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9일 (월)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복음 묵상 (루카 2,22-35) (이근상 신부)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28-35)
예언은 말이 아니라 벼락에 가깝다. 아기도, 오늘의 말씀도, 그녀가 초대한 것들이 아니다. 그녀가 생애에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일들을 꿈꾼 적이 있었을까. 모든 것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떨어져 내려, 그녀 앞에 놓여 있던 “삶의 길”을 산산조각 낸다. 이제 그 앞에는 길이 아니라, 너덜바위들이 삐죽 솟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시메온의 예언은 너무도 날카롭다. “이 아기는 …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 될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기다려 온 구원이 우리를 안온하게 묶어 주는 ‘합의’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중심을 갈라놓는 ‘표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리고 우리가, 또 우리의 마음이 갈라질 때, 그 틈으로 우리의 진면목이 폭로될 것이라 말한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 2,35)이라 한다. 그러니 이 예언은 단지 미래를 알려주는 말이 아니라, 세계가 두르고 있던 은폐의 장막이 찢겨 나가리라는 말이다.
더 무거운 예언은 다음에 온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루카 2,35). 칼은 밖에서 날아오는 사건의 칼이기도 하지만, 더 두렵게는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방식 자체가 찢기는 칼이다. 아기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데, 이미 그 품의 미래가 “꿰찔림”으로 규정된다. 마리아의 모성은 보호가 아니라, 상실을 견디며 끝까지 함께 서는 자리로 호출된다.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길을 “선택”하기보다, 길을 “겪게” 된다.
이 반갑지 않은 예언 앞에서 마리아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루카는 복음의 시작부터 마리아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간직하는 사람’으로 그린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19). 칼이 예고될 때조차, 그녀는 도망의 지도를 만들지 않는다. 그 무서운 자리에서 여전히—품에 안은 예수와 그가 함께 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역시 이 복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물음도, 추측도, 회피도 아닌 한 가지이다. 부서진 길 앞에서 그분께로 고개를 돌리는 것.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구원을 보게 하소서”(루카 2,30 참조)라고—시메온처럼—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고백하는 일이다.
칼이 삐죽이 서는 자리에서조차,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구원은 오히려 그 칼이 드러내는 진실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마음속 생각이 드러나고, 가짜 평화가 벗겨지고, 그럼에도 끝까지 사랑해야 할 대상이 분명해질 때—그때 비로소 우리는 안다. 문제는 길이 아니라 우리의 한 걸음이라는 것을. 날카로운 바위가 폭로한 바처럼, 길처럼 보이는 것들이 길이 아님을.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것만이 우리의 길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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