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승부처(勝負處)로 삼고자
1789년 벌어진 프랑스 혁명(革命)은 인류사(人類史)에 엄청난 영향(影向)을 끼친 위대한 사건(事件)이었습니다.
당시까지 존재(存在)했던 철옹성(鐵瓮城) 같은 봉건적 질서(封建的秩序)가 무너져 내리고 시민(市民)이 주인(主人)이 되는 세상(世上)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 한 번의 거사(巨事)로 모든 것이 순식간(瞬息間) 바뀐 것은 아니었고 이후 10여 년간 혼란(昏亂)이 이어졌는데, 엄밀히 말해 계급 갈등(階級葛藤)은 현재(現在)도 진행 중(進行中)입니다.
그러한 과정(過政)에서 많은 이들이 고통(苦痛)을 겪었습니다.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을 습격하는 시위대
당연히 이런 급진적 변화(急進的變化)는 기존 체제(旣存體制)를 유지(維持)하려는 주변국(周邊國)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권세(權勢)를 누려왔고 그것을 당연시 해온 왕족(王族), 귀족(貴族)을 비롯한 특권층(特權層)은 민중(民衆)이 동요(動搖)하자 혁명 이념(革命理念)이 확산(擴散)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프랑스를 혁명 이전(以前)의 상태(狀態)로 돌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 몰락(沒落) 후 오스트리아의 재상(宰相)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1773년 5월 15일~1859년 6월 11일)의 주도(主導)로 반동(反動)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루이 16세의 처형,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 혁명 광장에 설치된 길로틴으로 처형되었다. 루이 16세는 "나는 모든 죄목에 대해 무죄로 죽어간다"고 말했다.(파리 카르나발레 미술관 소장)
마리 앙트와네트는 같은 해 10월 16일 역시 길로틴으로 처형되었다. 처형이 임박한 것을 알려주자 마리 앙트와네트의 머리는 단 며칠 사이에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주변국 권력자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특정국 단독(特定國單獨)으로 프랑스 혁명 정부(革命政府)를 상대(相對)하는 것이 현실적(現實的)으로 버거우니 함께 대처(對處)하자며 동맹(同盟)이 결성(結成)되었습니다.
이를 대(對)프랑스동맹이라 하는데 1772년 제1차 동맹을 시작으로 1815년 제7차 동맹까지 총 일곱 차례 결성되었습니다.
제3차 동맹이후부터는 나폴레옹의 패권(覇權)에 대항(對抗)하는 것이 목적(目的)이므로 반혁명(反革命) 목적으로 성립(成立)된 것은 제1, 2차 동맹뿐이었습니다.
↑1791년 주변국의 필니츠 선언(Declaration of Pillnitz)은 프랑스 혁명 정부를 자극했습니다
이처럼 목적은 그때마다 차이(差異)가 있었지만 제5차 동맹 전쟁(同盟戰爭)까지 모두 동맹국이 패(敗)하면서 의도(意圖)와 달리 오히려 프랑스가 유럽의 지배자(支配者)로 등극(登極)했습니다.
제1차 대프랑스동맹 전쟁은 그러한 프랑스 팽창(膨脹)의 시작점(始作點)이었습니다.
동맹국은 자신만만했지만 혁명의 혼란기(混亂期) 임에도 오히려 프랑스가 강력(强力)했습니다.
혁명의 주체(主體)인 민중(民衆)이 주인 의식(主人意識)을 갖고 자발적(自發的)으로 외세(外勢)에 저항(抵抗)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792년 프랑스는 빌미 전투에서 동맹국을 격파했습니다
1797년 제1차 전쟁이 끝났을 때 주축(主軸)이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가 많은 영토(領土)를 잃고 무릎을 꿇자 동맹은 와해(瓦解)되었습니다.
이제 영국만이 프랑스에 대항(對抗)하는 유일 세력(有一勢力)이 되었습니다.
여담(餘談)으로 영국은 7차례 전쟁에서 끝까지 굴복(屈伏)하지 않았던 나라였고 결국 승자(勝者)가 되었습니다. 혁명과 반혁명이라는 명분(名分) 보다 이들 양국(兩國)은 100년 전쟁이래 앙숙(怏宿)이었기에 어떻게든 상대를 제압(制壓)하고자 했습니다.
↑1797년 리볼리(Rivoli)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그런데 영국의 해군(海軍)이 워낙 강력(强力)했기에 프랑스가 해협(海峽)을 건너 가 영국을 점령(占領)할 수 있는 형편(形便)이 아니었고 반대로 제1차 대프랑스동맹 전쟁 중 쓴맛을 본 영국 육군이 대륙(大陸)으로 넘어와 강력한 프랑스 육군과 싸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프랑스의 독주(獨走)를 막아야 했기에 영국은 자신들의 이점(利點)을 살려 프랑스의 해상 통로(海上通路)를 차단(遮斷)하는 전략(戰略)을 구사(構思)했습니다.
지금도 해군 강국(海軍强國)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方法)입니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으로 바다에서 프랑스를 견제했습니다
당연히 프랑스의 심기(心氣)는 불편(不便)했습니다.
그렇다고 정면(正面)으로 대응(對應)하고 나서는 것은 영국의 의도(意圖)에 철저히 말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심(苦心) 끝에 같은 방식으로 영국을 괴롭히기로 했습니다.
근동(近東)의 이집트(Egypt)를 점령(占領)해서 영국과 중동(中東), 서부(西部) 아프리카, 인도를 연결(連結)하는 통로(通路)를 차단(遮斷)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의도가 성공(成功)한다면 해외(海外) 의존도(依存度)가 큰 영국에게 타격(打擊)을 줄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집트 원정에 나섰습니다
4만의 원정군(遠征軍)을 지휘(指揮)할 인물로 나폴레옹이 낙점(落點)되었습니다.
급격(急激)히 대중적 인기(大衆的人氣)를 얻은 그를 위험인물(危險人物)로 보고 멀리 보내려는 혁명 정부(革命政府)의 의중(意中)이 어우러진 결과(決科)였습니다.
그런데 흠모(欽慕)하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 알랙산더 대왕)를 흉내 내 원정군에 학자(學者)들까지 포함(包含) 시켰을 만큼 나폴레옹 본인(本人)의 의지(意志)도 컸습니다.
하기 위해 기함(旗艦) 오리앙(L'Orient)을 위시(爲始)한 13척의 전열함(戰列艦, ship of the line)과 4척의 프리깃(frigate)이 동원(動員)되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