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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쭉빵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선풍기 윙윙
<1917>이 대중에게는 '전쟁 체험 영화', '기술적 성취가 전부인 영화'로 받아들여지면서,
<덩케르크>보다 못하다는 평을 여기저기서 봤어.
물론 '전쟁 영화'로서의 만듦새를 따진다면 <덩케르크>가 훨씬 수작일 수 있어.
그러나 <1917>은 전쟁 영화로 분류하기 보다는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사명을 이행한 사람의 숭고함'을 다룬,
훨씬 더 인문학적이고 종교적인 컨텍스트가 강한 영화라고 봐야 맞는 것 같아.
<1917>이 서구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단순히
오스카에서 <기생충>을 견제할 만한 작품이 이것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기독교 문화권 관객들에게 충분히 감격을 줄만한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인거지.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덕분에
오스카에서 <1917>이 아닌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거라고 봐.
<기생충>이 훨씬 범지구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니까.
어느 영화가 더 우월하다, 더 잘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아.
<덩케르크>가 전쟁 당시 벌어진 사건의 시간을 다르게 보여줌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면
<1917>은 앞서 말한 주제의식을 잘 보여주기 위해 장소/동선/소품/대사 등을 아주 섬세하게 배치해 두었어.
특히 주인공 윌리엄 스코필드는 너무나 노골적으로 예수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어.
영화 전체적으로 인상적인 메타포들이 많았는데, 가톨릭 신자로서 흥미롭게 보았던 지점들을 정리해보려 해.
나도 짧은 식견이라 중언부언할 수 있지만...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봐야 하지? 하고
혼란스러웠던 토리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편의를 위해서 말투는 문어체로 할게.
0. 들어가기 전에.
기독교에서는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상징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물, 무덤, 순명, 연옥 등이다.
물
정화, 보호 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 물에 몸을 담그거나,
이마에 물을 흘려보냄으로써 다시 태어나고, 정화된다.
성당에 들어갈 때 신자들은 이마에 성수를 묻혀 성호를 그음으로써 죄를 씻고
가정을 축복하기 위해 집에 성수를 뿌리기도 한다.
빈 무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는 무덤에 묻혔다가 사흘만에 부활한다.
예수의 무덤은 죽음을 은유하지만, 부활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하다.
카라바지오 <수태고지>
순명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 권고되는 자세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나 명령에 기쁨으로 따르는 것을 '순명'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주님의 뜻에 토달지 않겠습니다' 같은 건데,
대표적인 순명의 자세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이다.
예수 또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서도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이 부르심은 언제 어떻게 주어질지 모른다.
성경 속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인물들은 특별히 영웅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흠결 있는 사람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것에 순명함으로써 본인의 믿음을 증명한다.
루드비코 카라치, <연옥>
연옥
연옥은 (아마도)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는 없고 가톨릭 교리에만 있는 개념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살아있는 동안 지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른다고 믿는 장소이다.
이곳은 '유예'의 공간이다. 미디어에서는 선과 악이 모호한 중간지대 같은 느낌으로 그려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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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1917>을 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은
이 영화는 서양 고전 문학 형태 중 하나인 '지옥 여행기'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사에 물려 숨진 아내를 찾기 위해 명계로 걸어 들어간 '오르페우스' 신화
천국으로 가는 도중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겪는 17세기 기독교 소설 <천로역정>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아 사후세계(지옥, 연옥, 천국)를 여행하는 서사시 <단테의 신곡>
이스라엘 민족이 신이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간 광야를 헤매게 되는 구약성경의 내용 등
서양 관객들에게는 '개인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길을 떠나 시련을 겪는다'는 플롯 자체가
아주 친숙하다는 점을 감안하고 감상한다면 이 작품이 왜 그토록 서구권의 찬사를 받았으며
동시에 왜 이 영화가 아닌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1917> 안에 숨어있는 메타포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1. 어둠과 구덩이
<1917>에 등장하는 장소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영국군 참호 - 독일군 지하 갱도 - 숲 - 강 건너 폐농가 / 강 건너 에쿠스트 마을 - 여인의 집 - 강물 - 숲 - 영국군 참호
이동진 평론가가 말한대로, 이 영화는 데칼코마니처럼 초반부와 후반부가 거울 구조를 띄고 있다.
<1917>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삶(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영화이다.
감독은 이것을 장소에 따른 색채와 명도 변화를 통해 확실하게 보여준다.
시작점에 있는 영국군 참호는 진흙투성이고, 암울하고, 어둡고, 지저분하다.
날은 흐리며, 해는 떨어지기 직전이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장군과 임무를 받는 두 사람.
"저희만 가는 겁니까?"
"지옥으로 가나, 왕좌로 가나 혼자 가는 것이 가장 빠른 법이지."
여기서부터 지옥으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이들은 독일군 진영으로 향하기 위해 더러운 물로 가득찬 '구덩이'들을 지나가야 한다.
이들에게 성수 대신 위스키를 뿌리며 배웅하는 레슬리 중위의 대사.
"구덩이 조심해. 빠지면 못 나와." (스콧♥)
'구덩이'는 창세기에서 요셉이 형제들의 계략에 휘말려 빠졌던 '구덩이'를 떠올리게 한다.
요셉은 사막의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죽을 뻔하다가 미디안 상인들에게 발견되어 노예로 팔아넘겨졌다.
구덩이는 히브리어로 '감옥'이란 뜻과도 상통하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의미한다.
더러운 물구덩이들을 헤치며 지나가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이들이 무인지대(No Man's Land)를 지나갈 때 흐르는 배경음악의 제목은 'gehena', 즉 '지옥'이다.
희망도, 생명도 없는 죽음의 땅.
그 너머에는 블레이크의 형을 포함한 1600명의 목숨이 있다.
블레이크는 형을 구하기 위해 조급히 떠나고,
그의 강력한 의지는 나서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스코필드를 지옥으로 끌어들인다.
지옥의 입구에서, 철조망에 손바닥을 찔리는 스코필드.
2. 톰 블레이크
톰 블레이크. 사제가 되려했던 자. 길을 아는 자.
예수가 본격적으로 사목을 하기 전에, 세상에 먼저 나타난 자가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곧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자신은 그분을 위해 길을 내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장 23절
블레이크는 스코필드보다 앞서 걷는다.
그는 마치 세례자 요한처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이었다.
블레이크는 독일군 참호무덤에 깔린 스코필드를 구해주고,
일시적으로 눈이 먼 그를 빛으로 인도한 다음
자신의 물을 나누어 준다.
무릎 꿇은 예수에게 물로 세례를 주고 있는 세례자 요한.
기운을 차린 두 사람은 작은 냇가를 건너 농가로 진입한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강을 건너는' 행위는 저승세계로 진입함을 뜻한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유대 왕국의 통치자 헤로데에게 목이 잘려 죽는다.
블레이크 역시 독일군 파일럿의 칼에 찔려 죽어간다.
"제발 길을 안다고 말해줘."
"알아."
"내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줘."
"그럴게."
길을 알았던 자의 사명은 남아있는 자에게로 옮겨진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죽은 뒤부터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3. 순명
신의 부르심은 특별한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왜 하필 나였어?"
"그냥, 네가 제일 가까이 있었으니까. 너인줄도 몰랐어."
블레이크는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고 권한다.
그러나 스코필드는 돌아가지 않는다.
우연히 손을 잡은 그 순간, 사명이 부여된다.
스코필드는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순명한 댓가로
손바닥에 철조망의 가시가 박히는 부상을 입는다.
손바닥의 상처.
그것은 가시관을 쓴 예수의 성흔과 닮아있다.
4. 물
물은 영화의 초반부, 중반부, 후반부에서 각각 의미가 달라진다.
또한 고여있는 물이냐, 흘러가는 물이냐,
격렬하게 파도치는 물이냐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진다.
초반부 '고여있는' 물은 '죽음'이다.
병균이 들끓고 옥토를 진흙탕으로 만드는 물.
중반부 등장하는 두 개의 '흐르는 물'은
앞서 말했듯 그 건너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냇물을 건넌 후 농가에서 사망한 블레이크.
끊긴 다리를 건넌 후 총격을 받고 죽음에 위기에 처한 스코필드.
그러나 물은 '정화'하는 물이자,
'생명'을 살리는 물이며,
'협력자'로서의 물이기도 하다.
스코필드는 지하 갱도의 폭발에서 살아나온 후
물로 눈을 덮은 흙을 씻어냄으로써 다시 앞을 보게 되었으며,
블레이크가 건네준 물을 마시고 기운을 낸다.
또한 에쿠스트 마을에서 총을 빗맞고 기절한 그는
얼굴에 떨어지는 이슬 때문에 정신을 차린다.
후반부 스코필드를 크루아지유 숲으로 인도한 것은
마치 파도처럼 세찬 강물이었다.
세찬 강물은 거룩한 변화를 일으킨다.
강물 속에서 스코필드는 모든 군장(=죽음)을 벗어던진다.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진흙도, 피도, 포격으로 인한 그을음도 속절없이 씻겨나간다.
강물에서 올라온 그는 죽음의 흔적과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정화된다.
초반부 지저분했던 얼굴과
후반부 깨끗하다못해 빛이 나고 있는 듯한
얼굴의 대비
5. 무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요한 20장 1절
예수는 돌로 만들어진 무덤에 사흘간 묻혀 있다가 부활했다.
그렇기 때문에 돌무덤은 1차적으로 죽음을 의미하지만, 부활의 전조이기도 한다.
<1917>에서 무덤은 각 군영의 참호, 지하 갱도, 에쿠스트 여인의 집 등으로 은유된다.
무덤과 같은 갱도 속으로 들어가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부비트랩으로 인한 폭발이 일어나고,
스코필드는 '돌에 묻힌다.'
블레이크가 '돌을 치워' 그를 살려낸다.
두 번째 무덤은 반지하 같은 곳에 위치한 에쿠스트 여인의 집이다.
마을이 통째로 폐허가 되었지만, 스코필드는 이 무덤에서 '새생명'을 발견한다.
새생명이 있다면 삶은 재건될 수 있다. 희망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에쿠스트 여인의 집은 여전히 무덤이다.
스코필드는 이 무덤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6. 연옥
총에 빗맞고 기절했다가 깨어난 스코필드 앞에 펼쳐지는 생경한 풍경.
빛과 어둠이 혼존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다.
천국도 지옥도 아니고
이승도 저승도 아닌 이 곳에서
스코필드는 잠시 혼란해 한다.
저 사람은 누구지? 아군인가? 적군인가?
연옥은 선택의 공간이다.
지옥으로 갈지 천국으로 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만약
멀리서 다가오는 군인이 스코필드에게 총을 쏘지 않았더라면?
독일군 바우머가 동료에게 소리를 치지 않았더라면?
그가 에쿠스트 여인의 집에 그대로 머물렀더라면?
수많은 선택과 가능성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머물러야 할지
인간의 마음으로 선택할 수 없을 때
그때 신이 개입한다.
7. 신
<1917>을 보다보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약간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두 군데 있다.
첫 번째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폐농가에 들어섰을 때.
스코필드는 기관총 사격에서 살아남은 젖소 한 마리와
온전한 우유 한 양동이를 발견한다.
우유는 상하거나 쏟아지지 않은 상태였고
스코필드는 그것을 수통에 챙긴다.
독일군이 갈긴 기관총에서 살아남은 소 이야기는 실화다.
1차대전 당시 스코틀랜드 연대는 독일군이 후퇴한 지역에서
암소 두 마리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극진히 대접하며 우유를 얻어 마셨다.
그후 스코틀랜드 연대의 상징 동물은 암소가 되었다.
그러나 개연성과 인과가 중요한 영화 매체에서
이런 우연을 그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납득하긴 어렵다.
왜 하필 거기에 우유가 있었을까?
스코필드의 수통으로 들어간 우유는
아기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젖이 된다.
이를 인간인 스코필드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아기를 살리기 위한 누군가의 계획이었을까.
두 번째 장면은 에쿠스트 여인의 집에서 스코필드가 아기를 달랠 때 벌어진다.
지옥같은 여정 속에서, 여인의 보살핌과 아이가 주는 위로는
찰나의 안온함 속으로 스코필드를 순식간에 매몰시킨다.
여인은 "계속 말하라"며 스코필드를 부추기고
스코필드는 점점 꿈속으로 빠져드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스코필드는 꿈에서 깨어난다.
그는 그대로 연옥에 머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때 울린 종소리는 어서 발길을 재촉하라는 '신호'처럼 들린다.
그러나 에쿠스트 마을은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었고, 불타고 있었다.
누가 굳이 아침을 알리기 위해 종을 친단 말인가?
술에 취한 독일군들이 울린 걸까?
우연히 빗나간 총알이 종을 때린 걸까?
아니면...
스코필드는 누가 울렸는지 모르는 종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리며,
마침내 연옥을 빠져나간다.
8. 가엾은 나그네
강물을 타고 크루아지유 숲에 당도한 스코필드는
숲 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노래를 듣고 있던 데번셔 부대를 만난다.
영국 병사가 부르는 노래는 "The Wayfaring Stranger"라는 포크송이자 가스펠로,
미국 남북전쟁 때 만들어져 널리 불린 노래다.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요단강을 건너 집으로 간다는 내용인데
가사는 부르는 이에 따라 조금씩 변주된다.
나는 가엾은 나그네
비통한 세상을 떠도네
질병이나 고생도, 위험도 없는 곳
빛나는 그곳이 내가 가는 곳
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네
더 이상의 방황이 없는 곳
나는 요단강을 건너가네
나는 집으로 돌아가네
먹구름이 날 감싸고
내가 가는 길은 험난하네
하지만 황금빛 들판이 바로 내 앞에 있네
주님의 구원이 영원한 곳
나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는 곳
나는 요단강을 건너가네
나는 집으로 돌아가네
노래에 따르면
요단강 너머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예수-성모)
질병도 고생도 위험도 없으며
방황도 끝날 것이다.
결국 이 노래는 "죽어도 평안하리라"는 레퀴엠이다.
병사들은 얼마 뒤 자신들을 덮칠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이때 그들의 곁에 당도하는 스코필드.
9. 윌리엄 스코필드
"자네 이름이 뭐라고?"
"윌리엄 스코필드…'윌'."
마침내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고
블레이크의 형을 만나 동생의 죽음을 전한 스코필드는
그제서야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굳이 "윌(Will)"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윌리엄의 얼굴을 굳이 보여주지는 않는 카메라.
스코필드는 에쿠스트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할 거야."라는 병사의 비관적인 말에
"아니, 갈 거야.(Yes, I will.)" 라고 대답했었다.
여기서도 카메라는 윌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서구 관객들은 이 연출에서
어떤 유명한 장면 하나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영화 <벤허>에 등장하는 예수.
노예가 되어 지친 '벤허'에게 다가와 물을 주는 목수에게 로마 군인이 호통을 치지만
그는 목수의 얼굴을 보고 압도되어 물러난다.
그러나 카메라는 목수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윌(will)은 '의지'이다.
그것은 톰 블레이크가 받은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평범한 한 영국인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1600명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신, 예수의 의지이기도 하다.
인간과 신의 '의지'가 마침내 크루아지유 숲에 당도했을 때
병사들이 부르던 레퀴엠은 의미가 뒤집어진다.
나는 요단강을 건너가네
나는 집으로 돌아가네
저승 너머에 있던 병사들은
요단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0. 스코필드의 복장
스코필드는 이 여행을 떠날 때
굉장히 염세적인 태도를 가지고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는 블레이크에게 수시로
"고개 숙여." / "엄폐물 찾아." 라고 말하며
적의 총알을 맞지 않기 위해 몸을 잔뜩 수그린 채
천천히 이동한다.
복장은 완전히 무장한 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복장은 점차 가벼워진다.
스코필드는 에쿠스트의 여인에게 자신이 가진 식량을 모두 꺼내주었고
크루아지유 숲에 이르렀을 때에는 마침내 군모도, 총도, 군장도 버렸다.
그가 몸뚱이에 지닌 것은 오로지 '전해야 할 편지', 즉
'사명' 뿐이다.
완전무장한 차림이지만 참호 속에서 옹송그리고 있는 군인들과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서 있는 스코필드의 대비.
진흙투성이로 참호(무덤) 속에 있었던 그는
마침내 참호 위를 기어올라가(무덤을 나가)
누구보다 깨끗하고 눈부신 얼굴(부활하여 빛에 감싸인 예수)로
죽음으로 향하는 진격을 가위로 자르듯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편지 하나만을 지닌 채 달리는 스코필드를 포탄과 총알이 빗겨간다.
이 또한 신이 살짝 개입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11. 그 외
<1917>은 비주얼적으로 대비 구도를 즐겨 썼다.
에린무어 장군이 등장하던 때는 해가 지는 저녁.
메켄지 중령이 등장할 때는 해가 뜨는 새벽녘.
죽은 체리나무와 살아서 꽃잎을 흩날리는 체리나무.
폐농가에서 발견한 여자아이 인형 - 에쿠스트 마을에서 발견한 살아있는 여자아이 등
감독은 이러한 시각적 대비를 통해
삶과 죽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등을 대고 맞닿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12. 마치며
1차대전과 같은 거대한 절망 속에서도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윌리엄 스코필드처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용감히 삶으로 나아간 사람들의 의지와
작은 사명, 그리고 신념들이 모여서 강물을 이루었기 때문 아닐까?
전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은 어디있느냐"고 외치면서 죽어갔을 거야.
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거나, 당장 날아오는 포화를 피하게 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목이 말랐던 스코필드에게 우유 한 모금을 주고
주저앉을 뻔했던 그에게 일어나라며 새벽 종을 쳐 준 것처럼
신은
작은 선의들이 모여 강물을 이루고
다시 썩은 체리를 자라게 할 수 있도록
모든 찰나의 순간들 속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까.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생각해 봤어.
<1917>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이자
세계대전을 직접적으로 겪은 유럽 관객들에게는
굉장히 와닿는 부분이 많은, 종교문학적인 영화였을 것이라 생각해.
그러므로 큰 찬사를 받을 만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랬기 때문에 <기생충>만큼 세계인의 공감을 두루 얻기 어려웠을 수 있어.
이 영화의 목적은 '최고의 전쟁 영화 되기'가 아니야.
기술적인 성취를 뽐내는 영화 역시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
코로나 때문에 관객이 많이 안 들고 있어서 안타깝네ㅠㅠ
내리기 전에 한 톨이라도 더 영화관에서 1917을 접하길 바라며..
좋은 영화니까 아직 안 본 토리들 한번씩만 봐줘ㅎㅎ
이렇게 긴 글 첨 써 봐서 긴장되네ㅠㅠㅠ
혹시 문제 있으면 알려주길ㅠㅠㅠ
출처- https://www.dmitory.com/hy/113203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