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류딱지를 붙인 설움
동해의 바닷가를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걷는다. 느리게 걸으니까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햇빛을 받아 유리 조각같이 반짝이는 바다도 보이고 소나무 숲의 짙은 녹색도 가슴으로 스며 들어와 마음을 물들인다. 노년의 특권인 한가와 여유를 얼마쯤 얻게 되서 그런지 지나간 삶의 페이지를 다시 들추어 재해석을 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기도 한다.
평생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사물의 내면이 좀 더 깊이 보인다고 할까. 내가 못난지를 아는 데 수십년이 걸렸다. 보다 일찍 내 주제를 알았더라면 훨씬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제야 가슴으로 조금 알게 됐다고 할까.
나는 인식의 벽에 갇히고 고정관념의 늪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보기에 손녀는 최고로 예쁘다. 할아버지인 마음의 눈에 비친 주관적인 모습이다. 손녀는 예쁘다는 나의 말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할지도 모른다. 그 언젠가 손녀는 자신이 탈랜트만큼 그리 예쁘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착각 속에서 일생을 보내는 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아들인 나는 잘난 것으로 보인 것 같다. 나는 어머니의 말이 사실인 것으로 착각했었다. 사십대 중반 무렵 방송의 시사프로그램에서 잠시 사회자 역할을 한 적이 있다. 내 주제를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텔리비젼은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얼굴이 받쳐줘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흑은 백과의 대비를 통해 더욱 검게 되듯이 미남 배우 출신 사회자를 보면서 나의 개성 없는 못난 얼굴을 자각했다.
하늘에서 아름다운 얼굴과 재능을 선물 받은 스타들이 따로 있었다. 나는 내 주제를 알고 물러섰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피라미가 상어가 되고 싶다고 애써도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못하는 것은 안 하기로 했다.
멀리서 보면 숲이 아름다워도 가까이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고독하게 혼자 서 있는 나무들 사이에 서 있는 걸 발견한다. 멀리서 보면 부러운 선택된 집단 안도 그런 것 같았다. 얼마 전 죽은 천재 작곡가 김민기씨가 진정한 예인(藝人)이라고 높게 평가한 가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수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한번은 그 가수가 내게 이런 내면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뉴욕에 가보니까 말이죠. 삼류도 나보다 훨씬 재능이 뛰어나더라구요. 정말 열등감이 느껴지더라구요.”
문학계에서 최고 원로인 소설가로부터 그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외국의 문학작품을 보면 나는 사류 오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문장 하나에 인생을 거는 일본 작가의 집요함을 보면 소름이 끼쳐요. 좌절감에 휩싸이죠.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사류나 오류로 살아가야죠”
예술 분야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런 현상을 봤다.
삼성그룹 이전의 대한민국 최고 재벌그룹의 노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재계 서열은 떨어졌지만 지금도 그의 집안은 튼튼하다. 그 노인은 내게 자기네 그룹을 구멍가게수준이라고 하면서 시큰둥했다. 겸손이 아니라 그 노인은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았다.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고위직으로 올라간 친구가 있다. 그는 친구가 장관이 되자 자신은 일급 밖에 못했다면서 괴로워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류나 삼류의 고통과 설움을 느끼고 있었다. 남이 보면 일류여도 정작 자신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다.
세월의 강을 흘러 영혼의 바다를 앞에 두고 나는 강 하구에서 빙빙 돌고 있는 물방울 같은 느낌이다.
이제야 뭔가 작은 깨달음이 가슴속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다. 능력이나 운이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비교하지 않고 그냥 내 걸음으로 나의 인생길을 걸었더라면 좀 더 빨리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야망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밑바닥에 세울 수 있는 용기만 있었다면 나는 보다 만족할 수 있지 않았을까. 불행은 기대에서 왔던 건 아닐까.
[출처] 이류딱지를 붙인 설움|작성자 소소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