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14. 큐티
마태복음 9:14 ~ 17
금식 논쟁
관찰 :
1) 예수님께 나아온 세례 요한의 제자들
- 14절.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 예수님께 나아온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바리새인과 동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 곧, 금식의 근거가 바리새인들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도 독사의 자식이라고 꾸짖으며 회개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조차도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앎이 없었기도 했지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어느 사이엔가 군중들의 인기에 힘입어 바리새인들과 한 패가 되고, 그들의 논리를 따르고 그 논리를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 “우리는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사실 이들의 힐난의 대상은 예수님에게 맞추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왜 절기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며, 그 절기에 합당한 금식을 하지 아니하느냐고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대답
- 15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시의 가장 큰 행사는 지금도 그렇듯이 혼인이었습니다. 이 혼인 잔치의 때에 금식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하는 자는 설령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이 지적은 매우 타당하고 이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대답이셨습니다.
-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예수님은 금식 무용론자가 아니셨습니다. 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금식할 때가 있고, 금식하지 아니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안타까움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동시에 안일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장차 있을 일에 대해서 경고 및 경계의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밀월의 시간이 곧 마무리되고 금식하고 애통하는 시간이 이를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16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 이 말씀은 두 가지의 상황을 연상하게 됩니다. 하나는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새 옷을 입혀서 집안에 들어오게 하는 장면입니다. 더러워진 옷으로 집에 들어와 아들의 지위를 얻을 수 없기에 새 옷을 입혀 그에게 아들의 존재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스가랴서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그의 옷이 마치 불에 그을린 옷과 같은 것을 입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사자들에게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기존의 틀에다가 생베조각을 붙이어 오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기존의 틀 전체를 바꾸시러 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자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이 됩니다. 생베조각의 비유와 같은 말씀입니다. 포도주는 발효력이 왕성해서 부대를 팽창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팽창된 낡은 부대에 다시 새로운 발효력이 왕성한 새 포도주를 넣으면 부대는 반드시 터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새로운 포도주는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둘 다 보전이 됩니다.
- 둘 다 보전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님이 새롭게 이루시는 틀을 통해서 구원의 통로가 열려져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옷을 망가뜨리는 것도,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리는 것에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을 보존하는 가운데 더 좋은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둘 다 보전하기 위함이십니다.
가르침 :
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어찌해서인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인 가르침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금식에 대한 논쟁은 그러한 것에 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금식에 대해서 그들이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때를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금식할 때와 금식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언제나 무슨 상황에서도 해야되는 율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이지 항상 옳은 일이나 율법 자체는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일하시는 때와 방법을 면밀히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감함이 없으면 어느새 나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같이 세상의 조건에 물들어 버림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초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렇게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드러내기를 원했지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있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반하여 그들은 여전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2) 생베 조각과 포도주 부대를 통해서 주님이 알려주시고자 한 진리는 구약의 시대가 끝나고 신약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들이 그 당시에 해석되고 순종되어졌지만 예수님 당시의 상황은 구약의 메시지를 자신들의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님은 열두 살 때에 예루살렘에 가셔서 제자장과 서기관들과 논쟁하시면서 이미 당시 유대인들의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아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미 구약의 바른 해석을 설명하셨지만 그들은 기이히 여기기만 했을 뿐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또한 주님이 이미 구약의 말씀들을 풀어서 설명해 주고 계셨지만 이들은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답답한 상황속에서 판을 바꾸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기존의 체계에 일부 혹은 상당한 부분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것으로 바꾸시는 “신약”의 세계를 여시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말씀 스스로 권위를 세워가시게 됩니다. 사람들이 회의를 해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용 :
1) 율법주의에 빠지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으로 내가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잣대를 세워나가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것으로만 판단하게 되는 문제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갖추어야 금식도 의미가 있고, 우리의 신앙의 자태가 바르게 설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낮은 수준이거나 복음이 아닐 수 있는 율법주의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이 획일적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은 좁은 문을 지향하지만, 사람 자체는 넓고 넓어서 원수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주님의 복음은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조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존의 종교적 관념에서 복을 기원하는 것도 뛰어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찌하던지 복 받고 누리고자 하는 기대치를 바꾸어 놓는 역설입니다. 내가 이해하고 생각하는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신앙과는 그래서 너무나 자주 충돌을 일으킵니다. 생베 조각이 옷을 당기는 현상, 포도주가 부풀어 가죽부대가 터지려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대로 두면 안됩니다. 새 옷으로 바꾸고, 새 부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갖는 낡은 부대와 같은 종교성이 무엇이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관념을 벗어나 주님의 관점과 주님의 가치 속에서 주님의 복음을 다시금 바라보겠습니다. 주님은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너무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주님의 의도하심이 파괴가 아니라 보전이시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그래서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제 삶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인생에서 너무 큰 어려움을 당하다보니 자칫 나 자신에게 자책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뭉클뭉클 올라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아내를 천국으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일은 나와 가족들을 파괴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시고자 하심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크신 주님의 은혜를 주님을 찬양합니다.
4) 항문 주변에 고름이 생겨서 갑자기 수술하고 입원했습니다. 하루만인 오늘 퇴원합니다. 이래 저래 큰 일을 치르며 몸이 약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새 힘을 공급해 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