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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된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의 꿈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2023.7.13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7월의 근현대사적지는
<몽양 여운형선생 서거지>(서울 혜화동 로터리)입니다.
7월의 근현대사적지 캠페인은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도 함께 합니다. / 필자주
혜화동 로터리,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
'혜화동 로터리' 버스정류장은
'여운형 활동 터'라는 이름이 병기되어 있는 정류장이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서울시가 유명 독립운동가의 활동 터 근처
버스정류장을 정비할 때 14곳 중 한 곳으로 포함된 덕분이다.
여운형 선생 서거지 [사진-필자 제공]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 표석이 설치되어 있는 곳도
'여운형 활동 터' 버스정류장 바로 옆이다.
여운형 서거 70주기를 맞은 2017년에
여운형 선생을 추모하며
선생의 고향인 양평군과 서거지가 있는
서울 종로구가 공동으로 건립한 표석이다.
바로 이곳이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선생이 서거한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뉘면 쓰러질 것이요 합하면 일어서리라"
이곳은 1947년 7월 19일
오후 13시 15분에 해방 후
민족분단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온 힘을 기울이시던 몽양 여운형(1885-1947) 선생께서
민족반역자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흉탄에 쓰러지신 애통한 역사의 현장이다.
표석에 새겨진 문구 중에
"민족반역자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흉탄"에 쓰려졌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여운형 암살이 단독범이었다고?
여운형 선생 사진 [사진-필자제공]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숙소로 쓰고 있던 명륜동 정무묵의 집에서
국수로 점식식사를 마친 후,
리무진을 타고 길을 나섰다.
여운형은 계동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은 후 서울운동장에 갈 참이었다.
그날 서울운동장에서는
한국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을 기념한
영국과의 친선 축구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만능 스포츠맨으로 유명했던 여운형은
당시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 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도 함께 맡고 있었다.
그런데 여운형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에 진입하기 직전,
파출소 앞에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 나와
여운형의 차를 가로막았다.
여운형이 탄 차는 서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차에 달려든 괴한은 여운형을 향해 권총 세 발을 발사했다.
개인 경호원 박성복이 권총을 빼들고 달아나는 괴한을 쫓아가는 사이,
비서 고경흠은
운전수 홍순태와 함께 여운형을 인근 서울대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하지만 세 발 중 가슴과 어깨에 맞은 두 발의 총알이
복부와 심장을 관통한 탓에
달리던 차 안에서 바로 절명하고 말았다.
사건 현장에서 이상한 일도 있었다.
박성복이 파출소 옆길로 달아나는 괴한을 쫓아가다가
파출소에서 뒤늦게 나온 경찰에 범인으로 몰려 시간이 지체되면서
진짜 범인을 놓치고 만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지 미군정사령관의 부관이었던 버치 중위는
여운형이 암살된 이틀 후 작성한
'경찰과 여운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남겼다.
보고서에는
"암살자는 암살의 장소로 경찰 지소의 앞을 선택했다"면서
"이것은 경찰의 개입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암살자들이 경찰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찰들은 여운형의 친구들을 체포하는 데에만 성공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는 여운형의 경호원 박성복을 조사한 이후에는
"경찰행정을 바꾸지 않는 한
여운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 (21)여운형의 죽음과 친일경찰>,
경향신문, 2018. 8. 19.)
수사에 나선 경찰은 사건 발생 닷새 후인 7월 24일 범인을 체포했다고 발표하였다.
경찰에 체포된 범인은 평양 출신으로
월남한 열아홉 살의 미성년자 한지근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수사를 책임지고 있던
수도경찰청(청장 장택상)은
공범과 배후 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에 밀려
신동운을 공범으로 함께 송청했지만,
수사 검사 조재천은
한지근의 단독 범행으로 쉽게 결론내리고
신동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재판에서 한지근은 무기형을 언도받았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개성소년형무소에 있던 한지근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은 그렇게 묻히는 듯했다.
이달의 근현대사적지 포스터 [사진-필자제공]
여운형의 죽음은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좌절을 상징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지낸 김자동(1929-2022)은
자신의 회고록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2018, 푸른역사)에서
여운형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몽양은 독립운동경력도 경력이거니와
준수한 용모와 탁월한 웅변술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당대의 인걸이었다.
여러 정파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가 얽힌 해방 공간에서
남-북, 좌-우, 찬탁-반탁 세력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사람은 몽양뿐이었다.
몽양의 죽음으로 분단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여운형은
중국 망명 시절 1919년에는
신한청년당을 매개로 한 3·1운동의 기획자 구실을 했고,
그해 11월에는 일본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라면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명연설을 하여
자신을 초청했던 하라 내각을 붕괴시키고
일본 정국을 들끓게 만들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다가
1936년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폐간을 감내해야 했던 여운형은
1944년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면서
비밀결사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해방을 맞이한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
1차 미소공위에서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과 악수하고 있는 여운형.
가운데가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1946.05) [사진-필자제공]
여운형의 해방 이후 행적은 그의 더 높아진 위상을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해방과 함께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의 위원장을 맡았고,
'조선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과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5년 이내의 신탁통치' 등을 담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나온 이후에는
김규식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의 선봉에 서서
헌신한 인물이 여운형이었다.
1945년
우파 성향의 잡지 《선구(先驅)》 12월호에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이승만(21%)과
김구(18%)를 제치고
여운형이 33%의 지지를 받아 1위를 차지했다.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이 대중의 신망과 기대 역시
얼마나 높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 여운형이
"민족반역자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흉탄에 쓰려지고 말았으니
김자동의 말대로 "몽양의 죽음으로
분단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막아보고자
북행을 결행했던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의 마지막 노력마저 무산되면서
여운형이 그렇게 막고자 했던 한반도의 분단은 끝내 현실화되었고,
우리 민족에게는 불과 2년 후에 찾아올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27년 만에 나타난 4명의 공범과 또 다른 공범 신동운
1974년 2월 5일
김흥성·김영성·김훈·유용호 등 4명이
<일요신문>에
자신들이 27년 전에 벌어진
여운형 암살 사건의 공범이라고 밝히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시 범인으로 잡힌 한지근이 단독 범행이라고 한 진술은
"각본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후 자진 출두하여 검찰의 조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여운형은
송진우, 박헌영 등과 함께 처단해야 할 대표적인 민족 분열분자였다면서
"민족의 분열과 공산화를 막기 위해"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강변했다.
자신들은 1945년 12월 30일에 벌어졌던
송진우 암살 사건을 지휘했던 한현우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한현우의 '애국운동'에 크게 감화 받은 것이
여운형 암살에 나선 계기였다는 주장도 했다.
아울러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이고,
평양 출신이 아닌 평북 영변 출신으로
나이도 미성년자가 아니라
당시 21세의 청년이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폭로했다.
이들은 여운형 암살의 배후는 없고
자신들이 전부라면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고자 나섰다고 했다.
하지만 범행에 사용된 45구경 권총을
백색 테러단체인
백의사(白衣社)의 친일파 염동진(1909-?, 본명 염응택)으로부터 받았고,
역시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革新探偵社)의 양근환(1894-1950)으로부터
일본 99식 권총도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혔다.
아울러 이들은 염동진과 양근환은 물론
김영철(1892-1969)로부터 여운형을 살해하라는 암시를 받았다는 말도 남겼다.
이는 배후를 부인하면서도 사실상 배후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온 세 사람 중 일제의 밀정 노릇까지 했던 염동진은 그렇다쳐도
양근환과 김영철의 이름은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여운형 장례식(서울운동장) [사진-필자제공]
양근환은 1921년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을 척살하고
12년간 옥살이를 했던 인물이었고,
김영철은 1920년 광복군총영장 오동진의 명령을 받아
서울에 들어와 조선총독부·남대문역·종로경찰서 등을 폭파할 거사를 준비하던 중
아서원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한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중에는
국수주의에 빠져 테러에 의존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양근환과 김영철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도 확인되었다.
단독범으로 지목된 한지근이 체포된 저동의 ㈜유풍기업 2층 살림방에는
다른 공범도 함께 있었지만,
경찰이 한지근만을 체포해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의 지시로
한지근을 체포한 강력계 주임 박경림의 진술과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은 폭로였다.
박경림은 당시 안내를 맡았던 신동운이
"일당은 세 명이나 한 명만 데려가라고 했기 때문에
한지근만을 연행했다"고 진술했다.
암살 사건의 배후에 경찰이 있었다는 증거로 사용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지근이 체포되기 전
범인들과 경찰의 사전 조율이 있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대목이었다.
경찰에 한지근이 있던 유풍기업 2층을 안내했던 신동운은
여운형 암살 사건의 배후 관계를 풀 열쇠를 쥔 인물이었다.
1974년, 그는 4명의 공범이 검찰에 출두하여 진술하고
검찰이 자신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자
부담을 느꼈는지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신동운은
송진우 암살 사건 재판정에서 만난 김흥성(한현우의 공범인 김인성의 형)과
한현우의 집에서 만난 이필형, 김훈, 유용호 등
여운형 암살 사건의 공범들에게
김영철, 양근환 등을 소개한 인물이었다.
특히 한지근과 동향 사람인 김영철은
"민족분열주의자는 좌우를 막론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암살 사건의 공범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범행에 사용할 권총을
양근환과 염동진으로부터 구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준 이도 김영철이었다.
신동운은 사건 발생 후
자신과 김영철이 수사과장 노덕술과 합의하여
한지근의 단독범행으로 만들었다고 진술하여
경찰과 사전조율이 있었다는 점도 사실로 확인해줬다.
하지만 "나 이상의 배후는 없다"고 하여
여운형 암살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여운형 묘소 [사진-필자제공]
몽양 여운형, 이제는 분단극복의 상징 인물로
여운형의 장례식은 사건 발생 보름만인 8월 3일 오전 여덟 시에
광화문 근로인민당 당사 앞 광장에서 열렸다.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꾸려진 장의위원회가 주도한 여운형의 장례식은
해방 후 치러진 최초의 인민장이기도 했다.
여운형의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되었다.
수유리 여운형의 묘가 대중적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1991년 남북여성토론회에 북측 대표로 참석한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묘소를 참배했을 때였다.
딸이 44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장면이었지만,
합의에 없던 김일성의 조화가 등장하면서 벌어진
남북 양측의 옥신각신은 분단된 한반도에서나 볼 수 있는 비극적 장면이었다.
이제 얼마 후일지 알 수 없으나,
남과 북이 함께 여운형의 묘에서
전쟁이 아닌 남북 합작을 통한
평화통일을 다짐하는 행사를 기꺼운 마음으로 열 수만 있다면
, 76년 전 혜화동 로터리에서
"민족반역자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흉탄에 쓰려졌던 여운형 선생도
기꺼이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7월의 근현대사적지로 선정한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는 구글 지도
(https://google/maps/XVVY5tYxJkbeainr5) 와
네이버 지도 (https://naver.me/5fjQqvhb) 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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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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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가 조선
그렇다... 1763년 천하전여총도에 기록된 일본국은 왜노였다.
이 왜노국이.. 원조 일본 영국과 미국에 의해
일본국으로 역사와 문화가 이식되여 다시 신일본으로 태어나
한민족 말살정책에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원조 일본 영국과 미국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며 문명국인냥
전세계인을 속이고 살고있는 것이다.
가짜 일본을 왜 만든 것을까?
지구 황제국을 배신한 댓가가 후세에 알려질 경우 너무 두려웠기 때문 일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대조선인들을 죽이고
고려인들까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키고...
유태인이 독일에게 당한 것 보다 수십 배는 더 클 것이다.
원조 일본은 어디에 있었을까?
1418년 그린 천하전여총도 지도를 1763년 모사한 지도에는
열도 일본은 왜노 라고 나옴.
고로 혼일강리도의 열도 일본한자는 조작..
그리고 한반도는 고려라고 되있고
중국 한반도 열도 왜노는 같은색상.
이것은 중국은 천자국 조선황제가 계신곳의 글 처럼
조선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영토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화미연회공국 ㅡ 1893년 시카코 박람회
1893년 고종이 주체한 시카코 박람회 화미연회공국.
시카고가 대조선의 왕국수도였다
명성황후 무덤크기는 얼마만 했을까? ㅡ 참조
무덤 미국에 있음?
타국 외교관을 가지고 놀았던 명성황후를
일루미나티가 1895년 미국에서 청일전쟁 일으키고
명성황후를 살해.
이후 대조선 국력이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
청은 대조선 왕실..황실은 고종.
1897년 대조선 미국땅 주인 고종이 고려에서 대한제국 연방으로 개명.
1904년 이후
우리땅 중국과 연해주 소련으로 쫒겨와 살던 한민족과 그 후손들인 사할린 동포나,
소련에서 독립한 스탄 국가 동포들이 자신들은 고려인이라고 함.
1899년 대조선 군벌인 청나라가 의화단 난을 일으킴.
이때 대한제국 제후국 서방 8개국이 합작으로 난을 진압후
미영프가 북경으로 들어와서 땅을 차지하기 시작.
전세계를 다스리다 1800년대 부터 국력이 약해졌지만,
1902년 6월 14일
뉴욕 타임즈 사설에
고종 황제는 월가 대주주 큰손이다 보도.
L' OGRE D' ORIENT ㅣ 북미(北美) =꼬레(COREE)를 청소하기 위해
황인종들을 아귀(餓鬼)가 집어삼켜서 세계 각지로 찢어발기다
1904년에 그린그림.
보스톤 박물관에 소장.
우리땅인 코레=미국을 삼키기 위해
황인종을 한국인 포함 2500만명을
중국.한반도 열도 왜노로 실어 날랐다는 의미의 그림.
진짜 한반도는 아래
1905년 가쓰라 밀약의 가쓰라 수상과(좌) 테프터 전쟁부 장관.
가쓰라는 서양인 얼굴 ㅡ 미국이 세운 가짜 왜놈?
▲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국기 게양대에 걸린 일장기가 성조기로 교체되는 사진.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로 교체? ㅡ 남한을 식민지 만들기 시작?)
주한미군이 2020년 9월 9일 공개했다.
이후는
공지글 5.18 폭동 ㅡ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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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으로 분단시킨 원흉이 누군지 부터 알아야 함?
왜노는 41년 미국이 유도하여 진주만 침략후
미군이 아시아 전쟁에 참전하자
43년 부터 국력이 약해져 항복할 기회를 엿보고있었음.
그해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군 미영소가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합의.
그런데 미국이 약속을 안지키고
미영소가 45년 2월 얄타에서 만나
전범 왜노를 독일처럼 분단 안시키고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전쟁하기로 약속.
8월 9일 왜노국에 원폭투하.
8월 10일경
미국이 지도보고 38선을 그어 소련에 제시..스탈린도 ok.
이후 소련군은 북한으로 들어갔지만 김일성이 6개월만에 돌려보냄.
남한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1926년 중국에서 서울로 이전한 조선 총독부 건물에 일장기 내리고
태극기 대신 성조기 게양후 남한땅 주인이 되기위한 작업 시작.
독립군 여운형.김구,송진우.김규식. 김원봉 등 좌익과(진짜 보수)
친일파를 거느린 이승만 세력과 싸움붙이며 식민지 만들기 작업 시작.
이후 45년 12월 송진우 암살 시작으로 독립군들 줄줄이 암살.
(1945년
우파 성향의 잡지 《선구(先驅)》 12월호에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여운형이 이승만(21%)과
김구(18%)를 제치고
33%의 지지를 받아 1위를 차지했다.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이 대중의 신망과 기대 역시
얼마나 높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위에 나오듯이 여론조사에서 이승만 21%. 여운형 33%로
친일파 이승만보다 인기가 올라가자
미국의 지시를 받아 친일파가 47년 여운형을 암살?
48년 봄
김구선생이 남북 공동선거위해 방북하고 돌아오자
급해진 미군은 통일이 아닌 남한 단독선거한다고 발표.
이때 제주도민이 반대 시위하자.
미군이 4.3 사건을 일으켜 수만명 학살..
결국 제주도를 제외한 형식적인 선거를 치러
이승만은 국회의원에 당선된후
미국 지시대로 졸개 의원들이 대통에 추대하여
8월 15일 미국이 졸개 이승만을 임명하여 식민지 정부 수립?
48년 12월 1일 일본의 치안유지법을 본따 국가 보안법 제정.
미국이 임명한 바지사장 이승만은
반민특위 해체하여 친일파 청산 1명도 못함.
오히러 골수 친일파 김창룡을 방첩대장에(보안대) 임명?
또 골수 친일파 노덕술을 수사과장으로 임명.
그런데 노덕술이 독립군 김원봉을 잡아 빰을 때림.
울분을 달래다가 김구 선생이 방북할때 함께 가서 눌러앉음.
이후 김창룡 노덕술 지시로? 김원봉 가족을 학살.
49년 김구 선생도 미국이 암살.
6.25 전까지 이런식으로 친일파 경찰과 보안대가 수십만명 학살?
49년부터 북진통일한다고 속여 3000회 북침하여 북한주민 학살.
김일성이 참다 못해 스탈린한테 허락받아 6월 23일 밤 10시 전면전 시작.
부산제외 전부 점령하자.
위 얄타에서 약속대로 스탈린이 거부권 행사안해
9월 15일 맥아더가 유엔군을 끌고 인천상륙작전 개시.
이때 김일성은 스탈린한테 속았다고 깨달음?
이후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자
유대인 모택동한테 연락하여 참전시킴.
밀려 내려와 중소가 김일성을 설득하여
3년만인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위 얄타 약속대로 6.25는 미소가 이길려고 한 전쟁이 아님.
결국 한반도는 초토화되고
3년간 520만명 이상 학살 당함.
본국 대통 잘못만나 참전한 미군과 유엔군은 개죽음 당한것?
미국이 전범 왜노한테 3년간 전쟁물자 보급시켜 부흥시킴?
72년 박정희가 몰래 이후락 방북시켜 김일성과 회담.
이때 자유왕래 하자고했다고 함.
북한 부수상이 내려와 박정희와 회담후
7.4일 오전 동시에 남북한 공동선명 발표.
그런데 3달후 유신헌법 발표후 독재정치 시작하여
약속을 안지켜 통일 무산됨?
박정희가 몰래 핵을 개발하자 살해?
여운형 김구암살.
박정희가 김일성과 약속 불이행으로 통일기회를 3번 무산시킴.
80년간 병을 주다가
전두환때부터 약을 주기 시작하여
95년 남조선 돼지가 통통해지자,
미국이 다시 남북한을 집어 삼킬려고
미국 스파이을 투입하여 개방시켜 2년만에 IMF를 만들어
17개 대기업 삼키고
심성전자 포스코를 비롯한 20대 기업 삼킴.
또 수십개 금융기관 삼키고
주택.국민은행 통합시켜 삼킴.
이것으로 20대 기업과
4대은행은 이름만 한글?
이때부터 남한은 경제까지 장악당해 완벽한 미국 식민지가 됨.
95년 동시에 북한을 삼키기위해
소련 붕괴로 힘이 약해진 러시아와 중국을 끌어들여
식량지원 중단하여 북이 무너지면 통일이 아닌,
미일중러 친일파가 나눠먹기 밀약.
결국 95년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어 98년 극복.
이때 정주영이 고향 빚 갚는다고,
98년 소떼를 몰고 방북하여 김정일과 회담하고 돌아옴.
이때 김정일이 평양은 기름위에 둥둥 떠있다고 발언.
돌아와서 김대중한테 전달.
절대 반대하는 부시를 단독으로 100분간 설득하여 방북 허락 받아
김정일과 만나 군부대 15km 뒤로 물리고
월급 5만원 남짓 받기로 하고, 개성공단 건설.
처음 25만평에 공장 125개 입주.
기업들 연간 30배 이익 챙김.
남조선 일자리 연간 10만개 이상 창출.
이때 2000만평에 공장 가동 합의 경제통일후
구두로 1억평 가동하여 완전통일 합의.ㅡ 일자리 몇개 창출?
그런데
명박이 들어선후 남북경협 방해하기 시작하다
연평도에서 한미가 북을 향해 사격훈련.
북이 하지마라고 방송.
변함없어 고사포로 200발을 바다로 날리며 경고.
그래도 변함없어
북이 전파교란 시켜 핸드폰.레이더 먹통시키고,
연평도 산을 향해 수백발 발사하여 불바다가 됨.
해병대를 보고 사격햇다면 전멸?
이후 천안함 폭침 시키고 북한테 덮어씌워 대북제재 시작.
바지사장 명박근혜는 개성공단 억지로 끌고가다
16년 2월 근로자들이 설쉬로 내려온 사이
갑자기 3일후 개성공단 폐쇄한다고 발표.
기업주들이 사정해서 7일만에 폐쇄.
이후 미국 방어위해 사드와 레이더 2기 배치.
문가도 미국 시키는대로해서
19년 신년사때 아무 조건없이 댓가없이
개성공단 재개.금강산 관광 허용한다고 발표.
문가는 침묵.
그런데 8.15 경축식때 2045년 통일한다고 발표.
다음날 정은이가 참다못해
남이 써주는 메모만 줄줄읽는 삶은 소대가리다 발표.
친일파라서 사드 4기 추가배치..
이후 탈북자가 미국과 국정원 자금 지원받아 전단지 날리기 시작.
김여정이 3번 경고.
문가는 단속안함.
결국 개성공단 사무소 폭파시킴.
이것으로 4번째 통일기회 무산시킴.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과 친일파가 방해하여 통일기회를 4번 놓침?
20억톤 희토류 가치만 10경원 이상?
20대 광물 대부분 5위이내 매장 ㅡ 북한땅은 노다지?
북에 매장된 사우디 2배 석유만 팔아도
연간 500조는 들어온다고 봄.
개성공단만 합의대로 진행됐다면 지금은 경제통일하여 자유왕래 시작?
이후 2030년 전후 완전통일?
남북한 국민들 세금한푼 안내도
대학까지 무상교육 가능?
한민족은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뛰어나 완전 통일하면 세계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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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 일본인?
1 -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시절.
일본에서 조선 드림을 꿈꾸며 260만이라는 일본인들이 넘어와
조선인의 골수를 빨아 먹으며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살고 있었음.
2 - 일본이 핵 맞고 전쟁에서 패하자
일본인들이 일본 본토로 돌아가야 하는 데
미군이 재산 반출을 제한 하여
현금은 1천엔과
휴대가 가능한 보따리 정도만 갖고 돌아갈 수 있었음.
당시 국내 기업의 85%를 가지고 있었던 놈들은 재산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음.
3 - 잔존 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싶었던 이승만은
그 놈들을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남게 해 그대로 대우해주고 싶어함.
4 - 그렇게 남은 숫자는 많게 잡아 130만이나 되었고
어지러운 국내 상황에 족보를 사서 성씨를 만들거나,
유명한 족보에 끼워넣기를 하여 신분 세탁을 통해 잔존하게 됨.
(김씨, 박씨, 이씨 가 많은 이유...)
5 - 이들은 어리숙한 언어를 고치기 위해 YMCA에 모여 조선어를 공부를 하였음.
6 - 정체를 들키면 조선인에게 돈 뺏기고 쳐 맞을테니
조선인이 많지 않은 곳에 터를 잡고
자기네끼리 여기 저기서 모여살기 시작함.
7 - 1 세대들은 얼굴이 알려진 사람도 있을 테고 한국말도 어눌하였으나
2 세대들은 생김새는 같은 동양인에다
한국말도 잘하니 사회로 기어나오기 시작하면서 정계 진출을 함.
8 - 그들이 소속된 당은 민정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 자한당 --> 국민의 힘 으로 이어져 옴.
9 - 재벌, 정치인, 종교 활동을 이끄는 자들의 80%는
호적 세탁한 잔존 일본인이라는 말이 있어서
일본이 장악하던 은행에서 혜택을 받았다고 함.
10 - 80년대 100대 기업 중 30명이 진주 산골마을의 같은 초등학교 동문.
삼X 이X철, LO 구X회, 효X 조X제 등..은
그곳의 풍수지리가 좋아서 대기업 회장이 되었다는데...
풍수지리 좋은 곳인가 봄...
11 - 이들은 여전히 집에서는 일본 잠옷을 입고
일본 이름을 지어 서로를 부르며 문 앞에 일본 명패를 붙여 놓음.
ex) 맹바기 형
오다상 이름 밑에 "Only as for the japanese"
남은 잔류 일본인 130만이 뿌리 내려서 일본 모국을 잊지 않고 지지 하기에
우리 상식을 벗어나 일장기 흔드는 놈들이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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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265만 명이나 되는 일본인들이 이 나라에 와서 살았다.
식민국가 건 백만 단위의 상전 국가 놈들이 와서 살지않은 나라가 어딨겠나?
해방 직전, 남한에 187만,
북한에는 78만 일본인이 살았다.
북한에 상대적으로 절반도 안 되게 적은 건,
일본으로부터 거리도 멀고
지금도 그렇지만 춥고 척박해서 가서 살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진과 함흥 원산 등지에만 좀 많이 살았다.
<소화국쇄연감>에 따르면
해방 후에 일본에 돌아간 일본인 들은 최대한으로 봐도 131만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77만은 북한측 일본인들이다.
북한은 해방 후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
거기 남는대도 자기 재산을 지킬 수 없으니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이 친일파 청산하자 못견디고 월남한 사람들 단체가 서북쳥년단.
ㅡ애넘도 섞여 있엇다고 봄.
문가 부친은 흥남시청 산업 과장 ㅡ 농지담당 과장.ㅡ 권력자)
남한 땅 기록에서 사라진 133만 일본인은 어디 갔을까?
가지 않았다.
여기 한국지역에 그대로 남아서 가짜 한국 이름 하나 짓고 그대로 남았다.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만큼
한국말은 유창해서 문제가 되질 않았다.
집, 땅, 공장 등 부동산을 어찌 다 포기하고 돌아가겠나.
남은 재산도 부피 나가는 것은 못 갖고 돌아가잖나?
더구나 미군 폭격 맞아 폐허 사막만 남은 일본에
빈손으로 털털 돌아가 봐야 거지꼴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33만 일본인들은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
북한과는 달리 자본주의 국가여서 여기 남아야 부귀영화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한 주재 일본인 187만 중에 50만 넘게는 일본에 돌아갔다.
일본인들이라고 다 재산만 밝히는 정신 나간 놈들만 사는 것은 아닐 테니까.
더구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인적자원 확보'를 위해 이들을 반기고
"당신들 재산 및 특권 일제강점기처럼 다 보장하리라" 하면서
일본인들을 마구 붙잡았다.
이들이 대한민국 전역에 사학을 세우도록 국가 보장해 줌으로써,
신분 세탁 및 재테크 수단으로 삼고,
민중 친일 세뇌 고착화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이 133만 일본인들이 한국에 남게 되었고,
이들은 70년간 자연 증가로 지금은 약 9백만...
그래서 한국은 잔존 일본인의,
잔존 일본인을 위한,
잔존 일본인에 의한 나라가 됐다.
잔존 일본인 무리는
해방 직후 가진 것과 배운 것이 더 많은 '사뭇 다른 출발선상'에서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순 천민자본주의니
처음부터 배운 거 가진 거 많은 일본 놈들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ㅡ 명박 부친 이름이 시마다니.
전라도에 농토 400만평.
40년대 농토를 지키기위해 명박 형제들을 보냇다고 봄.
형님 상은은 다스 사택에 일본문패 부착.
애넘 1명이 이정도 토지 소유.
당시 위 일본인과 그기에 빌붙어서 먹고사는 친일파가 10%정도.
80%는 농토를 헐값으로 빼앗기거나 강제로 빼앗겨 80%는 소작농으로 추락.
30대 재벌 대부분 친일파 후손이거나 토착 왜구?
이병철은 이완용 손자
석현의 부친 친일파 판사 홍진기는
4.19때 발포 명령내렸다고 사형선고 받음.
박정희때 이병철이 애기해서 사면받음.
이후 아들딸 이건희와 홍라희를 결혼시킴?
60년대 이병철이 중앙일보 창간.
이후 지금 석현의 부친한테 넘겨 줌?
삼성,중앙일보도 친일파 후손?
사대주의 노예근성이 몸에 배게된 원인은 ㅡ 글 참조
반민특위 기념식 ㅡ 글 참조
조중동은 비롯한 30대 재벌 대부분 골수 친일파 후손들??
친일인명 사전 ㅡ 글 참조.
해방후 한국인으로 개명한 잔존 일본인이 80~130만명 추정?
지금 몇명이나 될까??
ㅡㅡㅡㅡㅡㅡㅡㅡ
친일파 61명 토지만 4억 4000만 m2 = 서울면적 70%.
1177명 부동산만 45억평.
해외 재산 도피처에 밝혀진 예금만 1850조,
실제 2800조 추정.
해방후 한국인으로 개명한 왜넘이 80~130만명?
지금은 몇명일까요?
근혜때부터 정부에서 자료 요청하면 보내준다고 함.
비리 자금으로 밝혀지면 돈도 돌려준다고 함.
그런데 여야 모두 친일파와 한편이라 아몰랑??
이승만 부터 윤까지 전부 미국이 임명?
허경영은
당선되면 6.25 유공자와
월남참전 유공자한테 일시불로 3억 지급하고,
월 300만원 지급 공약?
이승만 부터 윤까지 전부 미국이 임명?
120년간 법앞에 10.000명만 평등한 미일 식민지 독재국가 남조선?
120년간 미일과 친일파 식민지인줄 모르는 국민이 90%이상?
북이 남조선 괴뢰정부라고하는것은 진실?
전시작전권이 없는것은 미일 식민지 괴뢰정부 증거? ㅡ
30대 재벌 99%는 친일파 후손들?
지배층 1% 중에 90%는 친일파 후예들?
말이 필요없음,
친일파 후예들 전부 퇴출시켜야 진정한 해방?
공지글 5.18 폭동 ㅡ 참조
친일인명사전 4776명 ㅡ 참조
골수 친일파 후손들의 가면 ㅡ 참조
코리아 전쟁 진실을 벗긴다 전문을 게재 ㅡ 참조
이진석
전두한때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한국인은 들쥐같다 누가 대통되도 잘 따른다.
카터 전 대통이
북은 밉지만 존경스러운 적.
남은 강아지.경멸스러운 동맹이다 ㅡ 동맹이 아니고 노예. 머슴?
윤 할애비는 1898년 태어났는데
일본에서 고교.대학을 졸업햇다고 함.
1910년대 한국인이 일본에서 고교 졸업한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극우대학 졸업.
1931년 한반도에서 부친 출산했는모양.
연세대 졸업하고 일본 장학금으로 할애비가 졸업한 극우대학 졸업?
결국 토착왜구라고 봄?
언제까지 두고 볼건가?
명박도 토착왜구?
bbk 특검 ㅡ 참조
해방후 한국인으로 개명한 왜놈이 130만명?
지금 몇명일까?
이승만부터 윤까지 전부 미국이 임명?
윤가는 아에 대놓고 나는 윤완용이다 떠벌리고.
재벌과 미일 이익위해 돌격대장 노릇?
언제까지 두고 바야하나?
https://blog.naver.com/bmss4050/222883092255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과 반민특위 해체?
반민특위 기념식 열린다 ㅡ 참조
친일인명 사전 4776명 ㅡ 참조.
전국 뉴라이트 연합 회원 ㅡ 참조
첫댓글
https://blog.naver.com/bmss4050/223057975053
'5.18은 폭동' 세뇌교육받은 전두환 손자 체포.."5·18 유족에 사과"
ㅡ 5.18 진실 왜곡 교육 받았다? ㅡ 스위스 비자금? ㅡ토착왜구 몇명?
https://youtu.be/RWs4Yi2WAQk
예루살렘과 3차 대전 /
John Hagee의 종말론 /
맹목적 이스라엘 추종의 뿌리
PLAY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bmss4050/223075735603
내년 총선은 여야 나눠먹기? ㅡ 해법은?
암튼 딥스의 방해되는 인물 케네디처럼 살해
그리고 각종 섹스 스캔들로 얼룩지게 조작해서 미디어에 유포하거나 ㆍ빨갱이로 몰아가고
딥스들이 다 없어지고
새 세상이 와야
진실을 알겠거늘 ᆢ
천자국 대한민국을 남북으로 갈라놓은것도 딥스고
6.25를 일으켜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게해서
서로 대립되게 만들고
민심이 동요되어 민주화투쟁을 일으키면
과잉반응으로 시민을 향해 발포하는 딥스들
남ㆍ북대립으로 전쟁상황인양
만들고
재미군인들
재미군인 주둔케하여
막대한 세금 국민들에게 뜯어내는
대한민국을 안정적인것처럼 보이게 하는 딥스들의 눈속임
미군인들이 하는짓은
정치
국민들 동태파악하는 딥스들의 하수인들
다
정치인과 재벌들 미국 딥스들과 짜고 치는 작전들
빨갱이 없앤다는 이유로
죄없는 서민들 산골짜기로 끌고가
골로간다는 말도 나온
집단 총격사건
여수 ㆍ순천사건
제주도 사건
광주사건등
한민족을 다 말살시키려는
딥스들의 계획
귀한 정보,고맙습니다..._()_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082406635772264&mediaCodeNo=257&OutLnkChk=Y
이재명 "국민의 위대한 승리"…강서구청장 승리 메시지
진교훈 후보 당선 확정 후 SNS 통해 남겨
"국정 실패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자 회초리"
윤완용 탄핵 하자는 말은 절대 안함? ㅡ 윤과 한편증거?
변희재가 태블릿조작으로 불법 탄핵시킨 증거 책을,
올초 주었는데도 입도 벙긋 안함?
윤과 재명은 같은 부모가 키우는 아들?
내년 총선은 여야 나눠먹기? ㅡ 해법은 아래
https://blog.naver.com/bmss4050/223075735603
https://blog.naver.com/bmss4050/223205918496
태블릿 조작해서 불법탄핵시킨 범인이 누구인지 증언 할 사람 국회 출석 청원 동참 요망?
ㅡ 윤석열 입당 전 녹취록...통화한 사람은 누구일까?
https://blog.naver.com/bmss4050/223239987690
당선자 미리 결정?
ㅡ 자유변협, 공직선거법에 대한 개정 없이도
아래와 같은 투개표제도 개선 방안을 즉각 시행할 수 있다.
https://m.cafe.daum.net/trumpandtheknight/nCMB/2435?svc=cafeapp
중산층 말살 프로젝트
작설차 이것도 주사파쉐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