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망졸망 피었던 개망초는 지친 얼굴로 달차근한 향기를 아주 조금씩 만 떼어주고 있다. 까딱하면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번식력은 얼마나 강한지 게으른 농부네 밭이나 묵정밭엔 어김없이 나타나는 꽃. 이 꽃이 피는 밭엔 그해 농사에 망조가 들었다고 농부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철도부설 때 부목 수입 목에 붙어 온 귀화종으로 철길에 하얗게 피어있는 꽃을 보고 조선이 망할 징조라며 일본 사람들이 붙인 억울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고향 동네에선 춘궁기 때 이 나물은 뜯어도 뜯어도 가득한 걸 보고 서민들을 배부르게 해주는 나물이라며 풍년초라고 불렀다. 말린 잎으로 담배를 말아 피우기도 한 데서 농촌에서는 담배 풀로 불리기도 했다. 꽃 모양이 달갈프라이와 닮았다고 해서 달걀 꽃이라고 더 잘 알려진 꽃이기도 하다.
쥐똥 같은 열매 탓에 쥐똥나무라고도 불리는 쥐땅나무 울타리 옆으로 아직도 채 떨구지 못한 영산홍 꽃잎이 철모르고 줄기에 말라붙었다. 마치 철거 직전인 새마을의 붉은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퇴색한 슬레이트 지붕 같다. 그러기에, 갈 때는 미련 없이 모두 털고 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가 보다. 미숙한 잣 방울이 여기저기 떨어져 뒹구는 잣나무의 굵은 밑등을 나지막한 산죽이 감싸 안았다. 솟구친 적송 아래엔 비비추가 붉은 솔가지를 덮어썼다. 게다가 꽃대까지 세웠던 흔적이 낯설다. 침엽수 아래에선 타닌 영향으로 식물성장이 억제되는데도 이곳에선 가지각색이 불협화음을 이루며 어색한 듯 조화롭다 단풍나무 아래로 3인용 벤치가 숨죽인 채 나란히 놓여있다.
초록 이끼만 가득 앉아있는 등받이 목제 의자는 긴 외로움에 지친 듯 누구의 손길도 거부하고 있다. 그 의자 위에 한 모금 남아있는 커피잔을 놓으며 잠깐의 곁을 원했지만 내어줄 맘보다는 알아서 않으라는 눈치다. 사람은 초록색 결핍증이 생기면 잔인해지고 야수화 된다는데 이렇게 초록 물이 밴 마음 한편에 순한 꽃 몇 송이 피울 만한 품도 얻게 되나 보다. 참매미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쓰름매미(쓰르라미) 함성만 무성한 숲속 황톳길을 벗어 났다.
잠깐의 겨를조차 망설이는 나의 미숙함을 성실이라든가 인내와 노력 같은 단어로 포장하며 사는 건 아닌지. 마음을 담고 있는 건 몸인데 정작 마음에 갇힌 건 몸이었다. '짬'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선택하면 되는 거였다. "당신이 만약 현재에 후회하고 있다면 지난날 당신이 보낸 시간의 보복 입니다."라는 글을 어느 화장실에서 읽다가 '철학과 인생은 화장실에서 배운다는 말도 맞네.'라며 피식 웃었던 적이 있다. 오늘은 과거의 흔적, 미래의 발자국이다. 짬을 이용해 6천 보를 넘기자, 휴대폰에서 알람음이 울린다. 오늘의 목표를 달성했다며 초록색 그래프가 쑥 올라온 모습이 마치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이 찍혀있는 손목을 번쩍 치겨든 것만 같다.
김인자
수수밭길 동인지 산문로 7번가 수필 오블렛 참여 in509@hanmail.net 많이생각하고천천히 가야 하다는 걸, 내가 지나온 세월이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