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부처님 오신 날은 지나갔지만
김 난 석
어제는 불기 2561년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며칠 전 밤길에서 우연히 연등행렬과 마주쳤는데
이번엔 도심에서 가까운 절을 찾아보리라 맘먹고 있던 차
삼각산 금선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도심에서 가까운 절이라면 조계사를 들 수 있다.
허나 대통령 선거 엿새를 앞둔 터라
정치인들이 모두 모여들리라는 예감에
조금 떨어진 곳을 택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래 된 사찰들이 그러하듯
금선사도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무학대사가 창건한 걸 조선조 정조 때 중창했다는 정도다.
원래는 금선사 아래쪽에 목정굴(木精窟)만 있었는데
이곳에서 정진하던 농산대사의 기도와 세자(순조) 탄생의 인연으로
정조가 중창을 명했다는 것이다.(조계종의 설명)
그 인연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금선사와 목정굴이 기도도량으로
오랜 전통을 이어온 곳이란 상상은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굴 안에는 수월관음을 모셨다 하는데... 수리 중이라 했다.
그래도 궁금해 접근해보려니 무무문(無無門)을 지나야 했다.
지난 송광사 순례에서도 무무문을 만나 궁금증을 안고 지내왔는데
무무문이라면 무슨 뜻일까?
없고 없는(無無) 문이란 뜻일까?
아니면 없는 문(無門)은 없다는 뜻일까?
문이 없으니 그냥 들어가라는 뜻일까?
들어가 봐야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맑고 깨끗해 때 없는 청정무구로 들어가는 곳이란 뜻일까?
그도 아니면 망념(妄念)을 없앤 깨끗한 마음 상태로 드는 곳이란 뜻일까?
생각이 미치지 못한 나그네는 문을 넘어 조금씩 다가가보기로 했다.
맑고 깨끗하면 청정(淸淨)하다 한다.
마음을 닦고 닦고 닦거나
버리고 버리고 버리면 청정하다 한다.
얼마나 닦고 버리면 마음이 청정해질까?
하나를 열로 나누어 그 중 아홉을 버리면 분(分)이 된다.
분(分)을 다시 열로 나누어 그 중 아홉을 버리면 이(厘)가 된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나누고 버리면
모, 사(沙), 홀, 미, 섬, 사(絲), 진, 애, 묘, 막으로 점점 작아진다.
막을 열로 나누어 그 중 아홉을 버리면 모호가 되고
모호를 열로 나누어 그 중 아홉을 버리면 준순이 되는데
이렇게 순차적으로 또 나누고 버리면 수유, 순식, 탄지에 이른다.
탄지를 열로 나누고 그 중 아홉을 버리면 찰나가 되고
찰나를 열로 나누고 그 중 아홉을 버리면 육덕이 되는데
육덕을 열로 나누고 그 중 아홉을 버리면 그제야 허공(虛空)이 되며
허공을 열로 나누고 그 중 아홉을 버려야 비로소 청정(淸淨)이 된다.
서양에선 열을 얻으면 하나의 물질을 내놓으라 한다.
(십일조)
허나 동양에선 차라리 아홉의 마음을 내놓으라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동도서기(東道西器)인 게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도처에선 불꽃 튀는 싸움을 하고 있으니
매일 쏟아지는 미세먼지 예보가 그럴만하다 하겠다.
돌아오는 길에 영화관에 들려 <서서평>을 감상했다.
조선 말 서양에서 들어온 간호사 셰핑의 선교활동 일대기였다.
깨우쳤으면 저잣거리에 나와 이웃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입전수수(立廛垂手)가 그에 다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Not success But service" (셰핑의 좌우명)
(2017년 석탄일에)
* * * * *
6 년의 세월이 흘러 불기 2567년 부처님 오신 날도 지났다.
셰핑은 “삶이란 성공이 아니라 봉사” 라 했지만
나는 성공을 이룬 것도 봉사의 삶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혼란하다.
지구촌도, 국내사정도 마찬가지인데
싸움 때문이 아닌가.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은 기리지만
그 의미는 과연 무얼까?
나는 그걸 궁구하며 고답적인 논리만 찾아왔다.
그러나 이젠 싸움을 말자는 데에 방점을 두고 싶다.
비교적 초기의 경전인 金剛經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록이다.
부처님은 10 제자 중 수보리를 제일로 생각했다는데
수보리는 아주 말썽꾸러기였으나 뒤에는 마음을 고쳐
싸우는 일이 없었다 한다.
하여 그를 무쟁삼매(無諍三昧)라 한다.
신라의 고승 화엄이라면 그의 和諍論이 유명한데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이끌자는 것으로
국내외를 통틀어 華嚴經을 풀이한 독보적 불교교리다.
불교의 목적은 흔히 깨달음에 있다 한다.
깨달음의 전제는 어떤 모르는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 문제의식이란게 生老病死에 대한 불안과 고통이요
그 고통을 여의는 방법을 알아차리자는 것일 게다.
그런데 태어나는 걸 어찌 할까?
늙는 걸, 병드는 걸 어찌 할까?
죽는 걸 어찌 할까?
뾰족한 처방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요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연습이나 할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게 제일이 아닌가싶다.
혼자 살 수는 없는 고로.
오온개고니, 청정심이니, 일체유심조니, 집착이나 분별을 말자느니
12 연기니,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라느니
그런 것 말고 싸우지나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
길가의 돌멩이에도 佛性이 있다던데
그건 아마도 서로 분별하거나 싸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첫댓글 귀한 글, 잘 읽고 생각하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들 되십시오~
네에 고맙습니다.^^
난석선배님
선배님 글은 항상 무언가
느끼게하는 묘한 색깔이 있다.
그 색깔에 오늘 아침
나는 향수를 뿌리고 싶다
서로 싸우지나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깨달음
한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맞아요
평화 화평이 제일 좋아요.
이런 것 저런 것 말고 싸우지는 말씀에 공감하며
淸淨이 탄생된 유래를 보며 이 귀한 글자를 맥없이 쓴 나의 허물을
아무리 모르고 썼다한들.
불교에 대한 門外漢으로 귀한글을 접하고 갑니다.
그건 추상적인 말이겠지요.
그만큼 어렵다는 뜻의.
참 좋은글 읽으며 잠시나마 마음이 청정해진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
고마워요.
난석님의 글을 읽으면
저절로 글 속으로 빠져 버린답니다
오늘도 좋은 글에 머물다 갑니다
건강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아이구우 그런가요?
한집 살림 했으면 좋으련만요.
초파일만 등을다니
종교 물으면 대답을 못 한답니다
자비로움으로
아웅다웅 하지말고
서로 배려하며 살면 좋을텐데 ..내마음부터 정화 해 봅니다
맞아요
자비란 싸우지 말라는 함의가 있지요.
난석님~
부처님 오신날 연등 행렬이 있었나요.
몇년전 저는 종로에서 보았습니다.
자비롭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네에 자비로운이면 다 되지요.
올려주신 고귀한글 잘 읽고갑니다.
장서 올리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불가의 사상은 자비에 두고 있으며
카톨릭 과 개신교의 가르침은 사랑이라 할 수 있는데
모두다 자비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자비로움과 사랑이 있다면 논쟁이 필요 없는 것이겠지요
선배님이의 글을 읽으며 또 다른 깨우침을 얻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머물다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네에, 자비와 사랑 맞지요.
그런 정신으로 살면 자연 싸움도 생기지 않을 테고요.
서서평 선교사 영화 어디서 보셨는지
영화관 알려주세요.
저도 관심있습니다.
아이구우 벌써 6년 전 이야기네요.
석탄일에 목정굴 다녀오다가 영화관에 들려 봤는데
지금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ㅠㅠ
@난석 아, 6년전 글이군요.
저는 어제 쓴 글인줄 착각했습니다.
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명 전반은 6년 전
후반은 현재입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