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祈禱)는 일념(一念)으로 하라.
통도사는 부처님의 정골(頂骨) 사리를 모시고 있는 불보사찰이며
해마다 화엄산림을 한 달간에 걸쳐 봉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통도사 도량에는 팔만 사천 화엄신장이 옹호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이라고 하는 경은 참으로 존경해야 하고 모셔야 하고 알아야 할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하셨는데 팔만대장경이란 방대한 경전 중
화엄경은 가장 진리가 심오하고 또 양도 가장 많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화엄경의 이치를 설해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므로 이 화엄경의 뜻만 조금 안다 해도 불교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방대한 경전이라 화엄산림 기간동안 하루 1시간씩
한 달 동안 해도 80권의 뜻을 다 알 수도 없고, 다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화엄법회라고 해서 환희심이 난 화엄 신장님과 부처님이 옹호하는 법회를 열어서
많은 불자에게 부처님의 뜻을 전달하고 경을 존경하고,
경에 예배드리고 이렇게 하면 우리의 업장이 녹아들고,
또 공덕이 생겨 복을 받으며 원하는 바가 성취되므로 화엄법회가 참 소중한 겁니다.
바닷물이라 하는 게 손가락으로 한번 딱 찍어 먹어보면 바닷물인 줄 알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화엄법회를 하게 되면 화엄경의 뜻을 다 알기보다도
사실은 화엄경 일 품이나 일부만 들어도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일념보관삼세사(一念普觀三世事)하니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라.’
전생을 과거, 금생을 현재, 내생을 미래라 하지만
금생(今生)에서도 어제는 과거 오늘은 현재 내일은 미래입니다.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는 법이고 오늘이 있으므로 어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드시 삼세(三世)가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일념으로 생각을 잘 가다듬어서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일을 관해보니까
과거가 지나간 것도 없고, 미래가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현재 이 시간도 없더라는 겁니다.
우리 범부(凡夫)들 생각은 그 시간이라는 게 전후가 있는데 전후가 있는 것은 중생의 분별심입니다.
그러나 분별이 없는 부처님이나 큰 선지식, 보살의 경지에는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어.
그래서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라 지난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별을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합니다.
화엄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도리를 설해놓은 경입니다.
화엄경은 상설 변설(常說遍說)입니다. 화엄경은 항상 설하고, 늘 설하지.
무슨 한 달 동안만 설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본래 화엄경의 이치를 바로 듣고, 바로 설한다면 입으로 설하는 게 아니고, 귀로 듣는 게 아닙니다.
시간적(時間的)으로 상설(常說)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화엄경은 계속 설해지고 있고, 또 공간적으로도 변설(遍說)입니다.
어디 설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량 국사가 화엄경을 주석하면서 서문을 지었는데 그 서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불기수왕(不起樹王)하고 나칠처어법계(羅七處於法界)라.’
보리수 밑에서 선정 중에 화엄경을 설했기 때문에 보리수 아래에서 일어나지 않고
거기에서 칠처구회(七處九會)를 온 법계에 망라해 다 설했다는 말입니다.
칠처구회는 화엄경 설한 장소가 일곱 곳 있다는 말인데 인간에서 네 군데, 천상에서 세 군데.
그러니까 보리수 거기 앉아서 그만 온 지구를 다 다니고 도리천에 올라가 설하고,
야마천에 가서 설하고, 도솔천에 설하고, 천상으로 갔다가 왔다가 했다는 뜻입니다.
육신(肉身)은 유한(有限)이기 때문에
여기서 저리 가면 여기는 없고 저기서 여기로 오면 저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에서 우리 마음을 일러서 말한 법계(法界), 법신(法身)은 청정하여 광대무변합니다.
청정하고, 모양이 없고, 형체가 없으므로 우주에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공간이 법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게 허공이지만 허공보다 더 큰 게 뭐냐 하면 마음입니다.
마음의 보따리를 가지고 허공까지 다 싸는데 허공은 마음을 다 쌀 수 없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큰지 깨치면 알지만 깨치기 전에도 앉아서 생각해 보세요.
지금 각각 자기 집 부엌에 깨소금이 어디 있고 참기름이 어디 있고, 쌀은 어디 있고 환하지요?
몸이 안 가도 우리 생각은 전부를 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은 끝이 없고 한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깨달으면 법신을 깨닫는 것이고 법신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 법문이 끝나고 나면 끝나는 게 아니라 화엄경의 본처에서 본다면
이것이 시작 전이나 후나 7일 전이나 한 달 후나 화엄경의 이치는 항상 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적(時間的)으로 늘 설하고 공간적으로 설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화엄경의 진리를 설한 게 아니라
진리는 영원히 본래 있으니 법신 상주(法身常住)라는 게 법계(法界)라는 겁니다.
그 법은 흘러가는 물소리도 법문 소리요, 바람 소리도 법문 소리요,
새 우는 소리도 법문 소리, 꽃도 법문을 설합니다.
조사 스님 말씀에 뭐라 했느냐 하면 ‘명명조사의(明明祖師意)’라.
하나하나 모든 나무나 풀 그 자리에 부처님이나 조사의 뜻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부처님만이 부처님을 알고 중생만이 중생을 안다는 뜻이요,
전체가 부처님의 법신으로 볼 때는 우주공간 전체가 설법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은 저 등롱(등불을 덮는 덮개)이 설법하고 기왓장이 설법하고 기둥이 설법한다 했는데
이것이 무정설법(無情說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릅니다.
자기 기준에만 맞추어 사바세계는 말로 귀로 들어야 알지 듣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세계, 극락세계도 말하지 않고 알아듣습니다.
바람만 슬 불어도 그 바람 소리가 다 그만 아미타 부처님의 법문 소리입니다.
그만 척 삼매를 증득(證得)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업이 많아 잘 안 됩니다. 안되기 때문에 참회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화엄경을 많이 아는 것도 좋지만 이 경에 대한 공덕이 한량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이 경을 서사(書寫) 하려고 종이에 먹을 갈아 서사 하려는데 그만 그 종이에서 오색 광명이 놓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을 쓰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화엄성중(華嚴聖衆)이 좋아하고,
부처님이 좋아해서 그 종이에 오색 광명이 놓아지니 환희심이 나고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옛날에는 사경하고 목판 했다가 현재는 전자 입력으로 하니 편리하지만, 신심이 없어졌습니다.
종교인은 편리하게 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을 배우는 데 내 마음이 편안한 것을 첫째로 배워야 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야 몸도 편안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행복하지,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데 아무리 재산이 많은들 그게 큰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화엄경이란 경전에 있는 것만 부처님의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눈앞에 다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게 진리냐 하면 한마디로 조심하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불행이 다가오지 않고 조심해야 불행을 물리칠 수 있고 조심해야 불행을 피할 수 있습니다.
조심 아닌 게 방심입니다. 우선 몸을 조심해야 합니다.
몸조심하는 게 뭐냐 하면 천수경에 있는 살생 중죄, 투도 중죄, 사음 중죄, 이것 안 하는 게 몸조심하는 것입니다.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물쇠로 꼭 잠가놓고 필요할 때만 열어야 합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쓸데없는 말이 많아집니다. 그러면 남 흉보는 말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뜻 조심, 마음 조심입니다. 마음 조심이 뭐냐 하면 탐진치(貪瞋癡)를 조심하는 겁니다.
탐심(貪心)을 내면 안 됩니다. 원력(願力)과 탐심은 다릅니다.
원력은 정당하게 이루고자 하는 수행이나 기도하는 것이지만
목표를 위해 남을 밟고 디디고 하면 목표를 이루어 보았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천수경에 탐애중죄(貪愛重罪)-라고 있잖습니까? 또, 진에중죄(瞋恚重罪)가 있습니다.
진심(瞋心)도 한 번 낼 것을 반만 내고 점점 줄여 가야 합니다.
화엄경을 거꾸로 읽어 보았자 남 흉이나 보고, 진심이나 내고,
게을러빠진 사람이 화엄경을 이고 다니면 뭘 하겠습니까?
진심은 참 나쁜 것입니다. 진심은 마음속의 불입니다. 진심이 나도 억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어찌 이 세상의 본질이 고통인데 뜻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안 되는 것은 나의 과거 업의 소치인 줄 알고, 업을 참회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가야 행복이 오지,
자기가 해놓은 것은 책임 안 지고, 왜 나는 이런가. 원망만 가지면 안 됩니다.
진심(嗔心)은 공덕의 숲을 다 태우고 말기 때문에 진심(嗔心)을 인욕(忍辱)을 해야 복이 되고,
공덕이 되고 기도한 걸 그대로 받습니다.
‘욕행보살도(欲行菩薩道)’라. 누구든지 보살도를 행하라. 인격이 점점 향상하는 게 보살도입니다.
인욕을 해서 자기의 진심(瞋心)을 늘 잘 지켜라. 이게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입을 조심하고,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심하는 것이 기도요, 조심하는 것이 복 짓는 것이요,
조심하는 것이 남에게 존경받는 것이고, 조심하는 것이 행복을 초래하는 원인이 됩니다.
통도사는 자장율사 스님이 창건했습니다.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일주일 동안 기도를 했는데 그때 머리가 흰 스님이 나타나
부처님의 지절사리(指節舍利)와 정골사리(頂骨舍利), 치아사리(齒牙舍利), 부처님 가사(袈裟) 등을 주면서
법문을 해줬는데 이 법문은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 게송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범어로
아라바자나 달례다카야 나가혜가나 달례노사나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 여시해법성 즉견노사나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則見盧舍那
온갖 법을 알고 보면 제 성품 아무것도 없느니
이렇게 법의 성품을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일체 법을 깨닫고 나면 자성이 공(空) 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지절(指節)‧정골사리(頂骨舍利). 가사(袈裟)는
부처님의 사상이 아니고 분상처럼 성보(聖寶)입니다.
사상을 무엇으로 전했나 하면 화엄 사상입니다.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 님에게 받은 게송이 화엄경에 있는 게송이기 때문에
통도사에서는 화엄산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불자 여러분, 일념으로 기도하십시오.
금생(今生)에 잘 닦아 기도, 염불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줘서 극락이나 천상에 나기를 기원합니다.
- 지관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