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가 중학을 졸업했다는데
이번 봄 학기에 중학 과정을 수료했다.
가을 학기에 고등학교에 들어간다는데
잠깐 국내에 들리리라 한다.
그럼 무슨 말을 해줄까...?
나는 1959년 3월에 중학을 졸업했다.
중학 3학년 내내 고등학교에 진학시킨다는 말씀도 없던 터라
나는 내내 불안하기만 했던 기억이다.
논 다섯 마지기에 일곱 식구 생계가 달렸으니
진학을 요구할 수도 없는 실정이 아닌가.
나는 아버지가 다 읽고 오려서 화장실로 보낼
동아일보를 들여다보기 일쑤였는데
내 눈에 띈 건 이런 기사였다.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326
서울중앙통신강의록’
중학을 졸업한 뒤엔 그걸 구독해 고교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은 국민대학(야간)에 들어가리란 야심찬 결심을 했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국민대학에서
상당수의 사법 행정고시 합격생이 나왔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희망에 찼었다.
중학 3학년 말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어느 고등학교에 진학할 거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난 가정형편이 진학 할 처지가 안 된다고 했더니
학비가 안 들어가는 사범학교에 원서를 내보자는 거였다.
그래서 선생님 가르침에 따랐는데
요행히 공주사범학교 입시에 합격하였다.
그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농사지으면서 중앙통신강의록을 읽지 않았을까?
그것도 성장의 한 길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내가 사범학교에 입학하니
아버지는 한 학기 분 하숙비를 한꺼번에 주셨다.
그걸로 한 학기를 잊고 보내라는 것이었는데
책값은? 생활용품비는? 잡비는?
나는 그 돈으로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여분의 돈으로 책값에, 생활용품에, 잡비에 충당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자 졸업생 2백 명 중에 20명만 발령이 났다.
다행히 성적이 괜찮았던지 20등 안에 들어 발령을 받았지만
나머지 졸업생들은 서울로 올라갔다.
왜? 서울엔 교사기 부족한 상황이었으므로.
그래서 나는 시골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나머지 동료들은 서울학교 교사가 되었으니
인간만사 새옹지마였던 것이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나도, 서울 동료들도 교직에서 모두 밀려났다.
병역 미필자라는 게 퇴직명령의 사유였다.
만 20세가 안 되어 자동 미필인데 말이다.
군사정부 행정이 면밀주도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래서 대학과정 중앙통신강의록을 구독하고 있었는데
6개월 후 쯤 다시 교직 발령장이 나왔다.
1962년도 사범학교 졸업생들을 모두 퇴직시키다보니
교육 현장에 교사 부족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는데
군대행정의 난맥상이 드러난 셈이었다.
교직에 3년 동안 몸담던 중에
교직의 비리가 여기저기서 목격되어
나는 과감히 사표를 내고 무작정 상경했다.
중앙통신강의록은 집어 치우고
낮엔 대학입시 학원, 밤엔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에 들어가고 고시에 도전했다.
1차에 합격하고 2차를 준비하려니
어느 여인이 다가왔다.
여인에 눈 감았더라면?
그러면 또 다른 인생길이 열렸을 것이다.
장차 장모가 되실 그의 어머니와 그 여인, 그리고 나는
이른 새벽에 상계동 어느 점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샛별사랑님이 이야기한 사주를 보는 집이었다.
콩나물 도사라 했는데
그 앞에 나서자 도사는 백지에 무슨 글을 써대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마치 콩나물을 늘어놓는 것 같은 모양의 낙서였다.
그러다가 하는 말이
“이 청년은 장차 훌륭한 의사가 될 사람입니다”
하는 거였다.
장모님이
“이 청년은 법대를 다니고 있는데요?” 하니까
“의사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사회의 병리를 다스리는 명의가 될 것입니다”
하는 거였다.
그것 참!!
장모님은 이 말에 흡족했던지
우리는 기분 좋게 거기를 떠났던 기억인데
나는 그 도사의 말처럼 그리 된 것일까?
손주가 들어오면 이 말이나 들려줘야겠다.
운명이란 이렇게 요동치는 거라고.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해 나가는 거라고.
첫댓글 도사 말 바꾸는데 소질있네요.
사회 병리를 다스리는 명의?
점쟁이가 나름대로 공부 좀 했나봅니다.ㅎㅎ
삶의방을 리드하시는 난석선생님의 글 어렵지만 배울점이 많기에 존경합니다.
점쟁이나 정치인이나
거기서 거기일겁니다.
배움에 많은 어려움의 삶이 있으셨네요.
올려주신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평탄한 길은 드물겠지요.
저에게 이런말을 하더군요 외과 또는 흉부외과
의사가 되었으면 이름난 명의 가 되었을 것인데......
지금은 그런 의사는 안되었지만 회사를 바로 잡으며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것 떠한 명의가 아닐까요 ㅎㅎㅎㅎㅎㅎ
다행히 막내동생이 이름난 내과의 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되었잖아요
글을 읽으며 지안 시절에 잠겨봅니다 가급적이면 행복했던 지난시절을.....
그러고보니 형제가 다 의사시군요.ㅎ
축하합니다.
선배님 여러가지 길을 걸으셨군요 담담하게 풀어 가시는 어려웠던일들 지금은 그저 옛일 이지요
지금은 미국서 잠시 오는 손자 에게 어떤말을 해줄까
생각하는 자상한 시인님
맞아요, 이젠 다 지나간 이야기지요.
이번 일요일에 도착한다는데, 얼마나 컸는지 궁금하네요. ㅎ
난석님~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발령이 나는 기쁨
상상이 가네요.
어려운 시절의 아픔들이 자취를 하게 만들었네요.
그땐 다들 그렇게 어렵게 살았어요.
그게 다 추억이고요.ㅎ
난석님~
사범학교에라고 가셨으니 다행입니다
저도 자취생활을 참 오래 했는데
거의 굶다싶이 했지요
이 또한 추억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그러셨군요.
그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요.
난석 선배님
다양한 삶을 경험하시면서
손자.손녀
자랑스런 모습 바라보니
행복이 달아날 리 없지요
지루함 없이
일상을 시로
마주하는 난석님
질투나게 부럽습니다.ㅎ
뭐 지나고 나면 다 희극이 된답니다.ㅎ
참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저도 군제대후 들어간 대학 3학년때 행시1차에 합격하여 교내에 프랑카드도 붙고
당시 사귀던 여인과 조선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서울야경을 보며 행복해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여인이 옆에 있었군요.
그게 꼭 나쁘다고는 못하지요.
삶이 뭔데요~
다 지나간 일이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