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기술에 대해선 이론적 성격을 강조하고 수학에 대해선 실용적 성격을 강조하는 물리학을 연상케 하는 군요.
철학이건 과학이건, 전공분야의 아성안에 갖히지 말고 서로에 대한 대담한 분석을 용인하고 3자에게도 대화의 문을 여는 태도가 절실하다고 봅니다. 특히나 사학은 가장 오랜 학문으로서 인간 사유의 좋은 영감의 원천이 되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역사학도들(양자역학의 루이 드 브로이, 광량자 및 전하 검증의 밀리컨 그리고 현재 물리학계의 교황이라고까지 불리우는 위튼)이 물리학에 있어서도 크게 공헌해왔습니다.
먼저 레비 스트로스의 저서를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그의 유명한 저서 "슬픈 열대"가 서구 지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의 맥락은 파악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근대에 대한 비판속에서 탄생하여 철저한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현대 인류학의 방법론과 그 연구에 의한 관점은 철학이나 인문학에 대해 상당히 '인간적'인 접근 태도를 불어넣었습니다. 하지만 냉철히 말해 저는 이것이 철학과 인문학에 상당한 손실을 가져왔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두번째로,
[음...그리고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는 단순히 사람 사이의(사회적?) 약속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는 없는 무엇이며 분명히 실재론의 의심도 최근에 와서는 의심할 바 없는 <실재론>의 바탕 위에 공고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에 대해..
이는, 창재님과 현주님의 대화속에서 창재님이 혹시 '진리'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시는게 아닌가(제가 보기에는 상당수 인문학도들께서 그러하시다고 느껴왔기에)하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학이나 물리학도 이러한 믿음이 어디에 근거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고작 소박하디 소박한 대답밖에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한다면.. 자연과학의 많은 연구와 탐구가 멈추게 될것입니다.
[------------------> 일단 또 질문!
여기서 님이 <실재론>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이것은 데카르트적 회의의 자연적태도-사물이 우리 자신들과는 관계없이 외부세계에 존재한다는, 그리고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은 일반적으로 믿을 만하다는 보통사람들의 상식적인 신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칸트가 근대과학에서 영감을 받고, 그 과학에 대한 인식과 인간에 대한 인식의 토대를 만들고자 했던 <선험적 이성>과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입니까?]
전자와 후자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사실 과학이 데카르트로부터 받은 영향은 오로지 "방법론적 회의주의" 단 하나에 국한됩니다. 그의 보다 심오한 철학사상들이 동일한 맥락속에서 과학속에 녹아 있다는 것은 제가 보기엔 다소 오해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떠나 거기에 존재하는 진리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많은 과학의 대가들이 평생에 걸쳐 얻은 그리고 지키려하는 귀결임을 그들의 발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위의 두가지라면, 이미 철학에 의해 그리고 과학에 의해 부정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칸트의 선험적 이성이란 것에 대한 범주설정은 절대적인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뉴튼 물리학의 기반위에서 가능했었죠?
그런데, 상대성이론에 의해 이미 절대적인 시공간 자체가 부정된 마당에....절대적 시공간이란 지반위에서 가능했던 이성의 실재성역시 물건너 간 일 아닌가요? ]
이것은 "오해"라고 생각됩니다. '선험적 이성'은 제가 보기엔 아직 긍정도 부정도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칸트 이후의 철학가들이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숙고를 게을리 한 나머지 망각해 온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정언명제"에 기초한 윤리관은 독일사회에 체택되어 독일은 오늘날 가장 사회질서가 잘 자리잡힌 모범적 조직이 되었습니다.) 칸트의 선험적 이성이 상대론에 의해 깨어졌다는 시각 역시 다소 어폐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절대시공간의 개념이 칸트에게 영향을 준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시간과 공간)이 상대성이론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해서 칸트의 철학마저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지만 상대성이론은 뉴턴역학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보다 일반적인(극단적인) 경우에서도 적용되도록 '일반화'시킨것일 뿐이며 "선형성","절대성"등은 고도화된 현대 자연과학에서도 여전히 과학적 사유의 기둥역할을 하는 중요한 무엇입니다.(심지어 카오스 과학조차 사실은 강한 절대-선형주의적 신념에 기초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실재론이란 것은 님께서 뒤에서 언급하고 있는 <도구적 공준설정>이란 것과 오히려 더 관련이 있을 듯 싶은데요. ]
애석하게도 저의 맥락속에서 그 둘은 서로 별로 연관이 없습니다. 저의 실재론은 그저 "소박한 실재론"입니다. 하긴 이러한 소박함은 자연히 도구적 공준설정을 자연스럽게 하겠군요.
[그리고 님은 "죽어도 실재론자들인 물리학도들은 다소 그에 대해 확신이 덜했던 수학도들을 확실히 포섭하며 예전의 확신에 찬 태도를 내부적으로 강화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제가 가진 과학적 상식으론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
어떤.. 상식에 의해 그렇게 생각하시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님이 뒤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판적 합리주의자 포퍼는 오히려 과학이란 것이 가능한 조건, 어떤 합리적인 학문의 가능성을 예전의 확신성을 찾는 것에서가 아니라 "반증이 불가능한 것"-즉 환원론과 실재론은 과학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과학과 비과학을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
물론 환원론과 실재론 자체가 과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과학의 '현상'을 논하기 위해 약속한 어떤 용어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반증가능성에 따른 과학의 분류"는 포퍼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는 무엇이라기보다 그가 살았던 단계에서 철학에게 과학의 어떤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 주장한 과도적 이론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믿는 것은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실재가 결코 아니죠. 그는 새롭게 벌어진 구체적인 현상을 과학이론이 설명가능하냐에 따라 일단 어떤 과학이론을 잠정적으로 신뢰할 뿐이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적 이론들은 흔히 실험에 의해 전복되며 이론의 전복에 의하여 과학은 발전한다는 것을 과학사는 보여준다, 과학은 순환논리적(환원론)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다".....]
마지막에 인용하신 포퍼의 발언은 사실 전후맥락을 몰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사실 포퍼는 통상의 자연과학자보다 더 강한 실재론의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과학적 이론의 전개패턴에 대한 그의 발언에 있어서 님은 그가 말하고자 한 좀더 깊은 의미를 놓치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현대 과학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s.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의 발전이 결코 어떤 연속된 지식의 축적을 통한 실재와 진리에 접근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전제들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전제에 입각한 과학이 이질적인 전제에 입각하고 있는 전단계의 과학체계를 흡수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란 이 과학의 실재론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저작아닌지요? ]
먼저 쿤에 대해..
대부분의 수학, 물리학도들은 쿤을 거의 인정치 않는다는 것이 저의 경험상의 결론입니다. 그의 납득하기 어려운 이론이 비자연과학의 분과에서 마치 자연과학의 인정을 받은 것처럼 오해되는 것을 볼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일상용어로서의 "패러다임"이란 개념의 창안은 그의 업적이겠습니다만 그 투박한 틀로 물리학마저 설명하려 한것은 완전히 오류였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갈릴레오 이후의 물리학과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는 말에 모든 물리학도들은 비웃고 말겁니다.)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사실은 아주 강한 실재론을 강요하는 원리입니다. 상식을 넘을 만큼 심오하고 기묘한 자연 자체의 자명한 질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물리학도들은 아직도 이에 크게 당황해하고 있습니다.(앞으로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역시 (그 자체의 전체속에서의 의미에 대해) 오해를 씻어야 할 무엇입니다.
[님께서는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시는 군요
"철학이 아직도 배우지 못한 그러나 자연과학에 있어서는 뿌리와 같은 무엇이 바로 <도구적 공준설정>입니다."
===>포퍼는 사회과학의 언어가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기준들(첨예한 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아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회과학들은 아직은 <이데올로기 총체>이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사회과학자들은 공동의 언어를 사용할 능력도 없으며, 때로는 그럴 의사도 없다. 그러나 그러는 까닭은 계급적 이해 때문이다. 또한 그 치료 역시 헤겔적인 변증법적 종합도 아니며, 자기분석도 아니다. 이제 사회과학이 가야할 길은 재치있는 말장난을 내던지고, 모든 과학에 근본적으로 공통된 이론적 방법의 지원을 받아 우리 시대가 당면한 실천적 문제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길이다. 내가 말하는 방법은 시행착오의 방법이며, 가설을 만들어 그것을 실제적 시험에 회부해 보는 방법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결과를 점진적 사회공학에 의해 확증할 수 있는 사회기술이다."
이 노학자의 충심에 어린 걱정과 사려깊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매우 근대적인 학문구분이긴 합니다만, 결정적으로 과학이 우리 외부에 있는 사물을 다룬다면, 사실 사회과학이나 철학, 인문학은 우리들 자신의 가치의 문제를 다루죠. ]
옳습니다. 가치를 다루는 것은 매우 필요하며 오히려 오늘날 생명공학(서구의 분자, 유전 생물학자들은 제가 보기엔 다소 대책없는 과학주의자요 환원주의자들입니다.)등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직접적 위해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사례등에서 볼때 오히려 시급한 무엇입니다. 제가 철학이 "배워야 한다"는 표현을 쓴것은, 자연과학도로서 다소 오만한 표현으로 들릴 수 있는 다소 무례한 용어의 선택입니다만 사실은 인문학, 철학을 깊이 사랑하는 애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회학에 대해서는 살펴보건데 포퍼에 영향 받은 많은 경제학도들이 자연과학을 적극 받아들여 오늘날 엄청난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뿌리는 같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회과학가 큰 대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둘사이의 차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사물을 다루는데 사람들의 언어가 공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공감합니다만...그런데 인문학에서 이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객관성을 위해서 언어를 제약한다고 가정해보죠.
그런데 이 객관적인 언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누가 되어야 하죠?
서로의 합리적인 그리고 사심없는 타협아래에서요?
결국 이 합리적이고, 도구적인 언어(객관성!)이란...당시의 힘센자의 비합리적인 주관성아래에서 결정되겠죠.
조지오웰의 소설 <1984>가 생각나는군요. 혹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그것은 너무 안이한 포기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이 "담론"에 상당부분 의지해야 한다면 상호의사소통이라는 문제는 거의 격률에 가까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제된 지성인들(저는 이곳의 분들이 충분히 그럴만한 자질이 있다고 믿는데)의 커뮤니티속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에 어떤 권력따위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 필요이상의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때로는 담대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냉혹히 신중의 가지를 쳐버리는..
[결국, "도구적 공준설정"이란 철학이나 인문학이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배울 수도 없고, 배워서도 안되는 것이기에 배우지 않은 것 뿐이겠죠. ]
이건 제가 잘 사정을 몰라서 하는 말인데, 왜 그렇습니까? 이 상황에 변화가 없는 한 제가 보기엔 인문학은 사회로부터 더욱더 유리되고 말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인문학이 꼭 존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곳이 번성하는 것은 많은 분들이 그러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는 좋은 증거이기도 합니다. 기성의 인문학자들은 학문적 귀족주의속에서 고상한 척하고 있을때가 아닙니다. 배는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리고 님의 말씀을 계속 인용하겠습니다.
"어쨌건, 이러한 조류에서 벗어난 일부 철학과 인문학도분들께서 계속 선을 넘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서 안주할 경우 곧 통일이론을 완성하고 그 방법론의 강력함을 무기로 세력을 확장할 물리학도들에게 참혹히 재단되고야 마는 일이 닥칠 것입니다."
=====> 누구도 안주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공간은 무슨 인류에 대해 고심하는 대단한 철학자들이 있는 공간도 아닙니다.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서 그 자체에서 견딜만큼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얼마 안될 걸요? 그리고 이 상대적임과 회의란 것 역시 역설적인 말이지만, "상대적인 보편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겠지요.
그리고 이런 상대적이고, 회의적인 문제들은 피해야 하기보단 오히려 더 첨예하고 구체적으로, 더욱 깊이있게 토론되고 다투어 보아야 할 것들 아닐까요....근대 이후 역사적인 주류는 모두 절대론에 가깝죠.
자본주의적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사회주의적 이념맹신.
지금은 오히려 극악한 상대주의와 회의로 "가치없는 진리와 과학"은 거부해야만 할 때입니다.]
님의 말씀속에서 이미 그러한 상대주의적 사유가 끼친 어떤 해악을 봅니다만, 일단 님이 생각하시는 "가치없는 진리와 과학"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혹시 "가치없는 진리"는 맑시즘이고 "과학"은 핵병기인가요?
["물리학은 언제나 가장 모범적인 자연과학이었으며 그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약화되지 않습니다."
======>글쎄요...? 근대에 국한시켜야 겠죠. 물론 물리학이 우리에게 주는 유용성이나 진리들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과학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이고, 그것이 주관적인 가치들을 가진 사람들에 이용되는 수단이라면....역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따라 약화되어야 할 필요도 있겠죠. 약화될 수 도 있을테고요. ]
물리학의 지위와 지침으로서의 강력함은 근대에 국한된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인문학과 철학에 있어 별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왔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어느 정도는 프랑스 과학철학계를, 물리학에 주목했던 바슐라르의 뒤를 이어 의학, 생물학에 주목한 깡길렘등이 이어 받은 영향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어쩌죠.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적어도 자연과학과 공학의 위계구조속에서 물리학은 전혀 변함없이 그것을 지탱하는 축의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이공학에서조차 부정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현대 물리학이 전기, 전자, 통신, 재료공학등으로 파생학문을 형성시키면서 상당부분이 기술적 색체를 띰과 함께 여전히 "물리학"이라 불리우는 것은 상대적으로 위축된 것처럼 보인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실학이 뿌리내릴 수 없게 한 그 무엇이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속에 폭넓게 자리하고 있는 때문이죠.
과학이 역사가 원하는 바에 따라 약화되어야 할 필요도 있고 또 그럴 수 있으리란 말씀은.. 일단 과학과 과학자는 분리되어 생각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은 물론 더 오랜 역사를 가진 기술에 대해서 비교적 신생의 체계요 조직이고 사상이며 활동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과학이 어느 순간 사회 또는 역사에 의해 통제되는 일은 없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건데 이것은 애석히도 그래왔습니다. 과학에 대한 신뢰가 고조되는 분위기속에서는 어김없이 "인간의 모습을 한 과학기술"이 주장되었고 그후에는 반드시 기초과학이 위축되어 진정한 과학마인드는 확산되지 않는 패턴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노벨상 출신의 화학자 리웬져가 나라의 어른이자 최고지성으로서 대만에 실용적, 합리적인 기풍을 불어넣어 결과적으로 IMF도 비껴가도록 한데 비해 우리나라가 그렇지 못한데는 아직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치 못한 과학도들의 불찰도 없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에는, 기초과학도로서 살려면 거의 미국을 향해야만 하는 어떤 맞지 않는 정서적 토양도 있었다고 변호합니다. 저는 이것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어쨌건 우리나라와 같은 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과학을 지탱하는 모국가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문학도 출신의 펀드 매니저, 애널리스트들이 IT가 위주인 나스닥 장세에 제동을 걸었지만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단죄한 빌 게이츠를 오히려 보호하고 있습니다. "revenge fo nerd"(얼간이들의 복수)라고 불리웠던 지난 시기동안의 과학도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최근의 제동은 어쩌면 과학도들이 본격적으로 통화경제마저 장악하게 하는 동기가 될것으로 예측합니다.(어느 순간.. 다가와 있을것입니다.)
[흠....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을 말씀하시는 군요.
후기의 비트겐슈타인같은 경우 진리에 대해 "진리란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도대체 비트겐슈타인과 포퍼가 어떻게 자연과학의 우월함과 정당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되는 군요. ]
저는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이론만을 받아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그는 분명히 모든 진리가 자연과학적 진리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기회가 닿으면 논하고 싶은 "자연"에 대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근본적인 차이, 바로 전체론적 본질적 접근과, 점진적인 현상론적 접근의 차이라는 문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님께서 쓰신 글을 조각조각 나누어서 질문을 제기하고, 저 나름대로 제 생각을 말해보았습니다만....님이 이글에서 전체적으로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무엇인지요?
제가 오해를 하는 것 싶어서 다시 묻게 되는 것입니다. ]
제가 전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 그것은 위에서 그리고 지난 글에서 거의 언급되었다고 봅니다만 굳이 몇가지로 나누어 정리하자면
0. 인문학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강화
1. (도구적인) 공준의 설정과 용인
2. 소박한 실재론의 재인식
3. 현상론적인 접근에 대한 재조명
4. 자연과학에 있어서 물리학의 특수한 성격에 대한 재인식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논의와 반론을 환영합니다. 긴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ps. 마지막 말씀은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에 대해 크게 오해하신 점은 없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