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치야 요시오는 1911년 일본 야마가타현의 극빈 농가에서 태어났다. 지주가 빼앗아가는 쌀가마에 어머니가 달라붙어 울던 기억이 또렷하다. 학교에서 존경하던 선생님에게 ‘만주 개척’ 이야기를 듣고 가난을 이겨내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군대에서 돈을 모아 고향의 부모님께 새집을 지어드리고 싶었다. 1931년 자원입대한 쓰치야는 특유의 근면성실함으로 인정받았다. 1933년 급여가 일반병의 5배인 헌병 상등병 후보자 시험에 합격했다.
1934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한 농민을 고문할 때 쓰치야는 ‘나는 벌 받을 거야’라면서도 ‘오장(하사)이 될 때까지는 열심히 하고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이후 패전 때까지 10년간 쓰치야는 수많은 중국군을 붙잡아 고문한 실력으로 ‘특고(特高)의 신’이라고 불렸다. 최말단 이등병부터 시작해 장교 계급인 소위까지 진급했다.
쓰치야는 일본이 패전하자 푸순전범관리소에 수감됐다. 중국인 관리소원 ‘류 반장’은 쓰치야를 친절하게 대우했다. 자신은 중국인들을 사람 대우한 적이 없었다는 죄책감이 쓰치야의 마음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어느날 쓰치야는 류 반장 앞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극악무도한 인간이다. 중국 인민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 노다 마사아키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전범(戰犯)들을 인터뷰해 <전쟁과 죄책>에 담았다.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아버지와 선배 의사들이 죄책감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의문을 품었다. 노다는 “일본의 의학이 실은 전쟁의 은밀한 유산 위에 구축됐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전쟁범죄를 고백하고 평화운동을 하는 전범들이 노다의 인터뷰에 응했다. 생체실험, 고문, 살인의 경험과 당시 생각과 감정이 자세하게 담겼다.
노다가 만난 전범들은 자신의 손으로 살아있는 인간을 고문했고, 학살했고, 해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쓰치야 요시오는 초년병 시절 ‘배짱 키우기 교육’이라는 명목에 따라 포로들을 “주저함 없이 큰 소리를 지르며 찔렀다”고, 도미나가 쇼조는 견습 사관 시절 포로의 목을 단칼에 절단하자 “드디어 ‘임무’를 다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오노시타 다이조는 한 병사가 매독을 치료하는 민간요법으로 중국 농민을 살해해 뇌를 먹었다고 증언한다.
잔인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의 전쟁신경증 발병률은 베트남전 참전 미군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소련군에 비해 훨씬 낮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지 않았고 악몽을 꾸지도 않았다. 영락없이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로 보이지만 이들은 모두 참전하기 전에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노다는 ‘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슬픔을 느끼지도 않는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전범들은 어렸을 때부터 마을, 학교, 가정에서 전체주의를 내면화하며 군국소년으로 성장했다. 국가의 번영을 위해 약자나 소수자의 희생은 어쩔 수 없으며, 역경을 이겨내고 강자가 돼야 한다는 논리를 내면화했다.
“나는 지금도 도미나가가 겪은 소년 시절의 무력감, 그 무력감을 돌보려 하지 않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문화가 ‘그대로 전쟁에 빨려 들어가는 청년’을 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죄의식을 묻는 것은, 타자의 슬픔을 감싸 안는 문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다는 일본을 ‘감정 마비’의 사회라고 본다. 감정을 억눌러 ‘상처입지 않는 정신’을 갖춰야 사회인으로서 인정받는다. 개인을 집단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며 권위와 질서에 순응하기를 강요하는 모습은 제국주의 일본과 현대 일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 사회는 일본 사회와 얼마나 다른지 찬찬히 생각해보게 된다. 노다는 “감정을 억압해온 사회는 왜곡된 채로 젊은 세대에게 이어지고 있다”며 ‘상처 입을 줄 아는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스로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감정에 대해 충분한 상상력과 공감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그의 감정은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질서를 갖게 된다. 명예나 수치와 관련된 감정은 비대해지는 반면, 자신이나 타인의 감정에는 냉담해진다.”
쓰치야는 소학교에서 일왕의 사진에 절하며 “신의 자손이신 천황 폐하, 우리 국민은 천황 폐하를 신으로 우러러 모시옵니다”라는 ‘수신(修身)’을 배웠다. 월요일 아침마다 학교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고 맹세했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씁쓸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