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그는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그의 사후 130여 년이 되는 지금까지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나뉜다. 우리 근대 인물 중 그처럼 포폄이 갈리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의 죽임이 보여주듯이 능지처사로 하여 시신이 안치된 무덤도 없다. 충남 아산시 영안면 아산리에 부인 윤씨와 같이 합장되어 있지만 실제 김옥균의 시신은 뼈조각 하나도 안치되어 있지 않다.
역사상 대문자로 적힌 혁명가들의 운명처럼 그의 삶은 고달팠다. 너무 일찍 깨어 있었고, 너무 빨리 서둘렀고, 대국(大局)은 보면서 소국(小局)은 등한시하고, 청국의 야만성은 알면서 일본의 야수성은 꿰지 못하였다. 30대 초반에 조선은 물론 청ㆍ일의 정계에 일대 회오리를 일으킨 풍운아였고, 낡고 부패한 조선왕조의 근간을 바꾸려한 혁명가였다.〈14개 정강〉어디에도 군주체제를 부정하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지만 혁명적 변혁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다.
남한 역사학자의 평가이다. '3일천하'로 끝나긴 했지만 갑신정변이 가진 역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선 정치면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했고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북한 역사학자의 평가다. "김옥균은 우리나라 근세의 여명기에 조국의 독립을 자본주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하며 봉건적 낙후성을 가시고 부강하고 문명한 새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첫 부르조아 운동을 지도한 애국자이며 진보적 정치활동가였다."
일본 홋카이도 유배시절 문란한 사생활이 혁명가의 이미지를 흐렸다는 분석도 있다. 그 시기 그는 스키타니 라는 이름을 가진 20대 미모의 여성과 동거하고 아들까지 두었다고 한다. 당시 김옥균은 고질병인 류머티즘과 위장병이 재발하여 자주 온천을 찾았고, 스키타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연인 사이가 되었으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망명객의 신분이어서였을 것이다.
김옥균은 '혁명'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나라의 근대적 개혁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였다. 백성들의 민지(民智) 개발을 위해 실업과 기술교육을 역설하고 군사교육을 강조했다. 서재필의 증언이다. “김옥균은 61명을 선발하여 일본 유학을 보내게 되었는데……장차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기운을 가지게 되는 동시에, 우리가 만일 졸업을 하고 우리나라에 돌아간다면 우리나라에도 군관학교를 세워 우리나라의 간성(干城)이어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김옥균이 고종에게 쓴 상소문의 한 부문이다. “오늘날 세계가 상업을 주로 하여 서로 산업을 다투어 경쟁할 때를 맞아 양반을 없애고 그 폐원(弊源)을 끝까지 베어 내는 일에 힘쓰지 아니하면 국가의 패망을 기대할 뿐입니다.……문벌(門閥)을 폐하고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 집권의 기초를 확정하여 인민의 인용을 받고 널리 학교를 설하여 인재를 계발하고 외국의 종교를 유입하여 교화를 돕는 것도 또 하나의 방편입니다.”
일제강점기(1932년)에 원방각(圓方角)사가 제작하고 나운규가 감독한 영화 〈개화당 이문(異聞)〉의 한 장면이다. “가슴에 넘치는 울분의 피를 서리어 담고 동경 관객(館客)에 망명의 날을 보내는 김옥균의 인생은 너무도 참담했으나 그의 사나이다운 기품, 희망을 잃지 않은 기개에는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산을 들어 옮기고 대해(大海)를 들이마실 듯한 영웅아(英雄兒)의 호기에는 일본의 정객들도 경애하여 마지않았으며 입을 열면 불이 날 듯이 토해내는 정론(政論)에는 젊은 지사(志士)들의 공명(公明)이 물결치듯 하였다. 여기에 그는 기어코 다시 동경에서 힘을 가다듬어 조국의 개화를 도모할 큰 경륜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꽃도 지고 녹음이 한창 우거진 신호 부두에서 한 많은 눈물을 뿌리고 갱생의 길을 찾아 상해로 떠나갔다. 그러나 과연 상해에서는 그에게 무엇이 돌아갔는가? 그것은 곧 무참한 암살! 홍종우의 말없는 권총 아래 개세(蓋世)의 영웅아도 하릴없이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갑오 3월 28일 황포강에 물새가 느껴 울고 황해 건너에 슬픈 바람이 물결을 높이니 아- 슬프다, 하늘은 영웅을 세상에 보내셨건만 불명(不明)한 시국은 그를 마침내 값없이 장사 지내고 말았다.
김옥균은 죽었다. 동양의 선각자는 아깝게도 무지한 총에 맞아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붉은 피로 그린 김옥균의 장한 뜻은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남아 신동아의 새 일군을 격려해주지 않는가! ―황포강 흐린 물에 낚시 잠그고/세상은 밤중인데 홀로 일어나/고국의 시절 낚는 타향살이/새벽을 부르자니 바람만 차다.“
근년 한 연구자는 민중적 관점에서 갑신정변을 새롭게 조명하여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김옥균을 비롯 박영효ㆍ홍영식ㆍ서광범ㆍ서재필 등 갑신정변을 주도한 핵심인물을 제외한 적극 참여자 77명의 신분을 추적한 것이다. 추적이 가능한 인물 중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23명의 신문내용이 담긴 「추안급국안 (推案及鞫案)」을 심층 분석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적극 가담자는 양반 13%, 중인 6%, 상한(常漢, 상놈) 51%라는 것이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자들의 대다수가 상한으로 이들의 비중이 60~70% 이상에 이른다.
김옥균과 그 동지들은 1차적으로 정변에 실패함으로 혁명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봉건적 생산관계의 전면적인 해체를 추진하지도 않아서 근대적 혁명의 수준에 크게 미달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한국 근대의 문을 열었음은 사실이다. 거사 10년 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이어서 만민공동회 등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을 움트게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옥균의 갑신정변은 '역사의 화석'이 되고 말았지만, 그의 개혁의지는 '역사의 자석 (玆石)' 역할을 했다고 할 것이다. 역사상 누구도 시대적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인물은 없었다. 로마시대 후기에 처음 등장했든 뒤엎음, 전복을 뜻하는 '레볼루치오'(revolutio)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돌을 치운다"라는 표현에 쓰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