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 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 보고자퍼서 죽껏다 씨펄..... "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정양(1942~) 시 토막말 전문
[시집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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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터널을 지나며 / 강형철
매연이 늘어붙은 타일이 새까맣다
너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그 곁에 보 고 싶 다 썼고
나는 정차된 좌석버스 창 너머로
네 눈빛을 보고 있다
손가락이 까매질수록
환해지던 너의 마음
사랑은 숯검댕일 때에야 환해지는가
스쳐지나온 교회 앞
죽은 나무 몸통을 넘어 분수처럼 펼쳐지는
능소화 환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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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막말’의 이 친구는 술 깨나 걸친 듯해 보인다.
그에게도 금화터널의 능소화처럼 환한 사랑이 있었겠다.
하지만 금화터널의 그 친구는
혼자 상상만 해도 신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 같은데,
이 친구는 그렇지 못해 보인다.
금화터널은 정기적으로 오가는 곳이지만,
가을 바다는 언제 다시 찾아올지 기약이 없으니까.
게다가 썰물 진 모래밭에 아무리 크게 써놓은들,
타일 위의 음각화보다 오래갈 리가 없겠다.
이내 다가올 밀물이 쓸어버리면
그가 남긴 토막말은 얼음 조각이 녹듯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그가 남긴 해변의 그라피니는 소통이 아니라 통곡이다.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늘더러,
운명더러 읽으라는 항의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가 하늘나라에 있을지도 모르고.
막말이지만, 진정성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기에,
대책도 없이 아름답다고 시인은 말한다.
하지만 그의 속은 숯검댕 그 자체일 것이다.
도무지 환해질 수 없는 고통의 통곡이다.
‘정순’이는 금화터널 안의 연인 같은 희망의 현재 진행형도 아니고,
광화문 거리의 옛사랑 같은 추억의 과거 완료형도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추억으로 완결 짓기에는 너무나 애절한, 고통의 현재 진행형이다.
이쯤 되면 사랑 때문에 살겠고,
사랑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사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대 때문에 / 박성신
그리움은 빗물처럼 스미고
아무것도 할수 없네
그대 없이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멀어져간 그대 모습을
혼자 그리네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을 조이며
지나가는 사람 속에서
그대 모습을 찾아보네
흔들리는 거리를 걸어요
눈물이 날것 같아
그대 때문에
*
박성신(朴性信, 1968년 - 2014년)
`산 너머 남촌에는`을 부른 가수 박재란의 딸이며,
서울예전 재학 중 1987년 제1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회상`이라는 곡으로 입상하여 첫 데뷔하였고
1988년에 제9회 MBC 강변가요제에서
`비오는 오후`라는 곡으로 가창상과 장려상을 받았다.
대표곡인 `한번만 더`는 핑클, 마야, 나얼, 이승기 등의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집 발표 및 결혼 이후 연예 활동이 거의 없었으며
2014년 8월 이른 나이 45세에 사망.
첫댓글
보고싶다~!!
누구나 고통스러울만큼
보고싶은 사람이 있겠지요,,,,,,
사랑!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 양희은 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