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치인들은 역사가의 엄정한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일 뿐이지 심판할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중국의 춘추시대 제(齊)나라에는 무도하고 음탕한 제장공(齊莊公)이라는 임금이 있었다.
이때 제나라에는 최저(崔杼)가 우상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었다.
제장공이 우상 최저의 집에 행차했을때 최저는 자기 아내 당강으로 하여금 술을 따뤄 바치게 하였는데 당강은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
그런데 음탕한 제장공은 당강을 보자 첫눈에 반하여 밤잠을 못자고 고민하다 당강의 오라비 동곽언을 궁궐로 불러 뇌물을 주며 당강을 사모하는 마음을 전했다.
오라비의 주선으로 제장공은 당강과 교정했다.
그런후로 제장공은 남모르게 최저의 집으로 행차하여 당강과 불륜관계를 계속하니, 남.녀의 관계의 비밀이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최저도 제장공과 자기 아내의관계를 알게되어 아내를 다그치니 당강은 눈물을 흘리며"왕이 겁박하는데 아녀자가 무슨 힘으로 버틸 수 있느냐"고 하면서 사죄하니,
이때부터 최저는 제장공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아내와 계책을 꾸몄다.
어느날 제장공이 당강과 교정하려고 최저의 집으로 왔을때 많은 무사들을 매복시키고 기다리다 제장공을 어지러이 쳐죽였다.
최저는 즉시 궁궐로 들어가 새로이 임금을 세우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太史) 백(伯)에게 명령했다. "실록에다 제장공이 학질로 죽었다고 기록하라"
그러나 태사 백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실록에다 " 여름 오월 을해일에 최저는 그 임금 제장공을 죽였다." 라고 기록했다.
그 후 최저는 그 기록을 보고 대노하여 태사 백을 죽였다.
이 때 태사 백(伯)에게는 중(仲), 숙(叔), 계(季) 세동생이 있었다.
다음 동생 태사 중(仲)도 그 형 태사 백과 똑같이 기록했다, 최저는 태사 중도 죽였다.
다음 동생 태사 숙도 두 형과 똑같이 기록했다. 최저는 태사 숙도 죽였다.
그 다음 동생 태사 계도 죽은 형들과 똑같이 기록했다, 최저가 그 기록을 보고 기가 막혀 태사 계에게 말한다.
"네 형 셋이 다 죽었는데 너 또한 생명이 아깝지 않으냐, 내가 시키는대로 쓰면 너를 살려주마." 하니.
태사 계가 대답한다.
"사실을 바른대로 기록하는 것이 역사를 맡은 사람의 직분입니다, 자기직분을 잃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으로도 사직은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내가 쓰지 않더라도 반드시 천하에 이 사실을 쓸 사람이 있을 것이니 최우상이 저지른 일을 감출 순 없습니다,그러니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십시요" 하니.
최저는 그 기록을 태사 계에게 던져주며 깊이 탄식했다.
태사 계가 그 기록을 집어들고 사관 가까이 갔을 때였다, 저 편에서 오는 남사씨(南史氏)와 서로 만났다. "무슨 일로 이리 급히 오시오"하니.
남사씨가 대답한다."난 그대 형제가 다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혹 이번 오월 을해사건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죽간을 가지고 오는 길이오" 한다,
즉, 자기도 태사 백 형제의 뒤를 이어 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 죽으러 오는 것이었다.
후세 사람이 사기에서 이 대목을 읽다 시로서 찬탄한 것이 있다.
"나라에 법이 없어 난신적자가 계속 일어났도다, 능히 난신적자를 죽이진 못하나 붓으로 그들을 죽였도다, 사신은 죽는 것을 두려워 않고 자기사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도다,
하늘에 해는 밝고 밝아서 간특한 신하가 넋을 잃었도다, 슬프다 권세 앞에 아첨하는 자들이여 이 사기를 잃고 부끄러운 줄을 알라."
옛 역사가 이러하니 일제에 아첨하던 자들, 군사독재에 아첨하던 자들, 북한의 백성을 굶겨 죽이는 3대 세습독재에 아첨하는 자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해야 하겠는가.
태사(太史) 백(伯),중(仲),숙(叔),계(季)와 남사씨(南史氏)를 본받아 이어 갈 역사학자만이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이다.
시인, 국제펜클럽회원.
이 중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