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의 저자 황선도는 우리나라 근해에 사는 어류에 대해 30년 이상
연구해온 물고기 박사다. 연구 대상은 제사상이나 밥상에 자주 올라오는 친근한 어종들이다.
이 책은 그 가운데 16종의 생태를 자세하게 연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물
고기의 외형적 관찰기록이라면, 이 책은 부화에서부터 밥상에 올라오기까지 전 과정을 과학적으
로 분석한 내용이다.
한때 이 나라의 대표적 굴비 생산지였던 전라남도 영광군 칠산 앞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제철이
되면 조기떼 울음소리에 밤잠을 설쳤다. 육지동물처럼 성대를 마찰시켜 내는 소리가 아니라, 그
물에 걸린 조기떼가 깊은 바다에서 갑작이 수면 위로 끌려 올라올 때 수압 차이로 부레에서 바람
이 빠지며 나는 소리다. 흑산도 사람들도 한때 홍어 울음소리를 들으며 풍어의 꿈에 부풀곤 했었
다. 홍어는 교미 상태로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 경우가 많은데,이는 낚시에 걸린 암컷의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수컷을 자극하여 달려들게 유혹한 탓이다. 그래서 흑산도 사람들은 홍어의 울음소
리를 감창소리로 알고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 ‘수컷의 양 날개에는 가느다란 가시가 나 있는데, 이는 교미할 때 암컷의
몸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암컷이 낚시를 물면 수컷이 달려들어 교미를 하다 함께 끌
려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적어놓았다. 정확한 관찰이긴 한데 반만 맞는 얘기다.
‘수컷의 양 날개’는 날개가 아니라 생식기다. 생식기 끝에는 정약전의 관찰대로 가시가 달려 있어
잘못하다간 어부의 손을 다치기 십상이다.그래서 낚시에 걸린 홍어를 배 위로 끌어올리면 어부는
수컷의 양쪽 생식기부터 잘라 버린다. 그래서 ‘만만한 게 홍어 좆’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멸치부터 먹이사슬을 따라 최상위 포식자인 상어에 이르기까지, 단단한 뼈를 가진 경골(硬骨) 어류
들은 귓속에 ‘耳石’이라고 하는 작은 돌삐가 생성되어 있다. 이석을 잘라서 들여다보면 종류마다 특
유의 무늬가 나타나는데, 이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연륜이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무늬를 분석하면
그 물고기의 나이는 물론 생장환경까지 알 수 있다. 이석은 곧 그 물고기의 블랙박스인 것이다.
명태는 한때 ‘국민 생선’으로 불렸을 만큼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어종이었다. 해마다 수십만
톤이 잡혀 제사상과 밥상을 풍요롭게 했다. 잡힌 시기나 장소, 잡힌 나이, 잡는 방법이나 가공 상태
등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일태 이태 춘태 추태 동지바지 막물태, 강태 지방태 고성태 북양태 은어바지 왜태, 애기태 먹태 노가
리, 낚시태 수태 통명태 골태 근태 금태 꺽태, 생태 동태 코다리 찐태 황태 황금태 무두태 낙태 북어…
같은 종류라도 지방마다 달리 불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외에도 수많은 이름이 더 있을 것이다.
동해에서만 해마다 수십만 톤이 잡히던 ‘국민 생선’ 명태가 말 그대로 씨가 말랐다. 2008년 공식 어
획량이 0으로 보고된 뒤 지금껏 한국산 명태가 잡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원인은 역시 남획과 오염
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명태는 러시아산을 비롯하여 전량 수입품이다.
해양수산부에서는 2020년부터 국산 명태를 보급한답시고 수백억 원의 예산을 들여 양식을 한다느
니 뭐니 부산을 떨고 있지만 글쎄, 세월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인간의 힘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
자취를 감춘 어종은 명태뿐만이 아니다. 원양어선이나 컨테이너선 항해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대양
한가운데는 한반도 몇 배 크기의 쓰레기 더미가 둥둥 떠다니고 있단다. 지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각종 폐기물을 먼바다에 갖다 내버리고 있다.시도 때도 없이 세계 각지에서 무단방류하는 온갖 오염
물질의 종착역 역시 바다다. 아무리 광대하지만 바다도 언젠가는 자정능력의 임계점에 다다를 것이
다. 그때는 엘니뇨나 라니뇨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앙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몇몇 보호종의 멸종을 막기 위한 인간의 노력 따위로는 바다의 노여움을 결코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