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16. 큐티
마태복음 9:27 ~ 34
소경과 벙어리
관찰 :
1)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나고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지고, 주님은 그곳에서 떠나가셨습니다. 주님은 회당장의 선대와 무리들의 추종을 뒤로하시고 자신이 가셔야 할 길을 다시 가신 것입니다. 야이로는 덕망있는 사람으로 그를 심복으로 삼아 기존의 종교 세력들과의 연합을 도모하는 것도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인간적인 방식을 추구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실로 주님은 자신이 말한 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2) 주님을 따라오며 소리지르는 두 소경
- 27절.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 이들 소경들의 고백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곧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면 자신들의 눈 먼 것이 낫게 될 것과,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 정통하다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면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이들의 고백이 병을 낫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하는 립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응대하심
- 28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 이들 소경들은 이들 소경은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서 나가시는 상황에서 쫓아나가며 소리를 질렀고, 또 집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들어가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 그런 소경들을 귀찮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줄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들의 믿음을 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앞에 나온 기사에서 열 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과 열 두 해 사경을 헤매고 죽음을 맞이한 소녀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치유를 받은 것과 같이 이 소경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주님은 주문하시는 것입니다. 곧 믿음입니다.
- 이 믿음은 의사에게 자신의 환부를 보이며 낫기를 구하는 그런 정도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곧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는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지, 하나님이심을 믿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 29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 소경들의 대답은 “그러하오이다”였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그들의 눈을 어루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하셨습니다. 소경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구원도, 치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기계적인 치유나 구원은 없습니다. 어떤 원리대로 따르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식의 일은 없습니다. 소경들의 바른 믿음이 주님의 능력을 끌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 30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 그 눈들이 밝아졌습니다. 한 쪽 눈만 보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네 개의 눈이 모두 다 밝하졌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권능이고, 치유의 능력입니다.
- 주님은 이들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필두로 하는 종교 세력들과의 필요 없는 마찰을 원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방식을 원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기사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해석되고 선포되는 것을 주님은 더 소중히 여기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 마 9:35에서도 주님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기 이전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이유가 되는 것이었고,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하나의 양식으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이 치유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 31절.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 예수님은 엄하게 말씀하셨지만, 이들 소경이 눈 뜬 것 자체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
- 32절.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 소경들이 눈을 뜨고 나갈 때, 다른 이들이 주님이 거쳐하시는 가버나움의 집으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 33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다고 나오지는 않지만 귀신이 쫓겨났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무리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놀랍게 여기며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 자체는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거쳐하시는 집을 에워싸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그렇게 응시하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자 하는 이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곧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34절.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부르거나 만나거나 어떻게 동원하는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반대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귀신의 왕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행태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귀신의 왕의 인도대로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데 사용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르침 :
1) 예수님은 소경도, 귀신들려 말 못하는 자도 고치셨습니다. 믿음으로 이 일을 하심으로 영적인 세계의 일들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은 자신들이 본 일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해야 할 말도 바르게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곧 영적으로 소경되고 영적으로 벙어리 된 자들이라고 마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들을 귀신의 왕의 힘을 입어서 하는 것이라고 궤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참된 것을 보았어도 그릇된 것으로 보였고, 참된 것을 증거해야 했음에도 예수님을 훼방하는 짓들을 했습니다.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표현이요 가르침입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말씀이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르게 해석되고, 다르게 인용되고, 다르게 사용되는 일들을 봅니다. 동일하게 이 시대도 하나님의 일들을 왜곡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세의 특징입니다.
2) 주님은 능히 더 많은 기사를 이루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허공에 대고 세상의 모든 소경은 낫게 될 지어다라고 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소경이 낫게도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낫게 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곧 기계적인 사역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역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획일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주님의 솔루션이 될 수 없습니다. 긍정적이면 모든 일이 다 좋게 된다? 어떤 기도원에 가면 다 문제가 해결된다? 이렇게 하면 다 된다? 이런 식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문제를 통해 주님을 만나게 하심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방법을 동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주님은 자신이 있으신 것입니다. 어떤 문제라도 주님 앞에 개인이 들고 나아갈 때 주님이 해결해 주실 수 없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며, 진짜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소경과 벙어리가 진짜 소경과 벙어리가 아니고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참 소경과 참 벙어리였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적용 :
1) 모든 문제의 핵심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 길이 막히면 모든 것은 임시방편일 뿐이고 본질적으로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문제의 해결도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것으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큐티를 하면서 이것으로 만족해하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을 더욱 개인적으로 만나는 만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고 큐티를 날마다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닌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맛보면서 주님의 은혜에 더 갈급하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은혜임을 믿습니다. 예수로 충만하게 되는 길로 가는 여정임을 믿습니다.
2) 아내를 떠나보내고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 생각합니다. 때론 원망스럽기도 하고, 납득이 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천국에서 주님의 품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나의 모습이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그 어떤 때보다 더 친밀하게 되고,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길 구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 역시 간절히 원하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나 역시 극도로 싫어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로 충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신앙을 소유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