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잡기(雜技)의 피해는 투전(投錢)이 특히 심합니다.
위로는 사대부의 자제들로부터 아래로는 항간의 서민들까지
집과 토지를 팔고 재산을 털어 바치며
끝내는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게 되고 도적 마음이 점차 자라게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경외에 빨리 분명한 분부를 내리시어,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금법을 어기고 죄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시고,
투전을 만들어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자도 역시 엄히 금지하소서.
위는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1791) 9월 19일 기록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투전 말고도 골패, 바둑, 장기, 쌍륙,
윷놀이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조 때의 학자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보면
투전은 명나라 말기에 장희빈의 당숙인 역관 장현이 북경에서 들여왔다고 되어 있어
투전이 우리나라에 보급된 것은 조선조 숙종 때부터인 듯합니다.
투전은 처음에 중인 이하의 계층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양반 계층에까지 확산하였지요.
▲ 김득신, <밀희투전>, 18c, 종이에 채색, 22.4×27.0cm, 간송문화재단 소장
원래 투전은 투기성이 강한 노름이 아니었는데
점차 오락성은 사라지고 도박성이 커졌습니다.
정조 때 문신이자 학자인 윤기(尹僧, 1741-1826) 가 쓴
《무명자집(無名子集)》에 나오는 <투전자(投錢者)>라는 시를 보면
투전하다가 아내의 치마를 벗겨가고,
솥까지 팔아먹어서 식구들이 굶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자 위 《정조실록》 내용처럼 문신 신기경(愼基慶)은 투전을 금하고,
투전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엄격히 벌을 줄 것을 상소했고
정조는 투전금지령을 내렸지만 그치지 않았으며,
투전꾼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