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동네에서 [MEM/SAS] 애틀+LG 님이 번역하신 글을 대신 올립니다. (눈팅유저라고 하셔서^^)
멤피스의 주전가드인 Mike Conley Jr.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15년 1월 21일자 grantland에 올라온 칼럼이라고 하네요.
5년전 어느 경기의 하프타임 시간, 라이오넬 홀린스는 마이크 콘리를 호되게 꾸짖고 있었다. 그는 비속어를 곁들여가며 콘리의 퍼포먼스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콘리는 자신이 그렇게 부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날 그리즐리스는 전반에만 11개의 턴오버를 기록하는 등 전체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이 찌부둥한 상태였다. 그 경기는 스페인 농구팀인 "Caja Laboral"과의 시범경기였고, 그들은 NBA팀을 상대로 풀코트 프레싱을 펼치고 있었다. 홀린스는 콘리에게 "너는 지금 NBA에서 뛰어본 적도 없는 선수에게 꼼짝도 못하고 있다고!" 라며 질타했다.
감독님의 질책에 콘리는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런 자신을 자제했다. 콘리는 스스로에 대한 자제력과 강한 극기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그가 그의 아버지인 콘리 시니어(올림픽 육상 세단뛰기 금메달리스트였던)에게서 항상 칭찬받고 인정받아왔던 그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하프타임 이후, 콘리는 팀의 10-0 Run을 진두지휘했으며, 그날 27점을 기록하면서 멤피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홀린스가 멤피스의 감독으로 있었던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콘리는 자신과 홀린스 감독은 위와 유사한 순간들을 아마 수백번은 함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NBA 포인트가드와 엄격하고 까다로운 코치(그것도 한때 PG 포지션에서 챔피언쉽 레벨에 있었던..!) 사이의 관계는, 마치 바닷물의 조수가 들어차고 빠져나가는 것처럼 항상 서로 주고받아 왔던 그런 것이었다.
"그땐 제가 잘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 콘리는 말했다.
"감독님은 항상 절 감독님 옆으로 불러세워서 크게 혼내시고 호되게 꾸짖으셨죠. 저는 그게 감독님께서 제가 갖고 있는 무언가를 보셨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감독님은 제가 최고가 되길 원하셨어요. 저를 한계까지 밀어붙이시길 원하셨죠."
당시 콘리는 스스로를 경기를 조율하고 팀원들을 서포트하는 '테이블 세팅 포인트가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순간순간 발휘되는 그의 스코어링 부문에서의 폭발력은 그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를 부연해주고 있었다.
"저는 제가 '10-point guy'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감독님께선 제가 그때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고 계셨죠."
그리고 오늘날, 콘리가 없는 그리즐리스의 성공시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홀린스는 브룩클린 넷츠로 떠났지만, 오랫동안 꼬리표처럼 콘리에게 붙어다녔던 "과소평가된"이란 표현은 이제 구식이 되었으며, 더 이상 그에게 적용시키기가 민망해졌다. 그는 리그 내에서 가장 완벽한 마에스트로들 중 한명이며, 리그 내에서 가장 완벽한 팀들 중 하나를 지휘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콘리는 (거칠고 터프하며) 감정적인 팀 로스터를 흔들리지 않게 지탱하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잭 랜돌프나 마크 가솔도 그렇지만, 멤피스의 성공에 있어서 마이크 콘리는 절대적입니다." - 콘리가 NBA에 입성할 당시 멤피스의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조니 데이비스(Johnny Davis)의 말이다.
"콘리가 없는 멤피스는 그냥 아예 다른 팀입니다. 콘리는 이제 정말 NBA 최고 PG가 되었죠."
처음부터 항상 그래왔던 것은 아니었다. 2007년 전체 4번으로 드래프트된 콘리가 도착했을 당시, 그리즐리스 구단은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콘리는 PG 포지션에서 빡빡한 경쟁에 직면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루키 시즌을 조기에 종결시키는 부상도 겪었다. 그는 더디게 성장했고, 구단은 그를 트레이드시키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 당시, 멤피스는 매 시즌마다 새로운 PG를 드래프트하고 트레이드하고 새로 영입할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서 그 기간 동안, 콘리와 경쟁하고 그의 자리를 뺏어갈 것처럼 생각되는 새로운 얼굴들이 항상 팀 내에 존재했었다.
"그땐 정말 누구든지 쉽게 절 밀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 라고 콘리는 당시를 회고했다.
"정말 불투명한 상황이었죠. 언제든지 밀려나서 그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PG 포지션은 종종 NBA에서 가장 빠른 - 혹은 가장 가파른 - 성장곡선을 겪는다고 여겨진다. "PG들은 경기장 위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해내야만 하니까요." - 콘리가 드래프트될 당시 멤피스의 포워드였던 마이크 밀러의 말이다. "포인트가드들은 항상 독료들을 북돋아주어야 하죠. 더군다나 진짜 힘든 일이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리더쉽도 함께 갖추어야 하구요."
밀러의 말처럼, 그리즐리스에서 성공을 이룩하기 위해 콘리는 리스펙트에 관한 면과 독단적인 - 나서서 자신감있게 주장하고 이끌어가는 - 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방법을 배워나가야만 했다. 그는 팀메이트들을 지원하고 서포트해줄 때와 그들에게 명령하고 지시해야 할 때에 대한 감각을 지녀야만 했다.
"콘리는 아마도 그때 스스로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 콘리의 루키 시즌을 멤피스에서 함께했던 베테랑 PG 데이먼 스터드마이어(Damon Stoudamire)의 말이다.
"하지만 콘리는 아마 무슨 일을 맡겨도 해낼 수 있었을 겁니다. 다들 그가 그렇게 높은 드래프트 순번을 보장받았을 정도의 선수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들 있었지만, 콘리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겪어내고 극복해내는 'Calmness'를 보유한 선수였죠. 콘리는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친구에요. 그건 엄청난 거고, NBA에선 특히 더 그렇죠."
NBA에서 왼손으로 가장 많은 득점을 만들어내는 선수 중 한명이지만, 콘리는 원래부터 왼손잡이는 아니었다.
"마이크가 왼손으로 자유롭게 레이업을 하고 피니쉬를 해내기 전까지는, 아직 NBA에 도달할 만한 레벨이 아니었죠." 아들에 대한 콘리 시니어의 설명이다.
콘리 시니어는 아이재이아 토마스가 일리노이주 전역에 신동으로 명성을 떨치던 시기 시카고에서 자랐다. 아칸소 대학의 신입생 시절 농구부와 육상부에서 뛰었던 콘리 시니어는 결국 농구를 포기하고 육상에 헌신하기로 결정했고, 미국 대표로 출전한 1992년 올림픽 세단뛰기에서 미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하지만 농구는 콘리 시니어의 첫사랑과 같은 것이었고, 그는 자신의 아들과 그것을 공유했다.
"마이크는 13개월때부터 공을 가지고 놀았어요." 라고 그는 회상했다.
"저는 마이크에게 공을 내줬고, 아들녀석은 자기가 무슨 손을 쓰는지 알기도 전부터 왼손으로도 곧잘 슛을 쏘곤 했죠. 어릴 때부터 이미 왼손으로도 슛을 쏘긴 했었어요."
콘리 주니어는 자신이 아이들용 규격 사이즈의 골대에 슛을 쏘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가 림 위로 공을 날려보내는 데에 가장 많이 썼던 방법은 엉덩이로부터 몸 왼쪽으로 힘을 주고 팔을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어떤 까닭인지, 농구할 때 저는 왼손으로 그런 플레이들을 했어요. 그리고 '아마 내가 농구부에 들어간다면 그냥 왼손잡이가 되겠구나' 하고 느꼈죠."
콘리 시니어가 인디애나폴리스에 자리를 잡으면서, 콘리의 가족은 1990년대 후반 아칸소에서 인디애나로 이사를 했다. 콘리가 12살이 되었을 무렵, 그는 Terre Haute에서 열린 어느 토너먼트에서 안경을 끼고 키가 껑충하게 큰, 약간 어리버리한 듯한 한 소년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그렉 오든(Greg Oden)이었다. 두 소년은 금방 친해졌고, 많은 설득 끝에 오든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콘리 시니어가 일하는 AAU팀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했다. 오든은 콘리 가족과 동거하면서 그해 여름을 보냈다. 콘리와 오든 사이의 오랜 우정의 시작이었다. 그들이 함께한 팀은 재능들을 확보했고 승승장구했다. 미래의 NBA 플레이어들인 조쉬 맥로버츠, 에릭 고든, 데콴 쿡과도 합류하였다. 4년이 지나는 동안, AAU High Level에서 콘리와 오든이 속한 Spice Indy Heat 팀은 단 2번의 패배만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정말 좋은 팀들을 모두 꺾었죠." 콘리 시니어는 회고했다.
"거의 매번, 그리고 무엇보다 거의 대부분을 엄청난 점수로 이기곤 했어요."
오든을 포함하여 팀원들은 모두 (그 레벨의) 슈퍼스타로 발돋움했고, 오든은 향후 역대급 포텐셜을 가진 최고의 빅맨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조용하고 작은 포인트가드는 쉽게 간과되기 일쑤였다.
"콘리는 언제나 안정적이고 꾸준했고, 또 그렇게 화려한 걸 즐겨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어요." 조쉬 맥로버츠는 말했다. "하지만 콘리는 언제나 제대로 된 플레이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게임이 끝나고 보면 어느새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고 있기도 했죠. 콘리는 항상 그랬습니다."
그가 지휘한 팀의 유쾌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콘리 시니어는 계속해서 그의 선수들에게 일정한 선을 상기시켰다. "콘리의 아버님이 항상 우리에게 주지시킨 게 있어요." 라고 오든은 설명했다.
"너무 들뜨지도 말고, 너무 쳐지지도 말아라. (제 생각엔) 그게 콘리가 어릴때부터 커온 방식이었죠."
콘리 시니어는 그의 아들이 아이재이아 토마스처럼 신체적인 재능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과 경기 감각을 바탕으로 플레이하길 원했다. 콘리 부자는 토마스의 아들인 Zeke가 AAU팀에 합류할 때 토마스로부터 직접 배울 기회를 얻기도 했다.
"콘리 그 친구는 참 대단한 볼 핸들러였어요." 토마스는 콘리를 그렇게 회고했다.
"그 친구는 양손을 다 썼고, 그래서인지 자신의 점프슛에 대해선 큰 확신이 없는 편이었죠. 어떨 때는 오른손을 쓰고, 어떨 때는 왼손을 쓰고, 또 어떨 땐 양손으로 슛을 쏘기도 하더라구요. 그렇지만 그 친구는 항상 '어떻게 농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봐준 건, 단지 그 친구가 자신의 슛에 확신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었죠."
콘리와 오든이 Lawrence North 고등학교로 입학했을 때, 오든은 누구보다 확실한 NBA 유망주로 여겨졌다. 하지만 팀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콘리였다는 것을, 그들의 코치인 잭 키퍼(Jack Keefer)가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경기 시작 전 오든이 부상으로 벤치에 머물러야 했을 때, 콘리는 키퍼 코치가 라커룸에서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전통적인 코치의 역할이지만, 이번에는 그 관계가 반대로 적용되었다. 콘리는 키퍼에게 다가가 "코치님, 우리가 이길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겨보일게요."라고 다독였다.
"콘리는 다른 동료들을 일일히 보살펴주느라 그렇게 많은 득점을 하는 편은 아니었죠. 그렇지만 그 경기에서 콘리는 (오든 대신) 득점을 해줘야 했고, 실제로 38점을 넣으면서 환상적인 플레이를 해줬어요. 우리는 이긴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던거죠." - 키퍼의 설명이었다.
콘리와 오든은 함께 3번의 챔피언쉽 타이틀을 따냈고, 모교인 Lawrence North에 103승 7패라는 기록을 안겨주었다. 사실 오든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이 7풋 센터는 대학을 건너뛰고 바로 NBA 드래프트에 참여할 것이라는 소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오든을 포함한 그 학년의 졸업생들은 'One - and - Done으로 불리우는 NBA 나이제한 규정의 첫번째 적용 대상이 되었다. 오든은 키퍼 코치에게 어느 대학에 가는 것이 조언을 구했고, 키퍼는 오든에게 "어디든 콘리가 가는 곳에 함께 가는게 좋을 것이다"라는 조언을 했다.
"오든은 콘리와 함께 훌륭한 시간들을 보냈죠." - 키퍼는 말했다.
"오든은 고등학교에서 얼추 야투율이 86%정도 나왔어요. 콘리가 림에서 한 2인치 정도 거리에 건네주면 잡아서 덩크하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스텝만 밟고 있으면 떠먹여주는 셈이었습니다. 오든 같이 그렇게 큰 빅맨이 그 정도로 자기를 서포트해주고 케어해줄 누군가를 만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죠. (그 또래의) 모든 가드들은 스스로가 30점을 넣길 원하니까요. 콘리는 절대 그러지 않았어요."
많은 유명한 코치들이 Lawrence North를 방문했고, 그들의 타겟은 거의 오든이었다. 키퍼 코치는 당시 듀크대학의 감독이었던 Mike Krzyzewski 정도가 "One-and-Done" 선수들의 리크루팅에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인디애나의 코치인 Mike Davis에 대해서는 "그는 이미 Armon Bassett에서 PG를 데려오려 했기 때문에, 오든이 아닌 콘리에게는 그렇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당연히 오든은 Hooiser를 패스해버렸죠." (Hooiser - 인디애나 주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
키퍼 코치는 오하이오 주립대 코치인 테드 마타(thad Matta)와 이미 친분이 있었다.
"콘리와 오든은 그를 잘 따랐어요. 마타는 정중하게 두 친구들을 오하이오 주립대로 데려갔고, 제가 했던 방식을 따라서 녀석들을 편하게 만들어줬죠. 콘리랑 오든이 돌아와가지고는 저한테 말하더군요. '코치님, 저흰 오하이오로 갈래요' 라고 말이죠."
"마이크 콘리를 드래프트한 바로 그 순간부터, 저는 콘리가 대학 최고의 포인트가드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다들 '그 녀석은 오든이랑 같이 뛰었을 뿐이야'라면서 웃더군요." - Matta는 말했다. "전 콘리가 지닌 실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는 06-07시즌에 콘리와 오든을 신입생으로 데려왔고, 둘은 오하이오 주립대를 정규시즌 27승3패로 이끌었다. 콘리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팀이 필요로 할 땐 득점을 하고 그렇지 않을 땐 어시스트를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Buckeyes(오하이오 주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는 2007년 NCAA 토너먼트에 1번 시드를 배정받았다. 4강에서 그들은 조지타운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챔피언쉽 매치에서 아쉽게 75대84로 플로리다에 패하고 말았다. 20득점 6어시스트의 콘리와 25득점 12리바운드의 오든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오하이오는 플로리다의 균형잡인 인&아웃사이드 게임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 시즌을 치르는 동안, 콘리 시니어는 이미 오든의 에이전트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포스트시즌이 종료되는 순간, 그는 그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도 일해야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든과 콘리는 모두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했다.
"토너먼트가 끝난 이후, 저는 제가 그동안 뭘 해냈는지에 대해서나 NBA에서 말하는 예상 등수(Mock Draft를 의미)가 어땠는지에 대해선 별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라고 콘리는 말했다. "기회란 건 그렇게 자주 오는게 아니니까요. 창문은 언제든지 다시 닫힐 수 있는거죠. 저는 (더 높은 단계로) 점프해야 했어요."
멤피스 그리즐리스는 07 드래프트가 실시되기 몇일 전에 팀을 떠난 제리 웨스트(Jerry West)를 대신하여 크리스 왈라스(Chris Wallace)를 그들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한 때 3년연속 서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던 그리즐리스 구단은 무려 22승으로 추락한 시즌을 보내면서 로터리 픽을 받게 되었다.
포틀랜드가 1번픽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은 케빈 듀란트를 건너뛰고 그렉 오든에 1번픽을 행사하는 운명적인 선택을 하였다. 듀란트는 전체 2번으로 시애틀로 가게 되었고, 애틀랜타가 3번으로 플로리다의 알 호포드를 지명했다.
GM 왈러스는 드래프트에선 포지션상의 필요성보다는 탈렌트를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리빌딩중인 팀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전체 4번으로 마이크 콘리를 지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PG는 NBA에서 정말 가치있는 포지션입니다. NFL로 치면 쿼터백과 같은거죠. PG에서 뛰어난 퀄리티의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멤피스에서, 콘리는 이미 PG 포지션만큼은 차 있었던 로스터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즐리스 PG 포지션은 그 직전 드래프트 1라운더 출신인 카일 로우리와, 12년차 베테랑 데이먼 스터드마이어 등으로 이미 포화된 상태였다.
"이미 제가 드래프트로 뽑혔었는데, 그건 좀 우스운 상황이었죠." 로우리는 말했다.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되는건지 이해가 안갔어요. 물론 저는 마이크를 좋아했고, 마이크와 단짝처럼 지냈죠. 우린 같이 골프도 치러 다녔고, 마이크가 정말 좋은 친구란걸 항상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거랑 구단의 노선을 이해하는 거랑은 별로 상관이 없죠. 전 24번째로 드래프트됐고, 마이크는 4번째니까요. 아마 구단에선 마이크에게 기회를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선수들이 서로에 대해 호감과 친밀감을 느끼는 만큼, 프로로써의 자존심과 야망도 그들 사이에 자리잡기 마련이다. 멤피스는 어느 쪽이든 구단을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부여하고, 동시에 선수의 다음 계약시 증가할 시장 가치를 저울질해보는 것을 고려해야만 했다.
또다른 PG였던 데이먼 스터드마이어는 두 젊은 선수들의 멘토였다. 그는 멤피스가 콘리를 드래프트한 직후에 라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그도 아직 구단과 함께할 미래가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라우리와 콘리는 게임에 접근하는 방식이 완전히 상이했다. 스터드마이어가 보기에, 냉정하면서도 적극적인 면을 가진 라우리는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코트에 몽땅 쏟아부을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콘리는 항상 좋은 평가를 받았던 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뛰었던 선수인 것처럼 보였고, 누군가가 그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그가 지닌 재능과 더불어 편안하게 조화를 이루는 타입이었다.
"라우리는 핏불 같았어요." 스터드마이어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플레이하고 그가 해내는 것들은 정말 솔직하고 강직했죠. 그는 모든 걸 해내길 원했어요. 그리고 콘리에 대해서는, 그 친구가 한번도 경쟁심을 불태우고 누군가를 이기려드는 적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다른 선수들에 녹아들어서 함께 플레이하려고 하면서 성장하고 있었죠."
스터드마이어는 콘리와 라우리 모두에게 적극적인 면을 지닐 것을 주문했다. 커리어 초기에, 콘리는 스스로의 슈팅 능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가 꾸준하게 점퍼를 향상시키기 전까지, 스터드마이어는 항상 콘리에게 '수비수들은 니가 무슨 슛을 쏘겠어? 하면서 널 우습게 볼걸. 아마 간격을 벌리고 니 돌파만 막으려고 하겠지.' 라고 지적했다. 스터드마이어는 코트 위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니가 원할 때마다 여기에서 점수를 얻어내야 되는거야' 라고 말했다. "코트 내에 이런 지점들을 많이 만드는게 니가 앞으로 할 일이야. 이 위치들을 편안하게 느낄 정도가 되야 한다고. 그게 내가 돈을 번 방식이거든." 스터드마이어가 콘리에게 건넨 말이었다.
스터드마이어의 멘토링이 지나칠 정도로 훌륭했던 탓인지, 그의 두 제자들은 빡빡한 멤피스 로테이션에서 결국 그를 밀어냈다. 스터드마이어는 콘리의 루키 시즌이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바이아웃을 요청했고, 2008년 2월 샌안토니오와 계약을 맺었다. 물론 스터드마이어는 두 젊은 가드들의 성장을 그 이후 몇년간 계속해서 지켜봐주었다.
"어린 PG였던 콘리는 그 이후 잭 랜돌프, 떠오르는 센터 마크 가솔, 루디 게이, 벤치에서 출격하는 OJ메요 같은 선수들과 함께하게 됐죠. 그들 모두 패스를 받길 원했구요." 하고 스터드마이어는 말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들이 포인트가드라면, 여러분들은 '아니아니, 이번엔 니 차례가 아니야'라고 팀원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하죠. 포인트가드는 코트 위의 모든 이들이 무언가가 함께 이루어져간다는 느낌을 받게 해줘야 합니다. 제가 콘리에게 말해주고자 했던 건, 네가 당당하게 서서 스스로의 의견을 관철하면 동료들이 네게 떼를 쓰거나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죠."
콘리는 멘토의 조언을 충실하게 받아들였지만, 조용한 자신감과 부드러운 인성을 통해 동료들을 승리하게 만들어주는 콘리 자신만의 방식으로 플레이를 해나갔다.
"저는 (조화롭게) 녹아들길 원했죠." 콘리는 말했다. "저보다 더 나이많은 선수들과 함께 뒤는 것은 꽤 난감한 일이었어요. 마이크 밀러, 데이먼 스터드마이어, 스트로마일 스위프트 같은 선수들 말이죠. 그들은 저처럼 어린 선수가 말하는 걸 그저 기계적으로 듣기도 했죠. 저는 제가 그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 절 존중해주고, 제가 하는 리드를 따라주길 기대하는 그런 위치에 이를 때까지 더 배워야겠구나 하는걸 깨달았어요. 제 본래 성격은 더 느긋하고 그다지 적극적인 편이 아니었지만요."
오른쪽 어깨 근육에 입은 부상은 콘리의 루키 시즌을 6주간 날려버렸다. 콘리와 라우리가 모두 건강했을 때, 그리즐리스는 꽤나 요상한 로테이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 경기 직전에 두 선수에게 러닝과 슛을 쏘게 하고, 더 나은 컨디션으로 출발한 선수에게 더 많은 시간을 뛰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두 젊은 선수 모두에게 그다지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드래프트 전체 4번으로 뽑혀서 온 루키라면, 좀더 많은 플레잉 타임을 기대하게 되죠." 콘리는 말했다. "1월 전까지 저는 홈에서는 한번도 선발로 뛰지 못했어요. 구단은 절 원정에서 뛰게 했죠. 솔직히 뭐가 어떻게 되는거지? 란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백코트의 정체는 멤피스의 어시스턴트 코치인 조니 데이비스로 하여금 1980년대 후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직면했던 상황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케빈 존슨과 마크 프라이스를 보유하고 있었고, 존슨이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둘 중 누구도 완전히 만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콘리와 라우리는 매 경기 순간순간마다 경쟁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돈독한 친구가 된 상태였으며, 서로가 경기 내외적으로 NBA 선수로써 적응하는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우리 관계는 둘 모두에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되주었어요." 콘리는 말했다. "물론, 우릴 더 의욕넘치게 만들기도 했죠. 우린 계속 같이 연습했어요. 같이 체육관에 가지 않은 날이 없었죠. 마치 '뭐 좋아, 같이 숨이나 쉬자' 이런 것처럼 간단한 거였죠. 거기에 물론 '내가 기회를 얻길 원한다면 오늘 내가 더 나은 플레이를 해야만 해'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콘리의 루키 시즌동안, 그리즐리스는 그 직전 22승에 비해 불과 조금밖에 나아지지 않았다. 시즌 중반을 지나면서, GM인 왈라스는 프랜차이즈 센터인 파우 가솔과 2라운드 픽을 레이커스로 보내면서, 많은 NBA 관계자들이 레이커스가 먹다 남은 찌꺼기 정도로 여긴 콰미 브라운, 자바리스 크리텐톤(또다른 PG였다), 아론 맥키, 그리고 파우의 검증되지 않은 동생인 마크 가솔을 2장의 드래프트 픽과 교환하였다. 이 무브는 당시 레이커스 경쟁팀의 감독들과 단장들에게 광범위하게 성토되었으며, 샌안토니오의 그렉 포포비치로 하여금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트레이드는 번복시켜버릴 수 있는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좀 터무니없을 정도의 과격한 주장을 내뱉도록 만들었다.
구단의 이런 움직임 와중에, 콘리는 그의 첫 시즌을 평균 9.4득점과 4.2어시스트라는, 당시 전체 4번픽에 기대되는 활약을 많이 밑도는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자신들이 뽑은 루키가 스타덤에 오르길 희망하는 그리즐리스 구단의 기대치에도 훨씬 못미치는 성적이었다.
08-09 시즌에도 멤피스는 지지부진한 출발을 하였다. 라우리와 콘리에게 지워진 예측불가능한 로테이션은 두 선수 모두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4분동안 게임을 했어요."(Play for minuts a game이 아닌 play four minutes a game) 라우리는 말했다. "1쿼터 1분을 뛰러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고, 2쿼터 1분을 뛰러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고 하는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었죠."
2009년 1월, 멤피스는 마크 이아바로니를 해임하고 라이오넬 홀린스를 부임시켰다. 선수로 뛸 당시, 홀린스는 콘리보다는 라우리에 더 가까웠었다. 그는 단단하고 완고했으며, 1977년에 빌 월튼과 모리스 루카스와 함께 챔피언쉽 타이틀을 따낸 포틀랜드의 주축이었다.
멤피스에 부임하면서 홀린스가 프런트에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구단의 포인트가드 플랜을 확실히 정비하는 것이었다. 홀린스는 콘리나 라우리 누구든간에 상대방에게 자신들의 플레잉타임을 뺏길지 모른다는 근심을 가진 상태에서는 빛을 발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홀린스의 의중은 콘리에게 있었다.
"만약 우리가 마이크 콘리를 택하기로 한다면, 나는 그에게 충분히 실패를 겪을 만한 기회를 제공한 후에 그 결정을 확신할 수 있을 겁니다." - 홀린스는 그렇게 얘기했다. "내가 이곳에 부임하기 전에 프런트에서 그를 트레이드하려고 시도했던 걸 압니다. 또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구요. 어느 순간에 갑자기 그 어린 친구가 조금 더 발전했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죠.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그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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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GM인 왈라스는 홀린스에게 그가 콘리를 신임하는 한 어떤 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라면서 왈라스는 덧붙였다. "이 말을 미리 해놨죠. 콘리의 더딘 성장세가 실망스러웠고, 트레이드 오퍼도 실제로 왔었다구요. 물론 여러가지 이유로 성사가 되진 않았지만요. 하지만 저는 홀린스에게 확실히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홀린스는 당당하게 '그를 트레이드한다면 우리 자신을 팔아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린 그에 대해 아직 정확히 모르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제가 보기에, 그는 콘리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임무를 맡은 걸 상당히 기꺼워하고 벼르고 있었어요. 콘리를 믿었던 거죠. 콘리가 지금 우리가 아는 그 콘리가 아닌, 그저 어리고 기복이 있던 선수였을때부터 말이에요."
홀린스가 콘리에게 앞으로 그가 그리즐리스의 포인트가드가 될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콘리는 이 기쁜 소식을 다소 무덤덤하고 무디게 받아들였다.
"자네에게 기회를 줄 거야." 홀린스는 콘리에게 얘기했다. "만약 자네가 만족스럽지 못한다면 물론 다른 방법을 찾겠지만 말이지."
멤피스의 어시스턴트 코치인 조니 데이비스는 홀린스가 경기를 대하는 콘리의 섬세하고 세심한 접근 방식을 더 선호했다고 설명했다.
"라우리는 아주 적극적이었어요. '어디 한번 부딪혀보자, 누가 이기나 달려보자.' 이런 스타일이었죠. 콘리는 라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더 신중했어요. '어디 한번 살펴보자, 한번 신중하게 따져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걸 하자.' 이런 방식이었죠."
2009년 트레이드 데드라인 시기에, 멤피스는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라우리를 휴스턴으로 트레이드했다. (라우리는 휴스턴에서 더 발전했지만, 2012년 7월에 토론토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는 아직 완전히 터진 상태가 아니었다. 토론토로 이적한 이후 라우리는 올스타 레벨로 성장했고, 이번 시즌에는 동부에서 3번째로 좋은 성적으로 팀을 이끌고 있다..!)
"홀린스 감독은 콘리가 라우리의 존재에 대한 부담 없이 플레이하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 데이비스의 말이다. "콘리의 성격은 두루두루 잘 스며드는 그런 류였죠. 라우리와는 달랐습니다. 라우리는 강하게 달려드는 스타일이었고, 아주 적극적인 친구였죠. 하지만 콘리는 그를 믿고 그에게 편하게 자신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해주면, 리그에 있는 어떤 누구 못지않는 좋은 스킬들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타입이었어요. 홀린스 감독은 콘리가 해낼 수 있는게 어떤 것들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확실히 제공하기로 한 거죠. 만약 라우리와 함께 뛰었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에요. 콘리는 불화를 일으키거나 상황을 껄끄럽게 만드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아마 라우리의 백업으로 뛰는걸 받아들였을 테니까요. 그는 '난 경기에 무조건 뛸거야, 난 코트에서 내 시간만큼 뛸 거라구!' 이렇게 고집하는 스타일이 아니죠. 팀이 이기는데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결국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할 타입이니까요. 벤치 맨 끝자리에 처박혀 있으라고 하면 그렇게 할 녀석이죠."
다음 시즌, 홀린스로부터 그가 팀의 포인트가드라고 보장받은 상황에서, 콘리는 더 많은 출장시간과 더 많은 임무를 부여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막 이후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멤피스는 그의 커리어 황혼기 끝자락에 있던 앨런 아이버슨과 사인했다. 아이버슨은 여전히 슈퍼스타로서의 에고를 가지고 있었고, 선발로 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좋은 선수였고, 슛을 하라고 데려온 거였죠." 왈라스는 말했다. "팀에 아주 유리한 계약이었고, 어쩌면 기대 이상의 매직을 발휘할 지도 몰랐죠. 콘리와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계약이었어요."
하지만 아이버슨과의 계약은 콘리에겐 또 다른 난처한 상황이었다. 물론 어릴 적 아이버슨은 그의 페이보릿 플레이어중 한명이었다.
"그는 팀메이트로서도 쿨한 편이었고, 전 그를 좋아했어요." 콘리는 말했다. "전 그를 우상화했었죠. 하지만 전 아이버슨이 자신이 선발로 나올 걸 기대하고 왔다고 확신했고, 전 여기 앉아서 '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버슨은 팀을 떠나기 전 멤피스에서 3경기를 뛰었다. 그러나 아이버슨의 계약이 콘리의 NBA 경력에서 그저 일시적인 상황에 그쳤을 뿐이라고 해도, 계약과 관련된 화두는 콘리의 커리어 초기 내내 그를 신경쓰이게 했다.
"매년 우린 PG들을 드래프트했죠. 2010년에는 그레이비스 바스케즈를 드래프트했어요. 2012년에는 토니 로튼을 뽑았죠. 마음 한구석으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구단에서는 아마도 날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다른 누군가로 대체하려고 하는가 보구나..'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어요."
멤피스는 09-10시즌을 40승 가까이 기록하며 마무리했다. 퀸튼 리차드슨을 보내고 잭 랜돌프를 영입한 것이 주효했다. 하지만 홀린스는 계속해서 '터프한 애정'으로 콘리의 단련을 멈추지 않았다. "솔직하게 대해야 합니다." 홀린스는 말했다.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전부죠. 즉, 그게 제가 선수들과 함께 하려고 했던 방식입니다. 안좋은 소리를 듣는다 해도 그건 솔직하게 대했기 때문일 뿐이죠. 루디 게이와도 그랬고, OJ 메요와도 그랬죠. 콘리는 그에 대해 제게 별다른 얘길 한 적은 없지만, 콘리는 잘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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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린스의 그와 같은 지원 속에서, 콘리는 게임 내 전반적인 모든 면에서 향상되었다. 매년 여름 그는 더 나은 스코어러가 되기 위해 연습했고, 매 시즌 그가 NBA 연차를 쌓아갈 때마다 콘리는 코트가 환히 보이고 경기가 천천히 흘러간다고 느낄 정도로 게임을 보는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 아마도 제일 중요한 점일수도 있는 - 콘리는 그가 어린 시절 AAU의 재능넘치는 멤버들을 지휘하던 것처럼 멤피스 그리즐리스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코어링 포지션에 있는 동료들에게 공을 전달해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고, 그것은 이기적인 플레이에 대한 욕심보다 팀의 승리를 우선적으로 추구했던 그의 어린 시절 모습과 꼭 같은 것이었다.
"우리 팀에는 자기들이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젊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콘리는 얘기했다. "그래서 어느 동료를 보고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어야 했죠. '알겠어, 지금은 우선 자크(랜돌프)에게 밀어줘야 돼. 자크를 이용하면 20점차 정도로 이길 수 있다구.' 라고 말이지요."
2010년 11월, 콘리는 멤피스와 5년간 45M 규모의 연장계약에 동의했다. 그 계약은 당시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렇게 작은 마켓 규모의 프랜차이즈가 콘리가 팀의 기대에 못 미치는데도 그들이 로터리픽으로 뽑았던 그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계약 직전 시즌에 콘리는 시즌 평균 12득점과 5.3어시스트를 기록했었다.
그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GM인 크리스 왈라스는 2~3년안에 콘리가 그의 포텐션을 만개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콘리가 더뎌 보이지만 꾸준히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믿었고, 멤피스가 그와 연장계약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콘리가 FA로 팀을 떠나는 상황을 맞이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공개 시장에서 젊고 유망한 선수들은 항상 데려가고 싶어하는 구단들이 있기 마련이죠." 라고, 왈라스는 언급했다. 실제로 불과 몇 달 전인 2010년 여름, 그리즐리스는 루디 게이와도 5년간 82M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그가 FA로 나가는 것보다 멤피스가 게이를 지키기 위해 지불한 계약 금액이 더 규모가 컸었다.
"성장하고 있는 젊은 선수들을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로썬 계약을 안겨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왈라스는 말했다. "만약 조기에 연장계약을 하지 않는다면, 그 선수들이 막상 나중에 팀을 떠나는 선택을 할 때 똑같은 복사본을 만들어놓지 않는 이상 별다른 메꿀 방도가 없으니까요."
콘리는 그가 계약을 얻어낼만한 선수였다는 것을 보여주길 원했다. "밖에서는 아마 다들 그랬던 걸로 기억해요. '마이크 콘리가 누구야? 들어본 적이 없는데? 별달리 한게 없잖아?' 이렇게 말이에요." 콘리는 말을 이어갔다. "저는 제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어요. 사람들에게 그리즐리스가 내게서 어떤 것을 봐줬는지, 내가 몇년간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무엇보다도, 제가 얼마나 가치있는 선수가 될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게임에서 그랬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콘리는 그 날의 어떤 특정 장면만큼은 아직도 회고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마침내 '이제 내가 그리즐리스를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구나' 하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가 랜돌프에게 어떻게 해 주길 바란다고 요구했을 때, 멤피스의 빅맨은 놀랍게도 기꺼이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
"헤이, 잠시만 참아. 지금은 아직 아니야, 내게 시간을 줘, 이건 시합중이라구' 이렇게 얘기했었죠." 콘리는 당시를 그렇게 회고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지보는 터프하고 뚝심이 있잖아요. 지보는 진짜 상남자고, 저는 아직 어렸구요. 그리고 그 순간 이후부터 지보는 절 위한 베테랑이 되었어요. 만약 제가 지보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지보가 거기에 대해서 'All right."이라고 따르면, 저는 팀의 누구에게나 지시할 수 있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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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멤피스의 GM 왈라스는 파우 가솔 트레이드 당시 그가 그렸었던 장기적인 비전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았다. 마크 가솔은 체중을 감량했고, 두 가지 분야에서 NBA 최고의 센터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의 패싱능력과 수비능력은 랜돌프의 로우포스트 스코어링 능력과 완벽한 페어를 이뤘다. 8번시드로 서부 컨퍼런스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멤피스는 1번시드였던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1라운드에서 업셋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부 세미파이널에서 오클라호마 썬더를 7차전까지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스트시즌에서의 성공은 콘리로 하여금 그가 자신의 경기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팀 그리즐리스는 서부에서 다년간 컨텐더 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건 정말 고무적이었어요. 제가 더 나은 플레이를 해서 팀을 이끌 수 있다는 사실 말이죠." 콘리는 말했다. "제가 우리 팀을 이렇게 높은 곳까지 데려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제가 가진 가치가 어느정도 드러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한 가지 반증이었어요."
2012년 여름, 로버트 페라(Robert Pera)가 마이클 하이즐리(Michael Heisley)로부터 그리즐리스 구단의 최대 주주겸 구단주로써의 권리를 획득했다. 멤피스는 비록 샌안토니오에게 스윕을 당했지만, 당당히 서부 컨퍼런스 최종 결승 무대까지 진출했고, 이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 최고의 기록이었다.
한편 새로운 체제 하에서 시즌 중반 루디 게이를 트레이드 시킨 새로운 프런트의 결정은 홀린스와 구단과의 관계를 긴장 국면으로 만들었다.
"바스켓볼 비즈니스인거죠." 루디 게이가 토론토로 트레이드 된 이후 홀린스는 TN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 선수들 모두 바스켓볼 비즈니스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구요. 샴페인을 맛보고 나면 맥주를 지불하기 위한 예산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게 되죠. 우린 스몰 마켓이고 말입니다." 홀린스는 2013년 플레이오프 종료 이후 새로운 계약을 제시받지 않았고, 팀은 오랜 기간 어시스턴트 코치로 있던 데이브 예거로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전 그에게서 아버지의 느낌을 받았어요. 때론 엄하기도 하고, 저와 제 동료들에게 항상 최고가 되길 원하셨죠. 저희가 이루었던 모든 성공들은 감독님과 함께 한 것이었어요." 콘리는 홀린스가 감독직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데이브 예거와 같은 분이 계속 함께할 것이라는 걸 알고 다행히 많이 나아졌지요."
비록 콘리가 자신을 어엿한 NBA 포인트가드로 빚어준 지도자를 잃었다고 해도, 콘리는 홀린스 밑에서 다듬어져온 자신이 데이브 예거에 의해 완성되었음을 곧 느끼게 되었다. 이제 콘리는 그의 동료들을 위한 셋업을 전개해줄 때와 자신이 직접 스코어링 기회를 만들어내야 할 때를 구분하는, 그 힘들고 미묘한 작업을 아주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그건 마치 머릿속에 시계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요." 콘리는 말한다.
"저는 지보를 위한 시계를 하나 가지고 있죠. 마크를 위한 것도 있고, 코트니를 위한 것도 있구요. 코트 위에 있는 어떤 누구라도 마찬가지죠. 굳이 볼을 직접 가지고 플레이할 필요가 없는 동료들이에요. 토니 알렌이 더 효율적이기 위해서 공을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거죠. 지보가 훌륭하게 수비와 공격을 해내고 있으면 지보에게 포제션을 밀어주겠죠. 다시 몇 분이 지나서, 지보가 포제션을 쥘 만한 타이밍을 놓치고 있으면 제가 그걸 발견해요. 지보가 슬슬 공을 원할 때쯤이면 오케이, 이제 지보에게 스트레이트로 넣어준 이후 그가 뭘 해내는지 지켜보면 되는 거죠."
그리즐리스는 13-14시즌의 거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시간들을 만회하는 데에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서부 컨퍼런스 플레이오프 레이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마크 가솔을 무릎 부상으로 잃었고, 다른 경쟁자들보다 훨씬 뒤처진 출발을 했다. 그리고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그리즐리스와 댈러스 매버릭스는 플레이오프 시드 순위를 두고 맞부딪혔다. 그 경기에서 패하는 것은 8번 시드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1라운드에서 지난해 그리즐리스를 스윕해버린 천적 스퍼스를 만나게 됨을 뜻했다. 만약 승리한다면 그리즐리스는 7번시드가 되고, 마찬가지로 강력한 상대인 오클라호마를 만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서부 컨퍼런스가 늘 그렇듯이 쉬운 상대는 어차피 애초에 없으며, 거의 모든 시리즈가 7차전까지 진행될 만한 매치업들이었다.
멤피스와 댈러스는 더 나은 시드에 위치하기 위해 격돌했고, 경기의 승패는 사투 끝에 콘리가 경기 종료 직전 얻어낸 자유투 라인에 서서 샷 두개를 매듭지음으로써 멤피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리고 바로 그 일련의 순간에도,콘리는 얼음처럼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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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내에서 가장 큰 부분은 멘탈이에요. 항상 그 분야에서만큼은 제가 누구보다도 뛰어난 선수이고 싶어요." - 콘리의 말이다. "제가 슛을 놓치거나 좋지 못한 플레이를 했을 경우에도, 상대로 하여금 제가 짜증이나 화를 내고 있는 상태라는 걸 알지 못하게 해야지요. 제가 큰 경기 도중에 중요한 득점을 했을 때나 슛을 실패했을 때나, 아마 거의 똑같은 모습을 보실 거에요. (경기가 계속 진행되는 동안에는) 저는 바로 다음 플레이를 위해 움직일 테니까요."
팀의 CEO인 제이슨 레비엔(Jason Levien)은 경기장 안에 있는 모두가 매버릭스를 이겼다는 것에 흥분하고 있을 때 콘리만은 예외였다는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콘리를 제외한 저와 코칭스태프들과 모두가 다 흥분했었죠." 레비엔은 말을 이었다.
"그게 전형적인 마이크 콘리라는 사람이죠. 좋은 플레이를 펼치고, 가끔은 적극적으로 임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평정을 잃지 않아요."
콘리의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은 다소 감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료들(지보와 토니, 심지어는 마크에게 있어서도..!)에게도 많은 영향력을 미친다.
"콘리가 항상 경기에 집중해주고 있기 때문에, 모두들 매 순간마다 그를 의지하고 있어요. 콘리는 경기에 몰입하고, 절대로 너무 들뜨거나 처지는 법이 없죠. 제가 생각하기에, 특히 루디까지 팀을 떠난 이후에는 모든 이들이 점점 더 콘리를 따르기 시작했어요."
그렉 오든이 학창시절 빠른 속도로 스타덤에 오른 그 뒤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그들의 고등학교 동기들을 당시 올스타팀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은 콘리였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무릎 부상으로 몇 년간 뛰지 못한 오든은 마이애미 히트에서 그의 마지막 시즌을 보냈고, 그가 세대를 대표하는 빅맨이 될 기회도 이제는 사라지고 말았다.)
"저는 마이크가 자랑스러워요." 오든은 말했다. "제가 마이크의 일부가 되어서 함께 플레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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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콘리는 서부 컨퍼런스에 얼마나 많은 재능들이 득실거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그가 매번 올스타 레벨에서 플레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스타 게임에 선발되기가 요원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화려한 명성과 이름값을 지닌 다른 선수들이 그보다 먼저 올스타에 호명되곤 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제가 가진 궁극적인 목표는 올스타 팀이 되는게 아니에요." 콘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보다 더 큰 것이죠. 챔피언쉽 타이틀이요. 하지만 올스타가 되는 것도 제 다른 목표들 중 하나이긴 합니다. 작년에 플레이오프가 끝나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아직 승리한 게 아니다, 우린 아직 완벽한 팀이 아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기 위해선 올시즌에 제가 더 잘 해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팀을 우리 모두가 원하는 곳에 데려가고 싶어요. 우린 리그 최고의 팀들 중 하나죠. 우리 모두 각각의 포지션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아도 될 만한 그런 위치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겐 이번이 좋은 기회죠.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정말 가슴아플 거에요."
그리즐리스는 이 글이 씌어지는 지금 29승 12패를 달리고 있으며, 콘리는 18.1득점과 6.0개의 어시스트를 기록중이다. 콘리가 팀을 위해 펼치고 있는 모든 플레이들은, 랜돌프가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12월과 1월에 9경기를 결장하는 동안에도 그리즐리스를 서부 컨퍼런스의 정상에서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콘리가 소속팀을 정상으로 이끌고 있는 특별한 무언가를 찾지 못할 수도 있겠죠." 자신과는 다른 분야에서 성공을 써내려가고 있는 아들에 대해서, 콘리 시니어는 그렇게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진 않습니다. 만약 어떤 선수가 어떤 이력을 보고 나면, 그들은 다들 얘기하겠죠. '그가 승자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게 바로 마이크일 겁니다."
"지금 저와 마이크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 '과소평가된'이란 꼬리표를 아예 떼버리는 거에요. 그리고 그가 리그 최고의 포인트가드중 하나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콘리 시니어는 말한다.
"지금 시점에서 그가 우승 타이틀이 무조건 있어야지만이 그런 꼬리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건 좀 억울하다고 생각해요. 최고의 선수 중 한명으로 받아들여지려면 무조건 우승 타이틀은 하나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건가요? 마이크가 플레이오프에서 해낸 것들과 그가 리그 최고 포인트가드들을 상대로 어떻게 공수에서 해내고 있는지 보시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것들이 다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콘리와 함께 일하고 그가 리그에 진출했던 순간부터 그의 성장을 지켜본 이들에게, 콘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제 콘리는 고삐를 쥐고 팀을 이끌고 나가죠. 콘리는 자신이 달려나가면 멤피스가 함께 따를 것임을 잘 알고 있어요." 조니 데이비스는 이렇게 얘기했다. "실수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길 바랐던 그때의 멘탈리티와는 완전히 다르죠. 그 자체로 흔들림멊는 선수가 된 겁니다."
"그는 지금도 점점 더 나아지고 있어요. 리더와 팀 내에서의 목소리, 슈팅 등등 모든 면에서 우린 서로 얘기를 나누죠." 콘리를 'Little Brother'라고 부르는 랜돌프가 덧붙이는 말이다.
그리즐리스가 서부 컨퍼런스 플레이오프의 숨막히는 대결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때, 콘리는 그의 손 안에 볼을 지니고 있을 것이고 멤피스 전체는 콘리를 의지하고 있을 것이다. 멤피스 그리즐리스 전체가 -동료들, 코칭스태프들, 팬들 모두가 - 멤피스의 한 시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결정을 그 순간 콘리가 내려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점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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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출중한) 친구들은 그저 리그에 발을 내딛으면 그만이죠. 그건 간단한 일이에요." 콘리는 웃으며 얘기했다. "그 친구들은 빅마켓으로 가죠. 주목을 받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요. (반면에) 이곳 멤피스에선, 우리가 두각을 드러내고 세간의 관심을 받으려면 보통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되죠. 그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팀은 많은 역경들을 잘 헤쳐왔어요." 콘리는 덧붙였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강하고, 터프하게 무장된 팀이에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이해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요. 지보는 항상 이렇게 얘기해요. '헤이, 우리들은 진흙탕에서 헤쳐나왔잖아.' 라고 말이죠. 우린 저 아래에서부터 시작했어요. 그리고 지금의 우리 팀으로 만들어왔죠. 엄청나게 많은 돈이 거기에 투자되서가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FA사인도 없었죠. 우린 대부분 드래프트된 선수들이고, 몇몇은 트레이드로 합류한 친구들이구요. 우린 항상 '우리 스스로가 해내자구' 이렇게 다짐하곤 해요. 저와 제 팀원들은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서 여기까지 이르렀는지 잘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팀에 대해서 어떤 자부심 같은 것들을 강하게 느끼고 있어요. 그리고 아직 만족하긴 이릅니다. 아직 우리의 목표가 남았으니까요."
제프그린이 합류하고 랜돌프가 복귀한 그리즐리스는 연승을 내달리고 있으며 서부 2위, 사우스웨스트 1위를 기록중이다. 그리고 콘리를 비롯한 그들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첫댓글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론 티그와 콘리 가장 과소평과된 양 컨퍼런스 PG가 아닐까 싶네요
저는 마이클 콘리 좋아합니다ㅎ
저는 몬타도 좋아합니다.. 콘리와 몬타 가장 과소평가 된 가드들이 아닐지..
@멤피스VC 그래도 아는 사람들은 아는 플레이어들이죠ㅎ 튀지않아서 좋습니당
역시 멋진 선수였군요. 좋은 글에 추천남기고 갑니다.
꺄 내 넘버원 포인트가드 ㅠ
올스타전 한번 못간 포인트 가드 콘리 ~~~ ㅠㅠ
인기도 안습 콘리 ㅠㅠ
저도 참 좋아합니다
화이팅
콘리 화이팅!!
요즘 리그에 몇안돼는 빅맨 잘쓰는 포인트가드라고 생각합니다. 올스타보다 우승을 먼저하게됄지도...
콘리의 플레이를 보면 항상 단단하고 안정적인 운영력이 느껴졋는데 자기성격에 기인한 바도 크군요
저도 콘리 스타일 좋더라고요~
정이 가는 가드인데...생각했던 그대로의 선수였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비나 빌럽스 같은 향기에요
포인트가드 포지션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었는데..
이게 정말 매력적인 포지션이란거 다시 느끼게 해주는 글이네요
진짜 좋은 글이네요. 번역하신 분도 옮겨 주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흥미로운 글 옮겨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뷔때부터 콘리를 눈여겨보면서 느꼈던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네요. 아이바로니가 계속 감독이었으면 멤피스에 남아있지 못했을거 생각하면 홀린스 감독이야 콘리에겐 진짜 제 2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