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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풍경 / 김학민
2007/09/1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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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풍경
1980년 5월 16일 밤 11시 20분 경, 장안동 나의 아파트 문을 누군가가 세차게 두드렸다. 그때 나는 밖에서 막 돌아와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마치고 세수를 하려던 참이었다. 문을 여니 문국주(현 민주화기념사업회 상임이사)가 서 있었다. 문국주는 집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형, 오늘 밤 열두시를 기해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하고, 민주인사들을 모두 검거한답니다. 오늘 오후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전국학생회장 모임도 계엄군이 습격해서 모두 도망쳤습니다. 형도 도망가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나오세요! 밑에 김경남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형! 시간이 없어요. 잔말 말고 빨리 나와요!”
“잠깐만 기다려! 발 좀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갈게.”
“하!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럼 밑에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나오세요.”
문국주는 다급하게 문을 닫고 나갔고, 나는 ‘생각대로’ 발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집사람과 갓난아이 딸을 한 번 안아준 뒤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다시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조금 전 문국주의 말을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여기지는 않았는데, 직감적으로 기관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퇴로가 전혀 없는 아파트임에 어찌하랴.
문을 열자 느닷없이 기관원 두 명이 권총을 나의 머리에 겨누고 뛰어들어왔다. 5월 16일 밤, 그렇게 나는 체포되었다. 화장실에서 발 씻다가……. 그날 밤 문국주와 김경남(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은 아파트 입구 멀찍이서 내가 기관원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합수부에 끌려가서 무수히 얻어맞았다. 나는 수사관들에게 얻어맞을 때마다 속으로 천주교의 고백기도 한 구절을 외웠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발 씻다가 도망치지 못해 잡혀서 얻어맞고 있으니, 누구 탓이란 말인가?
체포된 후 그날 밤으로 나는 짚차에 태워져 강남경찰서 유치장으로 넘겨졌다. 5월 17일은 일요일이었다. 16일 밤부터 17일 오후 네시 경까지 나는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고 그냥 유치장에 앉아 있었다. 속으로는 ‘예비검속’하고 내보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수 시간 후면 닥칠 그 끔찍한 운명을 모른 채 순진하게도.
오후 네시 경 수사관 두 명이 나를 호명하더니 짚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바로 서대문 합동수사본부로 데려온 것이다. 들어갈 때는 합수부가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곳은 전매청이 종로 4가로 막 이전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구 전매청 건물 하나에 자리잡고 있어 정문에는 ‘국과수’ 간판만이 걸려 있었다.
합수부는 전매청 본관 뒤의 담배창고에 설치되어 있었다. 7, 8개의 수사반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각 반마다 4, 5명의 수사관이 있었고, 청와대를 근접 경호하던 수경사 33헌병대 병력이 연행자 감시와 ‘구타 업무’를 맡았다.
내가 합수부에 도착한 것은 5월 17일 오후 다섯시 경이었던 것같다. ‘5반’이라는 사무실로 인계되었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무차별 구타와 고문이 시작되었다. ‘정’이라는 수사관이었는데, 그는 나의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부어댔다. 헌병들도 무차별로 온몸을 가격했다.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에 몸담아 온 이래, 이토록 엄청나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합수부에 대한 기억이란 불법 연행되어 있는 동안 매일매일 엄청나게 얻어맞았던 것과, 같이 잡혀 와 있던 장선우, 유시민(현재 민주신당 국회의원), 박문식 등이 맞는 것을 보고 공포에 떨었던 시간뿐이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맞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것 같았다.
비극 속의 희극인가? 고문과 구타의 공포 속에서도 ‘당하는 자’의 당당함, 순박함, 블랙 코미디가 피아(彼我) 모두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다.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 장선우가 얻어맞던 풍경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이다. 그때 장선우는 학생시절의 민속극 운동을 정리하고 TV나 영화 등 영상매체 쪽에서의 활동공간을 모색하다가 잡혀 왔는데,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의 가정도 음대 출신 부인의 피아노 교습으로 꾸려가고 있었다. 수사관은 장선우를 구타할 때마다 한 대에 한마디씩 뱉어냈다.
“장선우 이 새끼! 마누라는 피아노 치고, 너는 데모대에서 돌 던지고!”
피아노와 데모 사이에는 아무 연관관계가 없는 데도, 장선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인의 피아노 교습 때문에 더 맞는 것 같았다.
지금은 중견 공인회계사로 활동하고 있는 박문식. 그는 합수부로 이첩될 때 입구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간판을 보았던 모양이다. 그는 합수부로 넘어오기 전 서울대학교 관할인 관악경찰서에서 무지막지하게 얻어맞았다 한다. 그런 후에 합수부로 넘어오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간판을 보고는, 이제 무조건 고문과 구타로 자백을 강요하지 않고 ‘과학수사’를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다. 실제 박문식은 합수부에 온지 한참이 지나기까지 자기는 ‘국과수’에 잡혀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잡혀온 곳은 ‘국과수’가 아니라 ‘합수부’였다. 어느 날 그야말로 ‘뒈지게’ 얻어맞던 중 박문식의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대한민국 경찰의 ‘과학수사’란 말이오! 이렇게 증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때리기만 하는 것이…….”
수사관이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기에는 한참이 걸렸으나, 그는 이후에도 ‘과학수사’보다는 ‘원시수사’를 더 받았을 뿐이다.
여인이 애를 낳는 일로부터 인류의 고귀한 문화예술의 창조에 이르기까지 ‘창작의 고통’은 얼마나 힘들던가?
박정희의 피살 이후,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부터 5․17사태까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지하 생맥주집 ‘애천’ 등을 전전하며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던 조성우 역시 ‘내란음모 창작의 고통’을 만끽하였다.
조성우는 마구잡이로 구타하는 수사관들에게 “90년대 대통령을 이렇게 때려서 되느냐!”고 외쳐 합수부 내에 화제가 되었지만, 수사관들은 그후로도 조성우를 전혀 ‘90년대 대통령’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서울대 심재권 형으로부터 김대중씨가 전해준 자금을 받아 연세대학교 학생들을 선동,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가 들씌워져 있었다.
6월 초든가, 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자 그들은 정신없이 고문 구타하기 시작했으며, 순간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당황해서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나를 긴급히 후송했다.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돌아와 ‘특별배려’로 한참을 쉬고 나자, 수사관 한 명이 처에게 간단한 편지를 한 장 쓰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5월 16일 밤 시아버지(나의 아버지인 김윤식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와 남편이 체포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아내는 그때 6개월 된 딸애를 등에 업고 온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두 남자의 소식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온정도 한때일 뿐, 이후에도 나는 무수히 얻어맞았다. 6월 말 경에는 헌병에게 따귀를 무자비하게 얻어맞은 끝에 왼쪽 고막이 터져버렸다. 마땅히 치료도 받지 못해 석방될 때까지 왼쪽 귀에서는 항상 마차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 견딜 수가 없었으나, 석방 후에 다행히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조금만 더 지났으면 고막이 찢어진 채 살에 들러붙어 완전히 귀가 먹었을 것이라 했다. 나의 왼쪽 귀는 지금도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컨디션이 나쁘면 ‘샌다’.
긴 창작의 고통 끝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얼개가 대강 짜여지자 수사관들과 피의자간의 긴장도 약간은 풀어졌다. 수사관들은 가끔 5반의 수감자 모두를 모아 시국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 5반의 수사관이었던 이석채는 “이번에 김대중은 꼭 죽는다. 만일 죽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 단언했고, 우리들은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응수했다.
1997년 12월 27일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새벽, 나는 갑자기 정읍이 고향이라던 이석채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장을 지지지 못한 그의 손가락이 생각난다.
7월 초순 경 서대문구치소로 수감되기 위해 그 지긋지긋하던 합수부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 구치소 구경을 하는 유시민 등 재학생 후배들에게 감옥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며 위로했다.
합수부 수사관들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할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들이 각각의 신원을 확인하고 구치소에 인계할 서류를 챙기는 동안, 우리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 수개월간 겪은 고통이야 오죽 했으련만,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고 격려하는 가슴 찡한 자리였다.
이때 몇 개월만에 이해찬을 만났다. 그 해 5월 시내를 전전하며 가끔씩 마주치며 잠깐잠깐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이제 군사독재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생전 언제 다시 만날 줄 모르는 이별의 장에서 조우한 것이다. 이해찬은 수사관들이 정신을 파는 사이에 나에게 다가와서는 나직하고 비장하게 말했다.
“형님, 이제 감옥으로 가면 우리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고, 잘 된다해도 몇 년 안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입니다. 내가 잡혀올 때 가지고 온 돈이 있는데, 좀 가지고 가십시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해찬은 당시 본인이 운영하고 있던 돌베개출판사에서 황석영씨의 『어둠의 자식들』을 계약하려고 처갓집에서 5백만원을 빌려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해찬이 체포되자 합수부는 김대중의 폭력혁명자금의 꼬리가 잡혔다고 환호하였다 한다. 1980년의 5백만원은 지금 돈으로 쳐도 5천만원 이상 되었을 것이니, 20대 후반의 이해찬이 갖고 있는 액수로는 큰 돈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렇게 환호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이해찬의 처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찬은 그 5백만원이 처갓집으로부터 차용한 돈이라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엄청나게 얻어맞았다 한다. 그러나 수표 추적 등으로 그 돈의 출처가 확인되자, 그들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이해찬에게 돈을 돌려주었던 것이다.
이해찬은 수사관들 몰래 나에게 100여 만원을 쥐어줬다. 그리고 나머지 돈도 다른 학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나는 발 씻다가 갑자기 잡혀왔기 때문에 그들이 풀어준다해도 집에 갈 차비조차 없는 처지였다.
경험있는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감옥에서는, 아니 감옥에서도 돈이 없으면 살기가 무척 팍팍하다. 뒷이야기는 다음 기회가 있다면 또 하겠지만, 나는 그때 이해찬이 준 100여 만원으로 감옥생활을 ‘윤택’하게 보낼 수 있었고, 석방될 때에도 상당액을 남겨 가지고 나와, 1980년 그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첫댓글 "5월 17일은 일요일이었다"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이 분도 미개인인가요? 5월 17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글만 퍼오실 것이 아니라, 김학민에게 5월 17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었다고 가르쳐 주세요. 날자가 틀리면 사건 전개 순서가 뒤죽박죽이 됩니다.
김학민은 치안본부와 합수부를 혼동하고 있군요. 5월 16일 예비 검속은 없었습니다. 만약 5월 16일 예비 검속이 있었다면 어떻게 김대중 일당이 그날 이화여대 강당에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를 소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날은 예비 검속이 있었던 날이 아니라.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 내란(전국적 민중봉기)을 준비하던 대학생 중 몇명이 치안본부에 주동자 명단을 넘겨준 날입니다. 대학생들이 주동자 명단을 넘겨주니깐 그 다음날 치안본부가 주동자들에 대한 예비 검속이 실시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서울대 심재권 형으로부터 김대중씨가 전해준 자금을 받아 연세대학교 학생들을 선동,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가 들씌워져 있었다...중략..긴 창작의 고통 끝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얼개가 대강 짜여지자 수사관들과 피의자간의 긴장도 약간은 풀어졌다.>......이글에서 주제 문장이올시다.. 거짖,허구,소설,각본...
서울대에 심재권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심재권이 아니라 심재철입니다. 그리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수사의 주체가 김대중의 심복 이종찬이었습니다. 동교동 서열 2위였던 이종찬이었습니다. 김대중에게 유리하게 각본을 짜주었으니깐 훗날 김대중이 국정원장에 임명한 것 아닌가요?
김대중은 20대에 직장 다닌 왜에 직장을 가진 적이 없는 건달 깡패짓과 북한의 지금을 받아서 생할한 자입니다. 그런자를 위해서 대모한 국가전복세력들이 무슨 민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