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언어가 낳은 언어들
김명아 시인(본지 주간)
혀는 마음의 붓이라는 말처럼 인간관계를 이끌어 가는 언어는 회복의 언어, 공동의 언어, 인터넷 언어 등 다양하다. 언어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어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소리나 의미가 변화되고 있는데, 이 가역성은 개방성이 더해져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내기도 한다. 언어가 낳은 또 다른 언어는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일까.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 언어들에는 다각적 인식이 필요한 슬랭slang과 약어가 넘치고 있어 의사소통이 힘들어지고 세대 간의 언어 차이를 느끼게도 한다.
언어의 사회성에서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므로 개인이 함부로 바꾸지 못한다.”라고 했는데 상호의존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문화차이를 극복하고 공감할 수 있으려면 서로의 성장과 관계 균형을 위해 “화용 언어”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결국 언어는 세계관을 형성하기 때문에 사회적 상황에 맞게 상대방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말하는 능력, 즉 마음 헤아리기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다양한 삶은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면서 불안을 전달하거나 언어의 양면성에 의해 쉽게 흔들린다. 수직(욕구, 권력)과 수평(연결, 직관)의 축이 어긋나면서 저마다 받아들이는 의미와 선택에 따라 계속 바뀌며 또 다른 해석을 낳고 있는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김준기 교수는 「언어의 함정과 양면성」에서 “언어는 의사소통의 효과적 수단이지만 동시에 이를 방해하는 위험한 도구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언어의 함정에 매몰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라고 했다. 그는 언어의 자유가 주는 부작용을 인식하고 “언어가 진실과 함께하기 어렵다는 점”과 “허위성을 간파해야 할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언어를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을 맞이했”지만 “부작용이 개개인의 삶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라는 점을 인지하고 언어의 오남용을 조심하고 조율의 과정이 필요하며 선별적 수용 능력도 있어야 한다고 썼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우리는 내 언어를 통해 소통하고 인식하며 살아간다. 언어를 통해 감동하고 사랑하며 분노하고 또 다툰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며 그 경계 안에 갇힌 언어의 집은 어둡고 비좁을 수밖에 없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서 그들의 사고방식과 도전 의식, 소통의 한계도 유추해 낸다. 언어를 통해 각자의 세상에 우리는 살고있는 것이다.
존재의 언어는 모든 순간을 이어주고 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므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한다. 계속 바람은 불 것이고 빠르게 스쳐 가고 또 올 것이기에 놓쳐버린 순간들이 끌림이 되어 저항값 없이 받아들이는 운명 같은 시간이 올 때 선택하는 순간들은 삶이란 무대 위에서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언어의 얼굴을 변용變容해 은유의 옷을 입히자. 시는 질문하고 문제를 제시함으로 사유하게 하듯 쌍방향의 소통을 위해 말 걸기를 하고 교집합을 찾을 때, 어느 한 문장이 나의 삶으로 다가와 위로가 될 때,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 행위들은 유전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자리 잡고 있는 그 무엇이 인간존재 가까이 있으면서 순간순간 말을 건네오고 삶의 메시지를 옮기게 하는지도 모른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보고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들이 깊고 넓을수록 시선을 당기며 감동도 클 것이다.
언어의 비유와 상징, 반전의 아름다운 힘이 시에는 있다. 글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면 행복한 떨림일 것이다. 작가는 모두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작품을 쓰고 그리기 위해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보완 수정하며 자신의 속도와 방법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헌신의 자세가 있다면 예상할 수 없는 난관들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핑계나 변명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필요한 모든 일들을 감당하고 전체 안에서 부분을 깊이 있게 볼 수 있어야 언어의 밀도와 색채, 형태의 전달 사이에서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내면이 단단할 때 포기하지 않고 시선이 지나가는 자리를 만든다. 지나친 집착이나 통념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고유한 질문에 끝까지 답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의미와 가치를 찾아 어떤 대상에 꾸준하다는 것은 진심이며 사랑에서 나온다고 했다. 작품은 작가가 고뇌했던 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림을 산다는 것은 작가의 시간을 사는 것이라고 했는데 글도 마찬가지다. 시선이 많이 가는 그림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 듯 행동의 결과물은 결핍이 쌓아 올린 시간들이다. 그래서 꾸준함은 사랑에서 나오고 그 노력은 진심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회적 관계는 다양한 형태와 의미로 규칙이 만들어지고 책임을 요구받게 된다. 언어는 관습적이고 시간의 선상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의식(본능적, 집단적)과 의식(의지, 개인적)으로 유추하여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문학성과 대중성이라는 이름 앞에서 작가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는 독자와 공감하는 코드가 맞을 때 경쟁력을 가지며 자신만이 쓸 수 있는 표현들은 낯선 경험을 통하거나 어느 순간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와 보일 때가 있다. 질문에서 시작한 작품을 통해 진정성 있는 답변을 할 수 있길 바라며 ‘관계의 언어’도 새롭게 교집합을 찾을 수 있길, 언어의 폭력성 너머로 긁힌 상처를 회복의 언어가 치유의 글로 서로를 연결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