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문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꼭 써야 할까?
김연종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꼭 써야 하나요?”
진료실에서 가끔 듣는 질문이다. 주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연로한 어르신들이다. 나는 진심을 담아 간곡하게 말씀드린다.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어르신이 다시 묻는다.
“원장님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셨나요?”
“아, 그게….”
나는 잠시 주춤한다. 게으른 탓에 등록을 미루고 있지만, 이미 오래전 ‘연명치료 중단을 ’하는 마음의 사전 의료 의향서를 작성한 바 있다.
나는 죽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목숨을 담보로/삶의 고통을 덜어내고자 함도 아니다/그저 마지막 길을 당당하게 걷고자 함이다/이제 모니터로는 남은 생을 기록할 수 없으니/내 몸에 부착된 고통의 계기판을 제거하고/가장 편안한 단추의 상복을 부탁한다
…(중략)…
일체의 심폐소생술 또한 거부한다/사유의 파동이 사라진 육신의 신호음은/한낱 기계적 박동일 뿐이니/에피네피린과 도파민의 사용을 원치 않는다/기계의 호흡과 심박동은 이미 어긋났으니/심장마사지는 사양한다/썩은 육신을 인수해 갈 가족과/상한 영혼을 거두어 갈 과 조우의 시간, /내 죗값을 흥정하는 비굴한 모습을 원치 않으니/침대 주변을 말끔히 정리해 주기 부탁한다/이제 종언을 하노니,/여태껏 밀린 치료비와 남은 죗값은/저당 잡힌 내 생의 이력서에 함께 청구해주기 바란다
- 「연명치료 중단을 함」 부분
인간의 삶이, 그 하루하루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남은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군다나 연명치료에 의존하여 목숨을 유지한다면. 어르신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노화와 병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았다. 생로병사의 모든 면을 직면하게 되면서 삶과 죽음뿐 아니라 연명치료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깊어졌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는 존엄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픈 소망이 담겨있지만, 혹시 조금 더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데 서둘러 목숨을 앞당기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와 두려움은 안락사와 존엄사의 개념에 대한 혼용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안락사는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시키는 모든 의료 행위를 일컫는다. 직접 약물을 주입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가 있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인 기본적인 영양분, 물, 산소 등의 공급을 중단함으로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 모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존엄사에 대해서만 논하기로 한다.
존엄사의 사전적 의미는 ‘불치의 병이나 장애로 인해 의식 불명이나 심한 고통 상태에 있는 환자에 대하여 연명만을 목적으로 하는 치료를 중지하고 인간으로서의 명예를 유지하면서 죽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견해’이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부착,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 연명치료를 위한 의료 행위를 중단한다. 네 가지 의료 행위를 중단함으로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며 사망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도 통증을 완화해 주는 치료와 기본적인 영양분, 물, 산소 등은 계속 공급해야 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다. 약칭 ‘연명의료결정법’(2016)으로 제2조 9항에 이 문서에 대한 정의가 법제화되어 있다. 이 문서는 19세 이상의 성인으로서, 본인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법에 정한 의료기관, 보건소, 보건의료원, 보건지소 및 건강생활지원센터 등 지역 보건의료기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한 사업을 수행하는 비영리법인 또는 비영리단체 및 법에 정한 공공기관에 등록하여야 효력이 발생한다. 이 문서에는 연명의료중단 등의 결정, 호스피스의 이용, 작성 연월일 등이 포함되며, 등록기관은 작성자에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효력 및 효력 상실에 관한 사항 등을 충분히 고지해야 한다. (동법 12조).
연명치료 중단에 불씨를 지폈던 ‘세브란스병원 김할머니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연명치료를 받던 중 인공호흡기를 떼어달라는 보호자의 소송이 있었고 법원이 이를 허락한 사건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데,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환자에게 고통뿐일 지도 모른다.
당시 김할머니의 심정을 「독백」으로, 의사의 입장을 「반성」으로 그려 보았다.
- 도대체 숨이 멈추질 않네요
- 호흡중추가 기억을 되찾았나 봐요
- 그러기에 진즉 호흡기를 뗐어야죠
- 그동안 갑갑해서 죽을 뻔했잖아요
- 오늘 아침, 드디어 죽음의 예배가 시작되었어요
- 목사님은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 하느님도 죽을 때를 모르시나 봐요?
…(중략)…
- 아, 글쎄 죽기가 쉽지 않네요
- 아무래도 죽음은 타협이 아니라 숙명인가 봐요
-
의사들은 지독한 숙명론자라 들었는데, 이젠 정말 아무도 못 믿겠어요
- 운명에 기대는 수밖에요
-
한숨 자고 나면 세상이 조용해질 텐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네요
- 링거액에 수면제나 좀 섞어 주세요
- 인터뷰는 사절이예요
- 「독백」 부분
-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
당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섣부른 판결에만 의존한 것이 잘못이겠죠
-
영혼의 무게는 단지 21그램이라는 말만 믿고 오직 첨단기기에 의존하여 그 무게로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게 문제겠죠
-
사람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또 얼마나 큰 죄악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 호흡기를 떼려는 순간 나도 무척 떨렸어요
…(중략)…
- 이제 당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 아니, 미안해요
- 잠깐 또 내가 딴생각을 품었어요
- 정말 죄송해요
- 안녕히 주무세요.
- 「반성」 부분
보편적 의학상식으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이유는 두 가지뿐이다. 자발적 호흡이 가능하거나 심장 박동이 멈췄을 때. 보호자가 원하고 법원이 판단하여 의사가 그 명령을 따르는 경우는 당시로서는 몹시 생소했다. 하지만 내가 더 관심을 가진 것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했을 때 환자의 반응이었다.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자마자 그대로 숨이 멈출 것인지 아니면 자발적인 호흡을 유지할 것인지. 김할머니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후에도 이백일 이상을 더 살았다. 그것도 아주 편안한 호흡을 유지하면서.
당시 법원의 판결문에서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고 명시한 바 있다. 아직 우리 사회에 연명치료란 말 자체가 생소한 시절, 법원의 판결은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에는 재택사 비율이 75%, 병원사 비율이 15%였고, 1999년의 재택사 비율은 60%, 병원사 비율은 30%였다. 당시만 해도 죽음은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약 10년 후인 2008년에는 재택사 비율이 22.4%, 병원사 비율이 63.7%로 반전되며, 2020년에는 병원사 비율이 75.6%까지 치솟는다. 이제 열에 여덟은 병원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들 또한 늘고 있다. 미리 유언장을 작성하고 주변에 감사를 표명하고 신변을 정리하는 경우도 많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이제 많은 사람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작성 방법은 다음과 같다. (표1 참조)
1. 성명, 주민등록 번호, 주소, 전화번호 등 개인 정보를 기입한다.
2.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의사를 표명한다.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원하지 않는 치료를 명확하게 선택한다.
3. 호스피스 이용 계획이 있는지 의향을 밝힌다.
4.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의 설명을 들었는지 확인하고, 작성자 본인이 서명한다.
5. 환자 사망 전 문서 열람 가능 여부에 대해서도 표시한다.
6.
작성된 문서는 법에서 정한 공공기관에 등록하여야 하며, 등록된 문서를 보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기입한다.
사전에 작성할 수 있는 의료의향서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비롯 장기기증의향서, 장례의향서, 유언장 등이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를 통해 가족들과 의료진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가족들과의 갈등을 예방하고 의료진에게 명확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 낯선 병상에서 각종 삐삐거리는 기계들에 둘러싸여 팔다리에 수많은 바늘을 꽂은 채로 죽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육신의 고통을 더 이상 무의미하게 연장하지 않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전 의향서를 작성할 때는 가족, 의사와 함께 충분한 상담을 거친 후 작성해야 한다. 의사결정 능력을 상실하기 전, 내 의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미리 작성하는 것이 좋다.
모든 생명은 존엄하게 마무리돼야 한다. 연명치료는 마지막 존엄을 지키는데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모든 생명이 자연에서 잉태되었듯 모든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시간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죽음이란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다. 모든 것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사랑하고 미워했던 기억들조차 희미해지면 나 또한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날이 다가오는 것이리라. 이별에 대한 슬픔의 무게나 깊이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함부로 말할 성격은 아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지혜와 방법 역시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