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역(籌筆驛:주필역에서)-이상은(李商隱)
당시삼백수 권4 칠언율시 214. 주필역(籌筆驛)- 이상은(李商隱) 〈주필역(籌筆驛)에서〉(제갈공명을 그리워하며) |
籌筆驛(주필역)
李商隱(이상은)
猿鳥猶疑畏簡書(원조유의외간서),
風雲常為護儲胥(풍운상위호저서).
徒令上將揮神筆(도령상장휘신필),
終見降王走傳車(종견항왕주전거).
管樂有才原不忝(관악유재원부첨),
關張無命欲何如(관장무명욕하여).
他年錦里經祠廟(타년금리경사묘),
梁父吟成恨有餘(양보음성한유여).
<원문출처> 籌筆驛/ 作者:李商隱 / 本作品收錄於:《唐詩三百首》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
원숭이와 새들 아직도 그의 군령 두려워하는 듯
바람과 구름은 늘 목책처럼 호위하네
부질없이 상장군이 신이한 계책을 내놓게 하더니
끝내 항복한 후주(後主) 역마 타고 가는 것 보고 말았네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의 재주는 끝내 욕되지 않았건만
관우와 장비가 죽었으니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지난날 금리(錦里)의 사당 지나노라니
〈양보음〉 읊고 나니 한(恨)이 끝없어라
--------------------------------------
[通釋] 지난날 제갈량이 주둔했던 이곳은 그때의 삼엄한 군기가 남아 있어, 사람에게 놀라는 원숭이와 새들은 아직도 그의 군령을 두려워하는 듯하고, 바람과 구름은 그 터를 호위하듯 늘 에워싸고 있다. 애석하게 제갈량이 신이한 계책을 내놓았어도, 후주는 끝내 항복하여 역마를 타고 촉 땅을 떠나 낙양으로 가고 말았다. 관중과 악의의 재주에 비견되었으나, 그를 돕는 관우가 장비가 죽고 없으니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지난날 금리에 있는 그의 사당을 지나면서, 그가 즐겨 읊조리던 〈양보음〉을 부르니 마음속에 끝없는 감회가 일어난다.
[解題] 대중(大中) 10년(856) 겨울, 동천절도사(東川節度使) 유중영(柳仲郢)의 막부에 있었던 이상은(李商隱)은 유중영을 따라 장안으로 돌아온다. 이 시는 이때 주필역을 지나면서 지은 작품이다. 제갈량을 경모하는 마음과 더불어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을 담고 있다.
1·2구는 원숭이와 새, 바람과 구름 등의 자연물을 통해, 당시 제갈량 군영의 삼엄한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1·2구가 자연물에 기대어 시인의 감정을 드러낸 것이라면, 3·4구는 20여 년 후 등애(鄧艾)가 공격하자 후주가 항복하고 낙양으로 압송된 역사적 사실을 말하였다.
5·6구는 관중과 악의에 견주어지던 제갈량의 재주를 찬탄하면서 동시에 관우와 장비가 비명에 죽은 사실을 말해, 제갈량에게 훌륭한 계책이 있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장수가 없었음을 한탄하였다. 이 구절은 제갈량을 관우·장비에 대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지막 7·8구는 시인 자신의 정회가 깊게 드러나는데, 제갈량이 은거하던 시절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양보음〉을 부르면서 풀어낸 것처럼, 이상은(李商隱)도 이 시에 자신의 영락한 인생을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 ≪唐詩鼓吹評注(당시고취평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무후의 일을 추억하여 그것을 마음 아파한 것이다. 먼저 무후가 일찍이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그 군법이 엄정하여 지금도 물고기와 새들이 여전히 이를 경외하고, 또 충심(忠心)이 천지를 감동시켰기에 바람과 구름이 오래도록 그 벽루(壁壘)를 호위하여 허물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애석한 것은 무후가 계책을 세워 신처럼 지휘하였지만 결국에는 후주가 널을 지고 항복한 일을 보았으니, 그날의 출병은 헛수고가 되었을 뿐이다. 제갈량은 관중와 악의에 스스로를 견주어도 참으로 부끄러울 바가 없었으나, 관우와 장비가 비명에 죽고 한(漢)나라의 명운이 끝내 옮겨간 것을 어찌하겠는가. 지금 이 역에서 느끼는 바가 없을 수 없고, 지난날 성도를 지나면서 사당에 배알할 적에, 〈양보음〉을 읽은 것은 선생(李商隱)이 세 사람을 안타까워한 것으로써 무후를 안타까워한 것이니 슬픔이 또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
○ 籌筆驛(주필역) : 옛 역의 이름으로, 터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광원현(廣元縣) 북쪽에 있다. 제갈량이 위(魏)를 정벌하기 위해 출군하여 이곳에 주둔하면서 붓을 휘둘러 공문을 쓰고 책략을 내었는데, ‘籌筆(주필)’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猿鳥(원조) : ‘魚鳥(어조)’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 簡書(간서) : 본래는 죽간에 작성한 문서를 지칭하였는데, 여기서는 군령(軍令)을 말한다.
○ 儲胥(저서) : 주둔한 군대가 방비를 목적으로 설치한 목책(木柵)과 울타리를 지칭한다.
○ 上將揮神筆(상장휘신필) : ‘上將(상장)’은 상장군인데 여기서는 제갈량을 가리킨다. ‘揮神筆(휘신필)’은 제갈량이 귀신같이 훌륭한 계책을 내어 전투를 지휘했음을 뜻한다.
○ 降王走傳車(항왕주전거) : ‘降’은 항복할 항이다. ‘降王(항왕)’은 투항한 왕 곧 유선(劉禪)이고, ‘傳車(전거)’는 역거(驛車)이다. ≪蜀志(촉지)≫ 〈後主傳(후주전)〉에 “등애(鄧艾)가 성(城) 북쪽에 이르자, 후주(後主)가 널을 수레에 싣고 스스로 결박한 채 군루문(軍壘門)에 나아갔다. 등애(鄧艾)가 결박을 풀고 널을 불사른 다음 맞이하여 만나보고, 명에 따라 후주를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제수하였다. 이듬해 후주가 가족을 데리고 동쪽으로 옮겨 낙양에 이르렀다.[鄧艾之城北 後主輿櫬自縛 詣軍壘門 艾解縛焚櫬 延請相見 因承制拜後主爲驃騎將軍 明年 後主擧家東遷至洛陽]”라는 내용이 있다.
○ 管樂(관악) : 관중(管仲)과 악의(樂毅)를 말하는데, 관중은 춘추시대 제(齊) 환공(桓公)을 도와 패업을 이루었고, 악의는 연(燕) 소왕(昭王) 때 제나라의 7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제갈량은 평소에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자주 빗대었다.
○ 忝(첨) : 욕되다는 뜻이다.
○ 關張無命(관장무명) : ‘關張(관장)’은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를 지칭한다. ‘無命(무명)’은 ‘非命(비명)’으로, 명대로 살지 못함을 말한다. 관우는 형주(荊州)를 지키다가 손권(孫權)의 부장 여몽(呂蒙)에게 공격당해 죽었고, 장비는 자신의 부장 장달(張達)과 범강(范彊)에게 죽임을 당했다.
○ 他年(타년) : 왕년(往年)의 뜻이다. 시인은 당(唐) 선종(宣宗) 대중(大中) 5년(851) 성도에 이르러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사당을 지나면서 〈武侯廟古柏(무후묘고백)〉을 지었다.
<참고>고백행(古柏行) -두보(杜甫)
○ 錦里(금리) :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남쪽에 있는데, 이곳에 제갈무후의 사당이 있다.
○ 梁父吟(양보음) : ‘梁甫吟(양보음)’이라고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옛 악곡명으로, 제갈량이 즐겨 읊던 곡조이다. ≪三國志(삼국지)≫ 〈蜀志 諸葛亮傳(촉지 제갈량전)〉에 “제갈량은 직접 밭에서 농사지었고, 〈양보음〉을 즐겨 불렀다.[亮躬耕隴畝 好爲梁父吟]”라는 구절이 있다.
<참고>梁甫吟(양보음)/梁父吟(양보음) - 諸葛亮(제갈량:孔明)
[고문진보]梁甫吟(양보음)/梁父吟(양보음) -..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
본 자료의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이상은(李商隱, 원화 7년(812년) 또는 원화 8년(813년)~대중 12년(858년))은, 중국 당나라의 관료 정치가로 두목(杜牧)과 함께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자는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谿生) 또는 달제어(獺祭魚)이다.
이상은의 시는 화려하고 때로는 관능적이며, 때로는 상징적이다. 특히 연애시에서 이상은 시의 특색이 발휘된다. 그는 애정시 방면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고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읽어냈다는 평을 받는다. 무제(無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을 포함해 이상은은 아예 제목을 짓지 않거나 혹은 간단히 시구에서 빌리는 정도로 제목을 붙였는데, 만당시의 경향인 유미주의를 보다 더 추구하여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을 구사하고, 몽롱하며 환상적이고 관능적인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였다. <위키백과>
---------------------------------
[출처] [당시삼백수]주필역(籌筆驛:주필역에서)-이상은(李商隱)
[출처] [당시삼백수]주필역(籌筆驛:주필역에서)-이상은(李商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