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국지 [列國誌] 676
■ 2부 장강의 영웅들 (332)
제10권 오월춘추
제 41장 춘추(春秋), 덧없는 사라짐이여 (8)
월왕 구천(句踐)은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 패업을 달성하는 데 공로가 큰 신하들에게
일절 상을 내리지 않았다.- 내가 부차의 똥을 먹고 있을 때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자신의 공만 내세웠다.차츰 대신들의 모습이 조정에서 하나둘씩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계예(計倪)는 일부러 미친 사람 흉내를 내어 조정에서 쫓겨났고, 예용(曳庸)도 늙었음을
핑계삼아 벼슬을 내려놓았다.
옛 신하들이 한명 한명 사라질 때마다 문종(文種)은 범려의 서신을 떠올리곤 했다.
-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는 사람.
마침내 문종도 병들었다 핑계하고 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정치 세계에서는 정적(政敵)이 있게 마련이다.
월나라 조정에도 문종(文種)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문종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월왕 구천을 찾아가 말하곤 했다.
"문종(文種)이 궁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왕께서 그에게 상을 내리지 않아 불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반(謀反)에 대비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문종이 그럴 리 있겠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문종을 의심하는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던 중 월왕 구천(句踐)이 노나라를 방문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는 자기가 없는 틈을 타 문종이 반역을 일으킬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그는 노(魯)나라로 떠나기 전 문병을 핑계로 문종의 집을 찾았다.
문종(文種)은 일부러 아픈 시늉을 하며 구천을 맞아들였다.구천(句踐)이 자리에 앉아 물었다.
"과인이 듣기에 뜻있는 선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만
근심한다고 하였소. 일찍이 그대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일곱 가지 계책을 내세웠소."
"과인은 그 중 여섯 가지 계책을 씀으로써 오(吳)나라를 무찔렀소. 이제 남은 계책은 하나이오.
지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난(亂)을 일으키게 하자는 것이 바로 그것이오.
그대는 이 계책을 어디다 쓸 생각이오?"문종(文種)은 구천의 말뜻을 몰라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오나라는 이미 멸망했습니다. 신(臣)은 그 계책을 쓸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르쳐주겠소. 바라건대 그대는 부차에게 가 그 계책을 써주시오."
말을 마치자 구천(句踐)은 자리에서 일어나 궁으로 돌아갔다.
문종(文種)이 문 밖까지 나가 전송하고 돌아오자 구천이 앉아 있던 자리에 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문종은 그 칼을 들어 살폈다.칼집에 두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촉루(屬鏤).
지난날 오왕 부차가 오자서에게 내린 바 있던 바로 그 칼이었다.
그제야 문종(文種)은 구천(句踐)이 자신의 집으로 행차한 이유를 깨달았다.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했다."아아, 나는 참 어리석구나. 내 진작 범려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 이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그러다가 불현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문종(文種)은 텅 빈 방안을 돌아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1백년 후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나와 오자서를 충신이라고 할 것이다. 내 어찌 탄식만 할 것인가."
문종을 칼을 뽑아 입에 물고 엎어졌다.월왕 구천(句踐)은 문종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그의 생전의 공을 인정하여 와룡산(臥龍山)에 장사 지내주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산을 '종산(種山)'이라고 고쳐 불렀다.문종(文種)이 묻힌 산이라는 뜻이다.
문종이 와룡산에 묻힌 지 1년이 지났다.어느 날, 큰 해일(海溢)이 일어 와룡산 일대를 휩쓸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난리를 피해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별안간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기를 보아라."와룡산 골짜기를 덮친 바닷물이 세찬 물결을 일으키며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문득 오자서(伍子胥)와 문종(文種)이 앞뒤로 그 파도를 타고 바다 쪽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오늘날도 전당강(錢塘江)에 조수가 밀려들 때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 앞의 물결은 오자서요, 뒤따라가는 물결은 문종이다.
뒷 이야기 하나.
한밤중에 몰래 회계성을 떠나온 범려(范蠡)는 아무런 미련 없이 배를 타고 태호(太湖)를 빠져나와
바닷길을 통해 제(齊)나라에 도착했다.그가 당도한 땅은 산둥 반도 해변의 어느 작은 마을이었다.
풍광이 아름다웠다.- 이곳 에서 농부가 되어 살리라!
그는 과거의 신분을 숨기려고 성과 이름을 모두 바꾸었다.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 불렀다.치이란 말가죽으로 만든 술부대다.
지난날 부차(夫差)는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 부대에 담아 강물 속에 던졌는데.
자신의 처지가 오자서와 같다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농사를 지으며 해변가에 정착했다.그는 경륜이 밝고 지식이 풍부하여
농사일에도 여간 밝지 않았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비옥한 농토로 만들었으며 토질에
알맞은 곡물을 심어 해마다 생산물을 늘렸다.또한 나라를 다스리듯 그 수확물을 잘 관리하여
수년이 지나지 않아 범려(范蠡)는 일약 수십만 금(金)의 거부가 되었다.
어느덧 그의 이름은 제(齊)나라 일대에 널리 알려졌다.
- 동해 바닷가에 '치이자피'라는 신선 같은 사람이 나타나 수십만 묘(畒)의 농토를 일구었다.
어느 때인가 제나라 군주인 제평공(齊平公)이 그 명성을 듣고 친히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다.
- 그대는 그대의 현명함으로 우리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주시오.
범려(范蠡)는 임치로 올라가 제(齊)나라 재상자리에 올랐다.
3년 동안 제나라 백성들에게 개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원래 그의 마음은 정치나 벼슬에 있지 않았다.그는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 농사를 지어서는 천금의 재산을 이루고 벼슬에 있어서는 상국(相國, 재상)에 달했으니,
이는 사람으로 태어나 정점(頂點)에 다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름지기 정점이란 위험하다. 환란이 닥치기 전에 이 곳을 떠나자.
범려(范蠡)는 아무런 미련 없이 재상직을 사퇴했다.수십만 금(金)의 재산도 아낌없이 풀어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고는 어느 날 밤 홀연 임치성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번에 범려(范蠡)는 도(陶)라는 땅으로 갔다.도(陶)는 지금의 산둥성 정도현 서북쪽 땅으로
송(宋)나라와 제(齊)나라 국경 근처였다. 물품이 쌀 때는 사들이고 물품이 부족하기를
기다렸다가는 일제히 내다 팔았다.매번 1할의 이윤을 남겼고, 오래지 않아 그의 재산은
또 수천만 금(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또 한 번 명성을 황하 일대에 떨쳤다.
언제부터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범려(范蠡)는 돈을 버는 일에도 능했지만 쓰는 방법도 잘 알고있었다.
677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677
■ 2부 장강의 영웅들 (333)
제10권 오월춘추
제 41장 춘추(春秋), 덧없는 사라짐이여 (9)
어느 해의 일이었다.범려(范蠡)의 둘째 아들이 여행을 하다가 사람을 죽여 초(楚)나라에 갇혔다.
그 소식을 들은 범려(范蠡)는 아들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살인을 했으면 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재력가의 아들이 사형당하면 그또한 수치가 아니겠는가.
그러고는 이제 막 청년이 된 막내아들에게 황금 1천 일(鎰)을 내주며 초(楚)나라에 다녀오게 하였다.
뇌물로써 아들을 살리려고 한 것이었다.그때 큰 아들이 막내 앞을 가로막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 이 집에서 장남은 저입니다. 동생이 죄를 지어 죽게 되었는데 아버님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보내지 않고 막내를 보내십니까? 제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차라리 죽겠습니다.
칼을 빼어들고 큰 아들이 죽으려 하자 어머니가 나서서 큰 아들 편을 들어주었다.
- 이 아이의 말이 옳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둘째 아들을 구하기도 전에 큰 아들부터 잃을 판입니다.
당신은 막내 대신 이 아이를 보내십시오.범려(范蠡)는 망서리다가 하는 수 없이 장남이
갈 것을 허락했다.편지 한 통을 써서 큰 아들에게 내주며 말했다.
- 초(楚)나라에 가면 나와 절친한 친구인 장(莊)선생이란 분이 있다. 너는 장 선생을 찾아가
이 황금을 건네주되 무조건 그분이 하는 대로 따르라. 절대로 그가 하는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이윽고 큰 아들은 초(楚)나라에 당도했다.장(莊) 선생의 집을 찾아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집이 몹시 작고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심 이런 사람이 어떻게 동생을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분부도 있고 해서 아무 소리 않고 편지와 황금 1천 일(鎰)을 장(莊) 선생에게
내주었다.장(莊) 선생이 말했다.- 너는 임무를 다했다. 나머지는 내게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라.
절대로 이 곳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또 동생이 살아나오거든 그 까닭도 묻지 마라.
장남은 장(莊) 선생의 집을 나왔다.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도성을 떠나는 척하면서 성안에 남아 따로이 초(楚)나라의 실력자를 수소문했다.
장(莊) 선생은 빈민촌에 살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은 덕망 높은 은둔 현자(賢者)였다.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나 초혜왕까지도 그를 스승처럼 존경할 정도였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범려(范蠡)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황금을 보내왔으나 그것을 이용하여
구명운동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친구 아들을 구하면 그 황금을 도로 돌려줄 작정이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이것은 범려의 돈이오.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되오.
며칠 후 장(莊) 선생은 궁으로 들어갔다.초혜왕(楚惠王)을 알현한 후 말했다.
- 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조만간 나라에 불길함이 닥칠 것 같습니다.
초혜왕은 현자로 소문난 장(莊) 선생의 이 같은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어떻게 하면 좋소?- 덕을 베푸십시오. 그러면 화(禍)를 미연에 막을 수 있습니다.
- 어떤 덕(德)을 베푸는 것이 좋겠소?- 죄인들을 사면하면 백성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다음날이었다.초혜왕(楚惠王)은 형벌을 다스리는 대사구를 불러 명했다.
- 궁 안에 있는 창고를 모두 걸어 잠그라.그 무렵, 범려의 큰 아들은 초나라 우윤을 소개받아
제 나름대로 동생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우윤(右尹)이라면 서열 세 번째에 해당하는 높은 벼슬이었다.
장남은 우윤에게 뇌물을 바치고 동생을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윤(右尹)이 큰 아들에게 말했다.- 자네는 걱정하지 말게.
조만간 왕께서 대사면을 행할 것이니 그대 동생 또한 풀려날 것이 아니겠는가?
큰 아들이 물었다.- 대사면(大赦免)이 있을 것을 어찌 아십니까?
- 우리 왕께서는 대사면령을 내릴 때면 언제나 궁중의 창고를 닫아거시네.
뇌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지.
우윤의 말을 들은 큰 아들은 장(莊) 선생에게 건네준 황금이 무척 아까워졌다.
'대사면령에 의해 동생이 풀려날 것인데, 장 선생이라는 사람은 힘 하나 안 들이고 1천 일(鎰)의
황금을 챙겨 넣었구나.'그는 다시 장(莊) 선생의 집을 찾아갔다.
장 선생이 깜짝 놀라는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아직 이 곳을 떠나지 않았는가?
- 그렇습니다. 제가 알아보니 이번에 대사면령(大赦免令)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조만간 동생은 풀려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직 인사를 올리러 왔습니다.
장(莊) 선생은 대번에 그가 황금을 찾으러 온 것임을 알아챘다.
- 그렇지 않아도 그것을 돌려주려 했었네. 어서 가지고 가게.
큰 아들은 기쁜 표정으로 황금을 돌려받고는 그 집을 나와 대사면령을 기다렸다.
장(莊) 선생은 범려의 아들에게 배신당한 것이 몹시 불쾌했다.
다시 입궐하여 초혜왕을 찾아뵙고 말했다.
- 신이 지난번에 천상(天象)을 말한 것은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신(臣)이 밖에서 우연히 들으니 도(陶) 땅의 부자인 도주공(陶朱公)의 아들이
살인하여 갇혔는데, 그 집에서 황금으로 우리 대신을 매수했다고 합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의 대사면령(大赦免令)이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주공의 아들을 위해서라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초혜왕(楚惠王)은 크게 분노했다.
- 내가 아무리 부덕하다 하더라도 어찌 도주공(陶朱公)의 아들을 위해 대사면령을 내릴 것인가!
그러고는 즉시 재판을 열어 범려의 둘째 아들을 사형에 처하고,
그 이튿날에야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반포했다.
이에 범려의 큰아들은 산 동생이 아니라 죽은 동생의 시체를 갖고 귀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죽은 둘째 아들의 시체를 본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매우 슬퍼했다.
그러나 범려(范蠡)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 나는 큰 아이가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할 줄 알았다. 그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지 그는 돈을 쓸 줄 몰랐기 때문이다.
- 큰 아이는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고생을 했다. 그래서 함부로 돈을 쓰지 못한다.
반면, 막내는 내가 부유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좋은 말과 좋은 수레만
타고 다녔다. 돈이 어떻게 해야 벌리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 그러므로 그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내가 이번에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큰 아이는 그렇게 하지 못해 결국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치가 이러하거늘
슬퍼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사마천(司馬遷)은 이러한 범려의 행적을 높이 평가했다.
<사기>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편에서 범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범려는 세 번이나 옮기고도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단지 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멈추는 곳에서는 반드시 명성을 날렸다.
또 <화식열전(貨殖列傳)> 편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19년간 세 차례에 걸쳐 천금(千金)의 재산을 모았는데, 두 번은 가난한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이것이 이른바 '군자는 부유하면 덕(德)을 즐긴다' 라는 것이다.
말년에 그는 자손들에게 일을 맡겼는데, 자손들은 이를 잘 관리하고 다스리어 재산이
수만 금(金)에 이르렀다,이리하여 도주공(陶朱公)은 곧 부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한편, 월왕 구천(句踐)은 그 후 3년을 더 살다가 재위 27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BC 469년의 일이었다.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흥망은 마치 대낮에 꾼 짧은 한 토막의 꿈과 같다.
홀연 나타났다가 홀연 사라졌다.그러기에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고, 2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뇌리(腦裏)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핏 중국 대륙의 한 귀퉁이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처럼 보이지만, 기실 이것은 '춘추(春秋)'라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전국(戰國)'이라는 또 다른 시대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 그동안 1부 344편, 2부 333편 합계 677편이 연재되었군요.
다음은 총 13권중 제 11권 <또 다른 난세> 로 3부가 이어집니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