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다산 선생 서세 182주기라며, 매년 4월7일에 열리는 묘제에는 일반인도 참석할 수 있으니 찾아가 보자고 강레오 셰프가 나섰다. 종가의 제사 의례도 보고 제사 음식도 맛볼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니 놓치지 말자는 것이었다.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간 곳은 다산의 묘와 복원된 생가가 있는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유적지다.
다산 종가 제사상의 특별한 어탕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강 언저리에 자리 잡은 다산유적지 내 다산 묘는 아침 일찍부터 묘제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 사이로 높이 괸 제물을 들고서 조심스럽지만 잰걸음을 걷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주 정씨 월헌공파 다산 정약용 종가의 7대 종부 이유정씨(56)다. 조율이시(棗栗梨 )와 적·전·탕 등 종부가 준비한 제물을 제단에 다 올리자 제사가 시작됐다. 그러자 종부는 조용히 묘 뒤쪽의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종부의 몫은 여기까지예요. 이제 묘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참석자들이 음복할 수 있도록 제물을 골고루 나눠드리고 상을 치워야죠.”
제물을 준비하느라 지난밤을 꼬박 새웠다면서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 종부는 강 셰프와 마주 앉자마자 ‘다산 할아버지’의 음식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제사상에는 육탕·어탕·두부탕 이렇게 삼탕이 올라가는데, 저희 집안의 어탕은 좀 특별해요. 대부분 북어로 어탕을 하지만 우리는 붕어로 완자를 빚어서 어탕을 끓이거든요. 다산 할아버지께서 즐겨 드시던 음식이에요.”
종부의 어탕 만드는 법은 이렇다. 붕어를 쪄서 살만 발라 완자를 만든 뒤 황태와 파뿌리·버섯 등을 우려낸 육수에 넣고 끓여내면 완성이다. 북어 대신 붕어로 어탕을 끓인 것은 다산이 붕어가 흔하게 잡히는 강가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종부는 설명했다. 다산 사후에도 제사상에 꼬박꼬박 올리는 것은 물론 후손들도 일상에서 즐겨 해먹었는데, 요즘에는 잘 해먹지 않는단다.
“남편인 종손(정호영씨)이 어릴 적만 해도 붕어탕을 질리게 먹었다는데, 요즘은 붕어가 쇠고기보다 비싸니 오히려 잘 못해먹어요. 격세지감이죠.”
강 셰프가 육탕과 두부탕에도 특별한 점이 있는지 묻자 어탕과 같은 방식으로 낸 육수에 쇠고기를 넣으면 육탕, 두부를 넣으면 두부탕이라고 종부가 설명했다.
“두부로 끓인 탕의 이름이 원래 연포탕이라는 거 아세요? 두부를 만들 때 콩물을 끓이잖아요. 콩물을 끓일 때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두부를 ‘연포(軟泡)’라 불렀다고 해요. 부드러울 ‘연’ 거품 ‘포’자를 써서요.”
끓이는 법은 특별할 게 없지만 종부는 유독 이 연포탕에 마음이 더 간다고 했다. 다산이 생전에 워낙 두부를 좋아했고 벗들과도 즐겨 나눠먹던 음식이라서다. 어느 집 제사상에나 다 올라가는 두부탕이지만 종부가 굳이 그 이름을 연포탕이라고 부르길 고집하는 이유다.
채마밭 일구던 다산이 즐긴 음식, 상추버무리
귀향 가 있는 동안에도 직접 채마밭을 일구며 살았던 다산은 자신이 쓴 글에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두릅·더덕·취나물 같은 나물류나 채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상추는 특히 다산이 좋아하던 채소란다.
“상추는 버릴 게 없는 귀하고 좋은 먹을거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우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 중에 상추버무리라는 떡이 있어요. 처음 들어보시죠?”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추버무리는 쑥버무리와 비슷한 음식이다. 상추와 쌀가루를 켜켜이 쌓은 뒤 쪄내기만 하면 완성이다. 쌀가루에 채 썬 대추와 밤을 섞은 후 찌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 맛을 궁금해해요.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요. 한번 해먹어 보세요. 꽤 맛있어요.”
다산이 채소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음식은 또 있다. 호박전이다.
“저희 집안 제사상에는 항상 호박전이 올라가요. 다른 집안에서는 올리지 않는 음식이지요. 다산 할아버지께서 상에 올리셨던 음식이라 저희는 지금까지도 올리고 있어요.”
종부는 요즘 다산이 쓴 글 중에 먹을거리에 관한 것들을 찾아 읽으며 집안 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직접 채마밭을 일구고, 농사를 중시하고, 소박한 음식을 즐겼던 다산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종부가 되기 위해서다.
“다산 할아버지께서 언급하신 음식 중에서 80여가지 정도를 찾아내 얽힌 이야기와 조리법을 정리해뒀어요. 앞으로도 그 작업을 계속 할 건데, 어느 정도 진행되면 책으로 엮어보려고요.”
사람들은 종부의 삶이 얼마나 힘드냐고 안타까워하지만, 때 되면 제사 음식을 해내고 손님 맞이하는 일이 즐겁다는 종부.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만큼 재미도 있기에 종부로 살아간다”고 말하며 웃음 짓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천상 종부’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도움말=이연자<종가문화연구소장, ‘종가의 삶에는 지혜가 있다’ 저자>
남양주=이상희 기자, 사진=김덕영 기자 montes@nongmin.com
이유정 종부의 어탕
붕어를 소주나 청주에 하루 동안 재워서 비린내를 제거한다. 찜기에 찐 붕어는 가시를 발라내고 살을 으깨어 완자를 만든다. 황태와 무·파뿌리 등을 넣고 육수를 낸 뒤 붕어 완자를 넣고 맑게 끓여내면 완성이다. 비린내 없이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도전! 강레오 셰프의 종가음식
씹을수록 쫄깃한 ‘상추버무리’
종부의 설명만 듣고는 도저히 그 맛을 상상할 수 없어서 결국 강 셰프가 상추버무리(사진)를 만들었다. 쌀가루와 상추를 켜켜이 쌓는 것은 종부가 일러준 그대로다. 조린 연근과 대추·잣 등을 사이사이에 넣고 고명으로 올려서 식감과 향미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쌀의 쫄깃함과 상추의 아삭함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만들어낸다. 백김치나 파김치를 곁들이면 감칠맛이 더해져 상추버무리의 맛이 한층 깊어진다.
나주 정씨 월헌공파 다산 정약용 종가
실학사상 집대성한 정약용의 후손
조선시대 정조 때의 문신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고의 실학자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썼다. 20대 초반에 이미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 신하였지만, 천주교도라는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오랜 시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현재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유적지에 있는 여유당(사진)은 다산의 생가를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