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6:3~ 5 부활의 삶에 대한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4월의 부활 절기를 맞이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에 대하여 살펴본 것들을 정리하고 부활한 사람의 세상 삶은 어때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기록의 목적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하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영원히 살려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픔 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활에 대하여 많은 곳에서 기록해 놓고 있는데, 나사로의 부활이나, 주님의 부활, 그리고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에 대하여, 계시록에서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등 여러 표현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기록한 부활에 관한 말씀은 마22장23절부터 읽어 보면「일곱 형제부활」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 유태교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항상 이 부활의 교리 문제로 서로 옥신각신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한 여자가 일곱 남편을 취했으니 부활 때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질문을 할 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들이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부활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이 곧「부활」이라는 말입니다.
단도직입 적으로 말하면「너희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다면 이미 부활한 사람」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를 다녔음에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부활에 참여치 못한 자요,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계 3:1)"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너희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른다면. 나는 무엇이었으며 내가 믿어왔던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었는지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숨길 것도 뒤로 미룰 것도 아니고 이제까지 믿어왔던 확신 하나만으로 밀고 나갈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여러 시간을 부활에 대하여 설명한 이유도 하나님과 부활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문제를 알리려고 많은 시간을 할애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알아 부활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르게 알려면 주님의 알려주시는 29절의 대답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 중에 특히 주목할 마22:29절의 말씀인데 그 중에 "오해하였도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헬라원문은 πλανασθε(프라나스데)인데 원 뜻은 "미혹되다 길을 잃다. 방황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즉, 너희들이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가 미혹의 말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누구로부터 미혹을 받아 제대로 알지 못했으므로 '정신이 헷갈려 헤맴'이 되고 그러므로 '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림'이 된 상태에 있어서 부활 생명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무엇의 미혹으로 정신이 엇갈려 헤매는 것은 소위 혼이 빠진 사람 즉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엡4: 14)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말세 현상이 일어날 것을 아신 주님은 수차에 걸쳐 "사람의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고전 15:33에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뤠아 성도들처럼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그 말씀에서 하나님과 예수와 그리스도와 성령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맞는 것은 성경은 그 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5: 39) 그리스도를 알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왜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18"십자가의 도(道, 호 로고스, 말씀)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롬1:16"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요1: 12 그 그리스도는 바로「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요1:12)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어"(히8:10, 시100편)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마22:32)
부활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논해야만 말이 통하고 깨달아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 사두개인의 부활 관의 잘못이 무엇 때문인지 발견하셨습니까? 저들은 사단의 미혹을 받아서 말씀을 바로 알지 못했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여서 부활도 바르게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길 만이 미혹을 견딜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22장32절에서 부활의 정의를【산자】로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경험치 못한 자는【죽은 자】라고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의 본문은 분명하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같으신, 곧 산 자(나)의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그렇다】라고 대답하신다면 【나】는 부활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부활사건은 내게 언제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하여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1~44절은【나사로의 부활】사건이 기록 된 말씀입니다.
먼저【나사로의 죽음】을 보는 주님의 관점을 살펴보면, 11절에서 주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죽은 것을 잠들었다"라고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주님의 관점은【죽음】을【잠】으로 보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현장에 3년 동안이나 한 솥밥을 먹은 제자들이나, 주님을 따르던 마르다(21), 마리아(32)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저들은 나사로가 잠자는 것이 아닌 죽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 현실을 죽음으로 보지 않을 인간(人間)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나사로 사건이 성경에 무엇 때문에 기록이 되었을까요? 그 목적이 무엇 때문일까요?
그 대답을 주님은 요11:4절에 기록해 놓았는데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하시고
또 15절에는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므로 이 사건의 목적이 무엇 때문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11장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3절에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시며 6절에서는 "들으시고 그 후에" 즉 "죽은 지 사흘(17)이 지난 후에야 현장에 도착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만 볼 때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지 않고도 주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잠들었다)”는 사실을 아시고 있었으며 며칠을 지난 후에야 그때야 '깨우러 가'시는 행동을 하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과, 그런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된 것은 그렇게 하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내가(그리스도 예수가)【현재적 부활신앙】을 그들에게 심어 주려하신 것입니다.
요11:21절을 보면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 라고 말하자 23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하시자,24절에서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우선 여기까지만 보면, 마르다의 부활 신앙이 현재 신앙이 아닌 미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25~26절에서 “나를 무엇(?)으로 알고 믿으면 지금 네 오라비가 지금 산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의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지금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지금 네가 믿는다면” 부활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이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없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 죽은 자 속에 생명이 주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것이 곧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43절입니다.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
죽은 자 속에 그리스도, 곧 생명(生命)이 들어가면 그가 곧【산 자】요 ,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임을 보여주면서 우리 모두 그 부활의 믿음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이 필요로 하는 여러분!
주님이 생명이라고 한다면 주님은 부활이시고, 생명(生命)이신 것입니다.
고후 13:5절은 죽은 시체는 내다 버리는데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곧 시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여러분들은 시체인가요? 아니면 산 자인가요?
죽은 몸으로 태어난 우리 속에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마음에 영접하여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셨습니까?
이 말은 주님의 하신 말씀이 나사로를 살리듯 지금 나를 부활케 하시는 것을 믿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롬 6:4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롬 6:11절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미래 육체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들은 말씀이 나를 지금 살리는 것임을 알고 믿어서 마음 안에 가짐으로 『지금 모두 현재적 부활의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나기를』기독교의 절기에 간절히 원해 봅니다.
첫댓글 할레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