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어스리그(PL)의 투자가들은 시즌 내내 리그에 대해 충성을 바치노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시즌이 끝난 후 화해를 위한 대화가 진행되자 이들은 전쟁에서 손을 뗐으며 리그를 내셔널리그(NL)에 팔아 넘겼다. 투자가들의 항복은 놀랍기조차 한 일이었으며, 브러드후드는 이 결정에서 배제됐다. 이 배신행위는 PL 투자가들의 경험부족, 순진함, 멍청함 등의 산물이었다. 이는 NL의 냉혈한(冷血漢) 투자가들과 대조가 된다. PL 투자가들이 지레 겁을 먹은 반면 NL 투자가들은 끝까지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대화가 개시되자 PL 측은 선수, 자본가 할 것 없이 모두 혼란에 빠졌다. 의견일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리그는 사분오열됐다. 이는 NL 측이 시즌 내내 바라마지 않던 상태였다.
전술했듯이 1890년 시즌이 끝나자 대부분의 언론과 팬들은 전쟁 종식과 화해를 촉구했다. 캡 앤슨(Cap Anson) 같이 “전쟁은 끝까지 갈 것” 이라는 입장의 인물들도 몇 있었지만 야구계의 지도층 인사 다수는 “야구가 비명횡사해서는 안 된다”는 앨버트 스폴딩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존 워드도 화해에 긍정적이었다. 워드는 “내셔널리그와 최선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플레이어스리그에 투자한 모든 이들은 보호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 효과적인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오스코시(Oshkosh) 같은 곳에서도 기꺼이 뛰겠다”고 말했다.
1890년 10월 당시 PL은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리그 결성 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PL은 8개의 전용구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확보했다. NL과의 기존 계약은 법원에서 무효 판결이 내려졌으며, 훌륭하게 시즌을 마쳤다. 전통의 NL보다 더 많은 관중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1891년 시즌을 위한 의욕적인 계획도 수립해놓고 있었다. 더스포팅뉴스(TSN)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매우 건강한 첫돌배기 플레이어스리그에 경의를 표한다” 불행하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나이브함, 그리고 탐욕은 PL 인사들에게 자신들의 장점을 스스로 포기하게끔 만들었다. PL의 자본가들은 결국 브러드후드 선수들을 내셔널리그에 팔아넘겼다.
선수 겸 감독 겸 투자가였덤 워드는 ‘사업’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고 있었다. 워드가 NL과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A)에 화해 메시지를 보낸 것은 그런 자신감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워드는 NL과 AA에 새로운 내셔널 어그리먼트(National Agreement)를 제정하자고 제의했다. 워드는 기존의 보류권 조항(rserve clause)의 대안으로 장기 계약을 선호했다. 장기 계약은 PL에서 채택하고 있던 제도였다. 워드는 장기 계약은 “공정할뿐더러 선수, 구단 모두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워드처럼 선수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투자가들은 PL에서 극소수였다.
화해 논의를 위해 두 리그 대표들은 뉴욕에서 회합을 가졌다. PL에서는 앨 존슨, 웰델 굿윈, 에드윈 탤코트, NL에서는 앨버트 스폴딩, 존 B. 데이가 참석했다. 노련한 스폴딩이 재정상태에 대해 질문하자 PL의 대표들은 시즌 중 입은 손실액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기회를 잡았다 싶었던 스폴딩은 NL의 손실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그 자리에 참석한 데이는 시즌 도중 어쩔 수 없이 구단 지분을 팔아야 했던 형편이었다.
하지만 야구 사업에 대해 무지했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손해’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던 PL 투자가들은 자신들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받아들였다. 2만달러의 예상 이윤을 달성하지 못한 투자가들은 갑자기 PL이 유일하게 손해를 본 리그라고 생각하게끔 됐다. 투자가들은 투자액을 회수할 길을 모색했다. 그 첫 번째는 브러드후드와의 관계단절이었다.
흐름 변화를 감지한 내셔널리그 측은 화해 대화를 중단하고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필라델파아 필리스 구단주 앨 리치는 “PL이 화해를 추구한다면 오산이다. 싸움을 건 것은 그 쪽이다. NL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PL, NL, AA 3개 리그가 뉴욕의 5번가 호텔(Fifth Avenue Hotel)에서 첫 회담을 가졌다. 이곳은 플레이어스가 태동한 장소기도 했다. PL은 리그 헌장에 따라 자본가 3명(존슨, 굿윈, 탤코트), 선수 3명(워드, 네드 핸런, 아서 어윈)으로 대표단을 구성했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하기 전 선수들은 회담에 참가할 수 없다는 이의가 제기됐다. 워드는 자신들은 선수이자 동시에 주주라고 밝히며 항의했지만 격론 끝에 선수 3명은 모두 회담에서 제외됐다. 선수들은 호텔 옆 문으로 빠져나갔고 기자들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참여를 봉쇄한 후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론은 플레이어스리그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PL 뉴욕팀의 대주주 탤코트와 에드윈 매캘핀은 NL의 자이언츠와 합병한 후 1891시즌을 NL 소속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1890년 PL의 뉴욕 자이언츠는 NL 뉴욕 자이언츠보다 더 우수한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더 많은 관중들을 끌어들였다. 브루클린 원더스의 웬델 굿윈은 워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리지그룸스와 합병키로 했고 시카고의 존 애디슨은 화이트스타킹스의 지분을 받는 조건으로 팀을 스폴딩에게 매각했다. 사태가 갑작스럽게 반전하자 워드는 자본가들을 “선수들의 신뢰를 저버렸다. 손해를 입었다면 자신들이 떠나면 될 것 아닌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워드는 더 이상 플레이어스리그가 존속하지 않으며 남은 것은 난데없이 버림받은 신세가 된 브러드후드 뿐이라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워드는 선수들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즌이 끝났을 때 커튼콜을 받은 쪽은 플레이어스리그였다. 그러나 일부 지역 투자가들은 우스꽝스럽고 불필요하게 리그를 약화시켰으며 난처한 상황으로 몰고 갔다. 덕분에 내셔널리그 인사들만 이득을 봤다. 이 싸움을 시작했을 때 그들도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알고 있었다. 지금 와서 항의할 권리는 없다. 선수들은 플레이어스리그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선수들은 필요하다면 다음 시즌 무보수로 뛸 의사도 갖고 있었다. 합병은 답이 될 수 없다. 같은 날 경기를 치르지 않는다면 뉴욕, 브루클린, 보스턴, 필라델피아, 시카고에서는 2개의 팀이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양 리그는 모두 이익을 볼 수 있으며 대중들은 더 만족할 수 있다.”
워드를 비롯한 선수들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야구 전쟁’은 끝났다. 클리블랜드 프랜차이스의 대주주였던 앨 존슨 같은 인물은 스폴딩이 NL 시카고와의 합병을 거부하자 PL 진영으로 돌아와 파산하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으며 너무 미약한 반발일 뿐이었다. 뉴욕(브루클린 포함)과 시카고라는 거대 시장을 잃은 플레이어스리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플레이어스리그는 TSN의 지지마저 잃었다. TSN은 다음과 같이 썼다.
“...브러드후드는 스스로 자신들의 통제권을 탤코트, 매칼핀, 굿윈 등의 자본가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선수들을 배신하기 위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했다. 그들의 지휘에 따른 순간부터 선수들은 전체성을 잃었다. 또한 우리(TSN)들의 지지도 잃었다. 현재 플레이어스리그는 없다. 브러드후드도 없다. 선수들은 결국 스스로 자신들의 일을 결정할 수 없으며 과거의 질서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무능력을 드러냈다. 유감스럽게도 워드, 유잉을 비롯한 선수들은 한번 더 노예적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1890년 11월, TSN은 이렇게 적었다.
“플레이어스리그는 죽었다. 플레이어스리그에게 작별의 인사를… 그대들의 일생은 폭풍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대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금전적 손실을 입었으며, 오래지 않아 그대들에게는 추억만이 남았을 뿐이다. 슬픈, 낙담 섞인 추억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