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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주, 변산 반도에 놀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굿판을 구경하였다. 우리 집(삼례)에서 격포항까지는 1시간 반밖에 안 걸린다. 격포항에서 배를 타고 위도까지 들어갔다가, 위도 선착장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면서 잠시 논 후에 격포항으로 돌아오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변산에 잘 아는 횟집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 집 위치는 채석강과 적벽강 사이쯤 되고, 그 집 이름은 좀 싱거우나 외우기는 좋은 '싱싱횟집'이다. 싱싱횟집 김사장은 상 차리는데 시간이 좀 걸릴 테니 바닷가에 나가 산책이나 하고 오라고 한다. 그 덕분에 굿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적벽강 절벽 위에는 '수성당'(水聖堂)이라는 이름의 성황당이 있다. 누군가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바닷가에 지어진 성황당 중 남아 있는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작년 여름에 이곳에 왔을 때에도 나는 이 성황당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찾아내었다. 아름답던 해변도로는, 무슨 '아쿠아랜드'인가, 무엇인가 하는 엄청난 규모의 물놀이 시설이 시공되는 탓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해변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한참이나 달리다가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서 산길로 접어든 후 또 한참을 들어갔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포기하려고 할 때 "둥둥둥둥......"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끌려 그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니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작은 공터가 나왔고, 거기에는 고급 승용차 두 대와 승합차 한 대가 서 있었으며, 승합차 뒤 쪽에는 소풍이라도 나온 듯 뚱뚱한 여자들 두 세 명이 자리를 펴고 앉아 강아지를 어르며 과일을 깎아 먹고 있었다. 세워 놓은 표지판을 보니, 제대로 찾아 온 것이 틀림없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에,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2
차에서 내려 성황당 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진짜로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나타났다. 내가 가까이에서 굿판을 본 것은,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이 때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성황당 건물 옆에 일종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1미터 정도의 높이로 만들어진 그 무대는 배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단을 쌓고 그 위에 작은 배를 올려놓은 것이다. 배의 안 쪽이 무대였다. 그리고 그 배에는, 한 사람의 여자가, 누가 보아도 무당인, 신기(神氣)가 철철 넘치는, 한 사람의 여자가 타고 있었다. 내가 거기에 도착한 그 시간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제 막 굿판을 벌이려고 하는, 바로 그 시간이었던 듯, 무당은 배 위를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워밍업하는 권투 선수처럼 가볍게 뛰어 보기도 하였다.
이 여자가 뛰면 음악이 따라 나왔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판소리의 고수가 소릿꾼의 소리에 응하듯, 무당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며 북과 꽹가리를 쳐주었다. 북은 세워 놓고 꽹가리는 눕혀 놓은 채, 오른 손으로는 북채를 잡고 북을 치고 왼 손으로는 꽹가리를 쳤다. 리듬은 지극히 단순하였다. 그냥 "쾅쾅쾅쾅쾅쾅쾅쾅" 하는 것으로, 아무런 기교 없이 꽹가리와 북을 동시에 쳤다. 다만, 무당의 움직임이 크면 크게 쳐주고, 움직임이 작으면 작게 쳐주는 식의 변화가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보니, 이 남자가 무당의 움직임을 리드할 때도 있는 듯했다. 이 남자는 무대 아래에 놓인 일종의 평상 같은 곳에 아무렇게나 앉아 한 쪽 다리는 평상 아래 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는데, 그 발에는 화려한 빽 구두가 뒤꿈치가 꺾인 채 신겨 있었다. 이 사람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티셔츠 차림의 남자는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 굿이 진행되는 동안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다. 축구선수 우성용과 (너무나) 흡사하게 생긴 이 청년은 평상복 위에 조선시대 동자들이 입던 고깔 달린 청색 두루마기를 걸친 채 무당 앞으로 나아가, 뒷짐을 지고 꾸부정하게 서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세 사람이 굿을 베푸는 무당 측이라면, 이 한 사람은 그 맞은 편, 즉 굿의 수혜자인 것처럼 보였다. 무당을 찾는 것은 보통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아닌가? 멀쩡한 청년이 뭐가 아쉬워 무당을 찾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티셔츠 차림의 시중 드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내림 굿 하는 건가요?"
"아니예요. 우린 전부 제자들이예요. 저 사람이 하는 일들이 잘 안되고 그래서......"
아, 이 사람들도 '제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말인가? 북 치는 남자, 시중드는 남자, 그리고 승합차 밑에서 강아지를 안고 사과를 먹던 여자들 -- 이들 모두가 무당의 '제자'들이란다. 그리고 우성용 닮은 사람도 그렇단다. 내가 보기에 우성용은 표정이나 자세가 다른 사람들, 즉 무당들과는 판이한 것이, 아무리 뜯어보아도 신기(神氣)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무당이 자기를 향해 꾸부정하게 서 있는 청년에게, 약간 놀리는 듯한 억양으로, 물었다.
"답답하단 말이지? 답답해 죽겠다고?"
"......"
"뭐가 그리 답답혀? ㅋㅋㅋㅋ"
"......"
마치 마당극을 할 때 관객에게 농담을 건네다가 극으로 돌아가 정해진 대사를 읊듯, 무당은 청년과의 문답을 마친 후 돌아서서 다시 가볍게 뛰기 시작하였다. 쾅쾅쾅쾅쾅쾅쾅쾅...... 그러다가 뛰기를 멈추었고, 잠시 뒤에 또 뛰기 시작하였으며, 또 멈추었다. 이번에는 한 참을 쉬었다. 그 동안 무당은 쌔근쌔근하면서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 나는 그녀가 하품을 하는 줄 알았다. 그 때쯤 되어서는 태양이 거의 수평선에 걸려 있었는데, 그녀는 있는 대로 입을 벌려 크게 호흡을 하면서 태양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두어 차례 태양을 마신 후, 그녀는 다시 방울을 흔들면서 뛰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쾅쾅쾅쾅쾅쾅쾅쾅...... 꽹가리와 북의 소리도 확실히 달랐다. 엄청난 굉음이 성황당 주변의 소나무 숲을 압도하였다. 높이 뛰어오르니 버선을 신은 그녀의 발이 노출되었다. 작고 앙증맞아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못 볼 것을 본 듯 흠칫 놀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치마 저고리 위에, 잠자리 날개와도 같은 망사로 만든 소매 없는 보랏빛 두루마기를 입은 그녀는, 비록 볼을 타고 흐르던 윤기는 다 잃어버리고,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넘치던 젊음의 생기도 다 잃어버렸지만, 아름다움의 추억은 넉넉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남아 있는 생명력을 짜내어 한 곳에 집중시키는 능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우리 또래쯤 될까? 아니 그보다 훨씬 위일까? 어디에서 그러한 에너지가 솟아나는지,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듯 남아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더니, 아, 이번에는 된 모양이었다.
"바꿔줘, 잉, 바꿔줘, 잉."
무당은 갑자기 어린 아이 같은 말투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거 싫어, 싫어, 잉."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11살 짜리가 되었다고 한다. 바꾸어 달라는 것은 방울이었다. 시중 들던 남자가 성황당 당집에서 약간 작은 다른 방울을 가지고 나와 바꾸어 주자 11살 짜리가 된 무당은 만족한 듯 보채기를 그만 두었다. 이제 신이 올랐으니,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한다? 정말로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때 아빠 옆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작은 놈이 판을 깨어 버렸다. 춥고 배고파 죽겠으니 빨리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나? 이제 진짜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리고 우리 이외에는 구경꾼이 없었으니 이 굿판은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베풀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한 굿판을 버려 둔 채 나는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성황당 옆에 세워 놓은 표지판을 보니 수성당은, 서해안을 관리하는 '개양할매'를 모신다고 한다. 개양할매에게는 딸이 일곱 명이 있다고 하는데, 그 무당은 일곱 명의 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그러니까, 그녀에게 들어오곤 하는 11살 짜리 꼬마 귀신은 일곱 명의 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다음 날 유람선에 앉아 적벽강 위에 서 있는 수성당을 바라보면서 엊저녁의 굿판을 다시 생각했다. 굿판은 그 뒤에 정말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낙조가 완전히 물 속으로 가라앉으면 어떤 방식으로 조명을 마련하였을까? 신들린 상태에서 풀려날 때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아, 그 무당의 그 카리스마! 그녀의 제자들은 불청객인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슬금슬금 훔쳐보았지만, 뱃머리의 그녀는 단 한번도 우리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우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어떠한 방식으로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은 채, 오로지 자기의 일에 열중하고 자기의 신에게 전념하였다. 작은 아이는 저게 다 '쑈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얘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다. 내가 언제 그토록 신명나게 놀아 본 적이 있던가? 내가 언제 그녀처럼 온 몸을 바쳐 내 일에 열중한 적이 있던가?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완전히 나를 잃어버린 채 강의에 빠져 본 적이 있던가?
아니, 내가 이렇게 건방을 떨 계제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 무당에게서 배우기 이전에 우성용 닮은 청년에게서 배워야할지 모른다. 아, 참으로 한심해 보이던 등신 같은 그 청년의 모습! 그러나 나도 그 청년처럼 그녀를 찾아가 내 문제를 털어놓고 제발 좀 해결해 달라고 조르든지, 하다 못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려주기라도 하라고 통사정을 해야하지 않을까? 어색하고 우스꽝스럽게도 고깔 달린 동자 옷을 입고 그녀 앞에 꾸부정하게 서서 말이야. "뭐가 그리 답답혀? ㅋㅋㅋㅋ" 하면서 그녀가 나를 놀려먹으면 나는 어떻게 응대를 한다? 우성용이처럼 묵묵부답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겠지. 그녀에게 이미 내 문제를 다 털어놓아, 그녀에게는 내 한심한 몰골이 이미 다 드러나 있으니 도리가 없는 것이지. 그래,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하겠다. 살아가다가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나타나면, 그 (멀쩡한) 청년처럼 고개를 떨군 채, 무조건 잘못했다고, 무조건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한다. 설사 그것이 기복(祈福)으로 흐르더라도......
3
내가 평생 무당을 찾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찾아갔다기보다는 내 문제를 들고 내 할머니가 찾아가신 것이지만, 분명하게 기억되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칠 때의 일이다. 답답해 죽을 지경이 된 할머니는 손자의 손목을 잡고 단골 무당을 찾아갔다. 물론 이 아이가 시험에 붙을지를 물어 보기 위한 것이었다.
"붙습니다."
우리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던 무당은 속시원하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1차 시험을 본 곳은 배제중학교였다.) 2차를 볼 때 더 답답해져서 정말로 죽을 지경이 되신 할머니는 또 내 손목을 잡고 그 무당을 찾아갔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 속시원하게 대답하였다.
"붙습니다."
아, 영험한 무당이시여, 50%씩이나 맞추시다니, 당신의 그 신통방통함은 진정코 어디에서 오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나는 그 무당 덕분에 대경희중학교에 당당히 합격하여 지금은 동창 까페에 글까지 쓰고 있으니,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싱싱횟집 김사장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쿠아랜드인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쿠아랜드가 완공되고 주변에 사시사철 사람들이 넘쳐나면 수성당의 귀신들은 사람들의 기에 눌려 서해 바다 깊은 곳으로 달아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남아 있는 무당들은 신통력이 신통치 않게 되어 -- 30%? 20%? -- 결국 우리들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게 아닐까?
첫댓글 나도 1차 배재 봤다. 불합격 동창생이네. 글 잘 읽었다. 사진도 곁들였으면 더욱 좋았겠다 싶다. 잘 지내시게나..
강국이 말대로 영태의 글에 사진을 곁들일 수 있다면...정말 좋을텐데...
사진 말이지? 애들 크고 난 뒤에는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긴 한데. 사진..... 한번 연구해 보자고. 그렇지 않아도 올리고 싶은 사진이 있어.
동해안 양양 근처의 7번 국도 바닷가에 휴휴암(休休庵) 이라고 큰 암자가 (웬만한 절보다 크고 24시간 공양 하더만) 있는데 거기는 불상도 모시지만 바닷가에 용왕도 모셔서 치성/제사도 드리고 또 성황당도 있는데 스님이 제물을 올리더라. 누워있는 관음상 모습의 바위와 그 앞에서 관음상에 절하는 거북 모양의 바위등이 있다. 그런데 영태 이제는 산에 못오나 ?? 궁금하네....
산에 갈 수 있음. 단, 잠자리를 마련해 주면. 벌써 명서가 한번 마련해 준 적이 있다. (싼 데만 골라서) 새벽녘까지 끌고 다니더니, (자기네 집이 아니고) 엉뚱한 친구 집 앞에 대려다 놓고는 내빼더라. 나는 불만 없었음.
그게 아마 '83년도 여름 일게야. 울산 근처에 스쿠바 다이빙 갔다가 같이 물속에 들어갔던 후배를 잃었지. 1주 이상 바다밑을 다 뒤져도 못 찾겠더니 마지막 포기하는 마음으로 용왕제나 지내주자 하곤 취뤘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아 글쎄 다음날 우리가 찾던 그곳에서 시신이 떠 올랐지. '한의 살풀이'란 게 있나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