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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중에도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참고말씀: 행4:37; 엡5:18
읽을말씀: 행5:1-42
주제말씀: 행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으로 떠나니라.”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1-16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많은 이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때,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7) 어떤 이들도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1절)
다만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값이 얼마만 가져다가 드리면서, 마치 전부를 드리는 것 인양 거짓말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2절) /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 뿐이라 하더라.”(8절) 처음부터 소유를 판 값의 일부만 드린다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 일부러 전부를 드렸다고 함으로써 화를 자초한 것입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4절 상)
이는 누구를 속인 것입니까? 단순히 사도들만 속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의 지적처럼 성령을 속인 것이요,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절 하)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입니까? 사탄 충만, 곧 사탄이 그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3절 상)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절 하) 또한 누구를 시험한 셈입니까? 주의 영, 곧 성령 하나님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절 상)
결국 두 사람은 어떻게 되고 말았습니까? 3시간 차이로 줄초상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 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5-7절) /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9,10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습니까?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거짓된 일들을 멀리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혹시라도 성령님을 속이거나 시험하지 말고,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탄 충만 대신 성령 충만 받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3절 중)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한편, 사도들의 손을 통해 민간에 무엇이 많이 일어났습니까? 표적과 기사입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12절 상) 또한 믿는 사람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어디에 모이기에 힘썼습니까? 성전 내에 있던 솔로몬 행각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12절 하)
그러다 보니 어떤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남녀의 큰 무리가 많이 주를 믿고 나아왔으며,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4절)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 들린 자들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15,16절)
이 일을 통해 또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우리 가운데서 거짓된 일들을 제거할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우리의 공동체 역시 부흥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고난 중에도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17-42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으로 떠나니라.”(행5:41)
이 때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는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17,18절)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들을 어찌해주셨습니까? 주의 사자를 보내어 밤에 감옥에서 나오게 하시고, 생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계속 전하게 해주셨습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19,20절) 그러므로 사도들은 언제 성전에 들어가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까? 새벽입니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21절 상)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은 사도들을 다시 잡아왔으나 왜 강제로 하지 못했습니까?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26,27절) 대신 사도들을 어디에 세웠습니까? 공회입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27절)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사도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전했습니까?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승천하심 등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29-31절)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 일의 무엇임을 밝혔습니까? 증인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32절 상) 누구도 이 일에 증인이라고 했습니까?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32절 하)
공회에 모인 사람들이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애고자 했을 때, 누가 그들을 말렸습니까? 율법교사인 바리새인 가말리엘입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이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33-35절)
어떤 이들을 예로 들면서 사도들을 가만히 두라고 했습니까? 드다와 갈릴리의 유다 두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주라...”(35-38절)
그러자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불러서 어찌 했습니까? 채찍질 한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면서 놓아주었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높으니.”(40절) 그러나 사도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기쁨으로 나왔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절) 그뿐입니까?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기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42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고난 중에도 우리는 주의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 받아도 기쁨으로 주를 섬기면서 나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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