릉의 바닷가 커피 냄새가 행마다 스며들고 있는 듯하다.
해무로 앞을 가늠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은 싱싱한 몸 출렁이는 청춘의 바다
여든에 찾아가도 다 품어줄 드넓은 바다
심장에 구멍이 숭숭 뚫린 날은
당신 품에 무작정 달려가 정박하자
당신은 어마어마한 힘 솟는 사람의 바다
당신은 ‘하슬라역 커피’로 성장하는 바다
당신은 결혼을 약속하는 바다
당신 곁에서 경포호 다섯 개의 보름달이
떠 있는 ‘희애별 커피’를 마시며
환희의 강릉항에 정박하면 좋겠다
개발논리로만 앞서는 당신이 아니기를
강릉항의 옛 이름 안목항 당신이랑
서로 감동하며 천천히 늙어가겠네
― 이애리, 「안목항」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