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도윤회(六道輪廻) 벗어나는 길 ‘이뭣고’
이제부터 화두(話頭)를 설하겠습니다.
화두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이뭣고?’는,
지금 산승(山僧)의 말을 여러분은 잘 듣고 그것을 잘 지키고 정진을 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하는 놈이 무엇인가 이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말로는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나’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이라고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또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코로 냄새를 맡아볼 수도 없고,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거든요.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데,
대답하면서도 그 대답하는 그놈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알 수 없는 그놈을 ‘이것이 무엇인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속상한 데에 끌려가지 말고 퍼뜩 ‘이뭣고?’
‘이뭣고?’로써 육도윤회(六道輪廻) 속에서 살면서
육도윤회를 해탈(解脫)하는 길이 바로 ‘이뭣고’, ‘이뭣고?’인 것입니다.
천하 간단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고 누구든지 행할 수가 있는데 잠깐 한눈을 팔면 놓쳐버리거든요.
놓치면 또 챙겨서 ‘이뭣고?’ 제일 챙기기가 어려울 때가 진심(瞋心)을 낼 때입니다.
속이 상할 때는 그 속상한 것을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불같은 화가 치밀어오를 때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면 매우 속이 상할 때도 화두를 들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 한 마디가 바로 육도윤회에 해탈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이고
일 찰나 간에 펄펄 끓는 불구덩이에서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번 해 보십시오.
‘이뭣고?’
대중; ‘이뭣고?’
‘이뭣고?’
대중; 이뭣고?’
이 뭣 고, 합해서 ‘이‧뭣‧고’ 석 자지마는,
이? 할 때 ‘이?’ 속에 알 수 없는 의심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뭣고?’
조주공안몰심사(趙州公案沒心思)하고
철벽은산백부지(鐵壁銀山百不知)로다
나무아미타불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하면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니라.
나무아미타불
‘이뭣고?’ 또는 조주 무자 화두를 드는 분이나
‘이뭣고?’를 하나 그 의심에 있어서는 똑같은 것입니다.
조주 공안에 몰심사(沒心思) 하면, 완전히 거기에 마음과 생각이 거기에 깊이 몰두하면,
철벽은산백부지 철벽과 은산과 같이 꽉 막혀서 백 가지를 다 아는 것이 없어.
의심 의심을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 화두는 철학이나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무슨 <법화경>이나 <금강경>이나 <화엄경>이나
그런 경전에 나오는 말씀으로써 이 화두를 분석하고 화두하고 비교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화두는 다만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힌 것처럼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이 독로(獨露)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 이렇게 해나가면, 이렇게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고,
앉아서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거나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고 해서
의심이 끊이지 않도록 해나가면, 언젠가는 그 의심을, 의심이 툭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나가야 의심을 타파하는 것이지
의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철학적으로
이걸 분석해서 나가는 동안에는 백천만 겁을 분석해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의래의거(疑來疑去)해서 의단(疑團)이 끝이, 사이가 없으면,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 고목(枯木)이 꽃을 피워서 온 가지에 꽃이 필 것이다.
이것입니다.
- 송담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