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5월 셋째 주일입니다. '케첩 도둑 호털이'라는 제목으로 하날새에서 글 한편을 올려드립니다
팔공산 북쪽 자락이 끝나는 곳에는 범실이라 부르는 아담하고 조용한 시골 동네가 팔공산을 베고 누운 듯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범실에는 토마토케첩 공장이 있을 정도로 토마토 농사로 유명하였습니다.
팔공산 중턱에는 호털이라는 이름을 가진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모든 일에 침착하지 못하고 덜렁대기 때문에 '호덜'이라 불렀으나, 부르기 쉽도록 호털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호털이는 배가 쓸쓸 고파왔습니다. 저녁식사를 일찍 한 탓도 있지만 호털이는 밥보였던 것입니다. 호털이는 어디 먹을 것이 없을까 하여 얄기죽얄기죽 발걸음을 범실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범실이 가까워지자 새콤한 토마토케첩 냄새가 밤바람을 타고 호털이의 코를 간지럽혔습니다. 호털이의 입속에는 군침이 이미 감돌았습니다. '이야 이게 무슨 냄새일까? 냄새 한번 죽여주는구먼' 호털이는 혼잣말을 하면서 냄새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호털이는 케첩 공장 뒤뜰에 들어섰습니다. 그곳에는 토마토케첩을 담아둔 큰 통들이 사열하는 군인들처럼 줄을 맞춰 서있었습니다.
새콤한 냄새에 이미 자제심을 잃은 호털이는 사람의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케첩통 뚜껑을 열었습니다.
환한 보름달 빛에 케첩은 반들거리며 날 잡숴 하듯 호털이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호털이는 토마토케첩을 한 움큼 떠서 입안에 퍼 넣었습니다. '우 와 토끼고기나 사슴고기하고는 또 다른 맛 인걸!' 호털이는 기분 좋게 중얼거리며 토마토케첩을 연거푸 퍼먹었습니다. 입에서 토마토 냄새가 설설 올라올 때까지 퍼먹었습니다. 호털이는 털럭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산속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저녁이었습니다.
어제 그맘때가 되자 새콤한 토마토케첩 생각이 모락모락 호돌이의 머릿속에서 피어올랐습니다. 훔쳐 먹는 것이 불안했지만 호털이는 새콤한 토마토케첩 맛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딱 한 번만 더 훔쳐먹는 거야! 그리고 다시 훔쳐먹지 않으면 되지 머' 이렇게 생각하면서 호털이는 토마토케첩 공장을 향하여 내려갔습니다. 그날도 호털이는 배가 출렁거릴 때까지 빠알간 토마토케첩을 훔쳐먹은 후 산속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호털이는 케첩을 훔쳐 먹었습니다. 매번 호털이는 '이번 한 번만 더...,' 하면서 토마토케첩을 훔쳐먹었습니다.
토마토케첩 공장에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낮 동안 힘들여 만들어 놓은 토마토케첩이 밤마다 누군가 한 통씩 훔쳐먹은 후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사라졌으니 말입니다. 토마토케첩 공장 주인은 도둑을 잡기 위해 직원 한 사람과 몽둥이를 들고 공장 뒤뜰에 있는 큰 감나무 위에 올라가 거기 숨어서 지켰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시커먼 것이 저만치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토마토케첩 공장 주인은 저게 뭘까 하고 숨을 죽이고 살폈습니다.
검은 물체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토마토케첩 공장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케첩 도둑이 당연히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호랑이였거든요. 도둑이 사람 같았으면 몽둥이로 잡을 수 있었지만 호랑이가 도둑이지라 겁이 나서 호털이가 토마토케첩을 한통 다 먹은 후, 꺼억∼ 하고 트림을 하면서 산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만 보았을 뿐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케첩 공장 주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호랑이가 케첩을 훔쳐먹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때문에 케첩 공장 주인과 직원들은 골몰했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던 끝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호털이는 토마토케첩 공장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줄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호털이는 날이 어두워지자 토마토케첩을 훔쳐 먹기 위해 범실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호털이는 오늘도 '이번 한 번만 더...,'하면서 토마토케첩 공장 뒤뜰로 들어갔습니다. 오늘도 호털이는 기갈 들린 것처럼 빠알간 케첩을 푹 떠서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퍼 먹었습니다. 두 번 꿀꺽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케첩을 먹는다는 표현보다는 그냥 퍼 넣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호털이는 토마토케첩을 목구멍으로 퍼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호털이의 뱃속으로 들어간 빠알간 토마토케첩이 갑자기 불덩이가 된 듯 호털이의 배속에서 화끈거렸습니다. 호털이가 정신없이 입안으로 퍼 넣은 것은 빠알간 토마토케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빛깔만 토마토케첩처럼 빨간 고추장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맵기로 유명한 청양고추로 만든 고추장이었습니다.
뱃속이 따끔따끔..., 화끈화끈..., 우글부글..., 입에서는 불이 나오는 듯했습니다.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코에는 콧물이 쏟아졌습니다. 호털이는 본능적으로 물을 찾았습니다. 정신없이 곁에 있는 장독 뚜껑을 열어보니, 별빛에 물이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호털이는 냅다 독안에 머리를 밀어 넣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퇴 퇴 퇴 이건 물이 아니잖아!, 아이고 호털이 죽네'하고 아득한 정신으로 소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물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짜고 짠 간장이었던 것입니다. 호털이의 배속에는 빠알간 고추장과 간장이 뒤 썪여 더욱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지금까지 지켜보던 토마토케첩 주인과 직원들은, 밥그릇을 두들기며, 북을 치며 '케첩 도둑 잡아라' 하고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빨리 이곳을 달아나야 살 수 있음을 호털이는 깨달았습니다, 호털이는 정신없이 팔공산을 향하여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발톱이 다 빠지도록 말입니다. 호털이는 달아나면서 '한 번만 더 하다가 이렇게 된 거야.' 생각하니, 뱃속이 화끈거려서 눈물도 났지만 동시에 '한 번만 더'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 후회가 되어 눈물을 찔금대면서 팔공산 깊숙이 숨어들어갔습니다.
그 후 범실 마을에는 두 번 다시 호랑이가 내려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오늘도 범실 마을의 토마토케첩 공장에서는 새콤한 토마토케첩이 익어가는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