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73
4월28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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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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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Tl_j8M5Ezs
[인천교구 신규환 루도비꼬(숭의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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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제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별다른 바람도 없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봉독되는 요한복음의 주제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말의 의미는? 양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의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한 딱한 상황, 난감한 처지를 경청해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과 혹독한 상처를 누군가가 헤아려주고, 말없이 동반해주며, 가장 힘겨운 순간 없을 지켜준다면, 그 누군들 그를 믿고 따르고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방식의 목자와 양들의 관계는 멀리 떨어져서, 혹은 말로만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항상 함께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신 것입니다.
꽃같은 청춘 시절에도 함께 하시지만, 점차 쪼그라들고 소멸되는 노년기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 승승장구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처철한 실패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역대 교황님들 가운데 가장 푸근하고 따뜻한 교황님을 선택하라면 저는 즉시 요한 23세 교황님을 추천합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그가 처음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살짝 실망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통상 교황님들에게 어울리는 지적이고 세련된 용모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뚱뚱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분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말씀 몇 마디는 즉시 사람들을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여러분, 콘클라베는 미인 선발대회가 아닙니다. 저는 제 선임자만큼 대단한 교황이 못될 것입니다. 잘 생기기도 않았고요. 이 귀 좀 보세요. 하지만 여러분은 제 곁에서 편안히 지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착한 목자요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주교로서 내 삶의 이상입니다. 호의와 이웃 사랑,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길로 초대받았다는 메시지를 단순명료하게 딱 한마디로 요약하십니다. “누군가는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 거룩해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빗자루를 들고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마냥 착하고 좋은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허허실실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집무실 책상 위에는 지구본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지구본을 들여다보며 매일 온 나라를 살폈으며, 매일 세상에 태어날 아기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따뜻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 23세 교황님은 기도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류가 큰 위기 앞에 섰을 때 밤잠도 자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동서 양진영의 책임자들과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평화를 촉구하며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의 그런 그의 노력은 백척간두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지구촌 전쟁의 불길을 진화시켰습니다. 이런 배경 아래 그는 자신의 마지막 회칙 ‘지상의 평화’를 집필하셨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이 쓰신 ‘영혼의 일기’의 한 대목이 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저는 제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별다른 바람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제게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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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Fb4aNWOS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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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성체와 흡수되어야 하는 이유>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27.30)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며 지적 확인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지루한 신학적 증명을 늘어놓는 대신, 당신의 양들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관계의 신비를 말씀하십니다. 왜 양들은 신학적 논리가 아니라 목소리에 반응할까요? 그것은 그 목소리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을 결정짓는 '유전자적 각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에너지와 말씀이 결합할 때 일어나는 이 지울 수 없는 각인의 신비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육을 통해 정보를 습득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정보는 금방 잊힙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정보가 뇌세포 사이의 시냅스에 영구적으로 고착화되려면 반드시 ATP라는 에너지와 새로운 단백질이 합성되어야 합니다. 즉, '먹는 행위(에너지)'가 '듣는 행위(정보)'와 동시에 일어날 때 그 정보는 존재의 일부가 됩니다.
동물 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의 『솔로몬의 반지』에 나오는 회색기러기들의 각인 현상이 바로 이것을 증명합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에게 처음 들리는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 줄 '유일한 에너지원'의 신호입니다. 새끼 기러기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모든 생존 시스템을 그 주파수에 고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각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옳은 '말씀'이라도 그 말에 '피(희생)'가 섞이지 않으면 인간에게 그것은 단지 지루한 '잔소리'로 들릴 뿐이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의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였던 '손 씻기'가 한때는 수만 명을 죽인 '미친놈의 잔소리' 취급을 받았던 사건입니다.
1840년대 오스트리아 빈 병원의 의사였던 이냐츠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는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어가는 원인이 의사들의 더러운 손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동료 의사들에게 "환자를 보기 전 반드시 손을 씻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수만 명의 생명을 살릴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오만한 의사들에게 제멜바이스의 외침은 그저 "우리가 더럽다고 비난하는 기분 나쁜 잔소리"일 뿐이었습니다.
제멜바이스는 말(정보)만 했지, 그 말을 증명할 에너지를 주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말을 비웃으며 계속해서 씻지 않은 손으로 산모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제멜바이스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고, 거기서 간수들에게 매를 맞다 상처가 덧나 '패혈증'으로 죽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은 그의 죽음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가 그토록 외쳤던 '손 씻기'라는 말씀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미친 게 아니라 진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말씀은 비로소 의학계의 지울 수 없는 '법칙'으로 각인되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뿌린 수만 장의 전단지는 쓰레기였으나, 그의 죽음이라는 피가 섞였을 때 그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는 목자의 말은 잔소리가 되지만, 피를 쏟은 목자의 말은 영혼의 유전자가 됩니다. (출처: 셔윈 뉼랜드, 『의학의 역사』)
현상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경험하는 '하나 됨'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일어납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양수라는 액체를 통해 어머니의 심장 박동과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때 목소리는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가벼운 소리가 아닙니다. 양수라는 육체적 에너지를 통해 태아의 온몸을 때리는 강력한 '물리적 진동'입니다.
어머니의 목소리(정보)가 양수의 파동(에너지)과 결합하여 태아의 뼈와 근육에 새겨질 때, 태아는 비로소 '인간의 시스템'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수만 명의 목소리 중에서도 어머니의 음성을 단 1초 만에 식별해 냅니다. 그 음성은 뇌가 아니라 세포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태내의 신비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의 피라는 거룩한 양수 안으로 침잠할 때, 그분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시냅스를 재구성합니다.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듣는 말씀은 지루한 신학이 되지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며 듣는 말씀은 우리 존재를 하느님으로 변형시키는 '최초의 울림'이 됩니다.
최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가수 서인영 씨의 고백은 이 원리를 아주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그녀는 과거 욕설 논란과 이혼이라는 풍파를 겪으며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 만큼 깊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시기에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절망 속에서 그녀는 꿈에 나타난 어머니를 만납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내가 너 대신 죽은 거야!"
서인영 씨는 이 한마디를 "내가 너를 대신해 죽었으니까, 너는 이제 정말 잘 살아야 해!"라는 목소리로 알아들었습니다. 이전까지 "잘 살아라"라는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도덕적 잔소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희생의 에너지와 결합하여 전달되었을 때, 그것은 서인영 씨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운영체제'로 각인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셔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정보만 주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며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는 생명 에너지를 먼저 주셨습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으며 듣는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제 뇌가 아니라 세포에 새겨집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딸을 다시 살게 하는 법이 되었듯, 그리스도의 성체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 인생의 유전자로 각인시키는 유일한 활성 코드입니다. 피를 마시지 않은 자는 그 목소리를 잊어버리지만, 피를 수혈받은 자는 그 목소리를 자기 본성으로 삼게 됩니다.
영화 'A.I. Artificial Intelligence' (2001)에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로봇 소년 데이비드가 인간 어머니를 진짜 어머니로 사랑하게 되는 '각인 절차'입니다. 어머니가 데이비드의 목 뒷부분을 만지며(에너지 접촉), 일곱 개의 특정 단어(정보)를 말해줄 때 데이비드의 전자 회로는 영구적으로 재프로그래밍됩니다. 이 절차가 끝나면 데이비드는 오직 그 어머니만을 향한 일편단심의 존재가 됩니다. 에너지가 수반된 말씀이 기계의 논리를 생명의 논리로 바꾼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먹고 마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가 바로 이 각인 절차입니다.
왜 신앙이 지루하게 느껴질까요? 에너지가 빠진 정보만을 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 없는 말씀 공부는 머리만 키울 뿐 영혼을 각인시키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씀 없는 성체성사는 맹목적인 에너지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첫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통해 하느님 말씀이 각인되어 예수님을 보고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목소리가 “하느님의 어린양” 곧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기에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라는 무한한 에너지를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파동에 실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거대한 정체성의 말씀을 우리 영혼에 쏘아 보내십니다. 이 미사 중에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날 위한 수난을 묵상하십시오. 그 뜨거운 가슴이 없다면 말씀은 각인되지 못합니다. 각인되지 못하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기에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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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뉴스를 통해 전쟁의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만, 결코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시작은 짧은 결단으로 이루어지지만, 끝은 수많은 눈물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것을 반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그것이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이 그 힘을 왜곡시키면서, 더 큰 파괴와 죽음을 낳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해 줍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두려움과 욕망 때문입니다.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더 가지려는 욕망이 서로를 향한 벽을 만들고, 결국은 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전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반복됩니다. 말 한마디로 상처를 주고, 마음속에 미움을 키우며,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미 작은 전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인’입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저에게 발행해 준 ‘한국 여권’입니다. 여권에는 제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어를 사용합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제가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은 한국어입니다. 저는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은 부지런합니다. 주어진 일은 빨리합니다. 저 역시도 부지런한 성격입니다. 주어진 일은 빨리 해결하려고 합니다. 음식도 한국 음식을 선호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지만 ‘밥, 국, 반찬’을 주로 먹고, 한국 식당을 자주 이용합니다. 저는 한국인으로 자부심이 있습니다. 미국 생활을 마치면 제가 살던 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저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독서는 중요한 말씀을 전해 줍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 선택과 태도 안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힘으로 평화를 만들려고 하고, 상대를 이기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들지 않으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방법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상대를 살리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바로 이 길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았고, 미움 대신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었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말했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이다.” 이름이 아니라, 삶이 그들을 그렇게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누군가가 우리를 보며 “저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세상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이,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듯이,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미움 대신 사랑을, 판단 대신 이해를, 분노 대신 용서를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거창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하루 한 가지 선택이면 충분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선택, 따뜻한 말을 건네는 선택, 작은 도움을 베푸는 선택입니다. 그 작은 선택이 쌓여 우리의 가정을 바꾸고, 공동체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게 됩니다. “전쟁은 이익을 남기지만, 하느님의 길은 생명을 남깁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의 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상은 이렇게 부를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 이름에 합당한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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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춘천교구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믿는 이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성전 봉헌 축제로 시간 배경이 바뀌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이는 계절을 알릴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자들의 마음이 싸늘해지고 그분의 죽음이 가까워짐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예수님과 관계를 올바로 맺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도 겨울처럼 차가워질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10,24)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자신들의 기준에 맞게 말해 달라는 자기중심적 요구에 가깝습니다. 메시아라면 모세처럼 위엄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메시아답지 않은’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받아들이는 태도’, 곧 관계 안에 머무르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신이 세운 기준에만 매달려 그분을 바라보았기에,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의 인도를 따를 때 안전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기준, 내 이익, 내 안정만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만든 울타리만 지키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한]다”(10,28). 믿음은 결국, 그분의 손안에 머무르느냐 머무르지 않느냐, 곧 받아들임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내 기준, 내 욕심,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목자이신 주님의 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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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22-30: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 곧 양 떼와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신다. 또한, 마지막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30절)라는 놀라운 선언을 통해, 당신의 신적 권능과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신다.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참된 양 떼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즉, 믿음은 단순히 지적 동의가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행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양이라면,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28절) 여기서 ‘손’은 권능을 뜻한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를 해석하며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손은 같은 권능이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듯이, 아들의 손에서도 빼앗을 수 없다.”(Oratio contra Arianos III,25) 이처럼 양 떼는 아버지와 아들의 보호 안에 있으며, 그분들의 권능 안에서 멸망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의 절정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30절)라는 말씀이다. 성 치릴로는 이 선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 하나이신데, 단일한 위격이 아니라, 단일한 본성 때문이다. 아들은 본성의 일치를 통해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In Ioannem Commentarius VII,10) 아버지와 아들은 위격으로 구별되지만, 본성으로 하나이시다. 그리고 그 일치 안에서 성령께서 사랑의 유대로 함께 하시어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난다.
삼위일체의 일치는 곧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여러 지체로 이루어졌지만,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1코린 12,12 참조) 교리서도 “교회의 일치는 삼위일체의 일치에서 유래한다.”(813항)라고 한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사랑으로 하나 될 때 교회의 참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양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감으로써 이 일치의 공동체 안에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들이다. 주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간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또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30절)라는 선언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며,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오늘 하루도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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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가 걷다>
요한 10,22-30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나가 걷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하나가
걷다
하나가
하나로
걷다
하나와
하나가
걷다
하나와 하나가
하나와 하나로
걷다
하나를 부르는
하나가
걷다
하나가 부르니
하나가
걷다
하나가 따르니
하나가
걷다
하나를 따르는
하나가
걷다
하나와 하나가
하나가 되러
걷다
하나와 하나가
하나가 되어
걷다
하나와 하나가
하나로
걷다
하나가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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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다.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 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앎의 또 다른 시작이다.
유다인들은 눈앞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메시아 상’ 때문이다. 이러이러한 분이 ‘메시아다, 구세주다’라는 생각이 그릇된 ‘메시아 상’을 만들고 결국 예수님을 외면하였다. 때로는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이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관해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도 필요 없다. 오히려 설명이 분명할수록 그들의 고집은 더욱 굳어질 따름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이 없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가고, 유다인은 유다인의 길을 갈 데까지 가야 한다.
생각해 보라. 농사를 짓는데도 ‘농사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지 않으면 더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자기 방법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하게 된다. 품종개량도 하고 거름을 주는 시기도 바꿔보고...,새 방법을 시행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게 된다.
하나가 되려면 먼저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예수님의 순종으로 왔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았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히브5,8).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이다.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하나가 된 주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다.
시편을 보면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139,2-3).라고 적고 있다. 나를 아시는 분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에 관한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남아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은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잘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하나 됨은 삶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 증거된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써 구원의 생명을 주셨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하나이고,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셨지만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 저희가 굳건한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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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예술가들은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발휘한 예술적 재능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주신 은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 역시 이런 마음으로 서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26살에 완성한 피에타에 대해 관광객들은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작품을 다른 작가의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몰래 피에타의 성모님 어깨띠 부분에 라틴어로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에나로티가 만들었다’(MICHAELANGELUS BONAROTUS FLORENTINUS FACIEBAT)라고 적었습니다.
훗날 미켈란젤로는 자기 태도를 크게 후회했습니다. 예술적 은사를 주신 하느님을 망각한 채, 오로지 자기 재능만으로 작품을 제작한 것처럼 행사하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했음을 뉘우친 것입니다. 그 뒤 그는 자기 작품에 어떤 서명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재능, 재주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낼수록 하느님은 보이지 않게 되고, 제대로 따를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의 모든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도 마찬가지로 자기만을 드러내려 했고, 자기의 바람만을 채우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마음을 복음에서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시간과 계절은 종종 영적인 상태를 암시하곤 합니다. 여기서 ‘겨울’은 단순히 물리적인 추위를 의미한다기보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는 유다인들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의 상태, 즉 영적인 겨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라고 말하면서 도발적으로 다가옵니다. 이에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26)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 삶 자체가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열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양은 수많은 목동의 소리 중에서 오직 자기 목자의 음성만을 구별해 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식별하는 것에서 신앙이 시작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안전한 그분의 품 안에 머무르며 참된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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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 봉헌 축제’ 때 벌어진 유다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이날 벌어진 논쟁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라고 도전적인 태도로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그러나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안했으며, 예수님의 ‘양’이 되기를 원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서 ‘양’의 특성을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네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듣다'라는 말에는 ‘더 깊이’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곧 ‘마음에 담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알다'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은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을 바꾸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듣고 순명하는 진정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그렇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채 갈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자유로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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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주님!
제게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도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손수 빚어 만드시고, 제 영혼에 당신 손의 지문을 새기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제 온 몸에 당신 손때를 묻히십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허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제가 당신께 소중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진정, 저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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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2-30)>
1)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는 유대인들의 말은, “비유나 상징을 사용하지 말고, ‘나는 메시아다.’ 라고 직접 말하시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메시아라고 분명히 말해 주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다.”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하겠다. 그리고 당신을 메시아로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도 우리가 결정하겠다. 우선 먼저 당신 자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말하시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미 말씀하셨다는 뜻인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메시아다.”라고 직접 표현하신 적은 없어도,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안에서만 보아도,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나는 메시아다.”라고 밝히신 말씀들입니다.
2)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당국에 고발하고 싶어 하는 속마음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나는 메시아다.”라고 선언하시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반란죄로 로마 당국에 고발할 것이고, 그리고 “예수는 가짜 메시아다.”라고 백성들을 선동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제자들까지도, 모두 예수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나 상징으로만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 비유나 상징만으로는 예수님을 당국에 고발할 수도 없었고, 백성들을 선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그것을 답답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결국 30절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말씀을 꼬투리로 삼아서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요한 10,31.33)
3)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는 말씀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들을 본다면 나를 믿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메시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인정하는 증거이고,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들과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요한복음 7장에 있습니다.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 7,42)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라는 것 때문에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4)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너희는 믿지 않기 때문에, 내 양이 될 수 없다.”입니다. <‘양이 아닌’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는, “내 양이 되려면 내 말을 알아들어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과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은, 신성불가침이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임을 나타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죽음도, 병도, 마귀도 감히 건들지 못하는 ‘하느님의 생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병들고 늙어가면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과 같다는 뜻인데,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의 권한과 같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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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예정출 가브리엘 신부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들어보면 당시 유대사람들은 예수에대해 무척 궁금해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가 정말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인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다 말해주었습니다. 당신이 누구라는 것을 징표로서 다 보여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잔치 집에서 술이 떨어지자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던 분이십니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앉은뱅이를 걷게 만드신 분이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우주만물을 보게 만들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중풍병자와 나병환자를 고치셨고, 악령들린 사람을 치유하셨으며,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며 치유하신 분이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당신을 따라나썻던 오천명을 먹이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갈릴레아 호수위를 거닐으시며 파도와 풍랑을 꾸짖어 잠재우신 분이셨습니다. 우주가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였습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죽었던 야이로의 딸과 나자로를 되살려놓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삶과 죽음을 다루는 생명의 주관자이셨습니다.
버림받은 이들, 외면당하는 이들, 뒤쳐진 이들, 없는 이들을 향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기적을 베푸는 예수의 모습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열망하며 기다려온 메시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형제와 가족을 버렸고, 재물과 집을 버리고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런 만면에 아직도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여도 마음의 눈이 닫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르침을 듣고도 마음의 귀가 닫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그들의 모습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이들은 아버지께 속해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그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신비는 우리를 신앙의 길로 이끌어주는 초석입니다. 우리는 그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우리 신앙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고향도 떠났습니다.
평생을 부활을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미구에는 신앙 때문에 죽음도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기쁨 속에 영생을 희망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삶의 변화를 말해줍니다.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세상사를 쫒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세례를 통해 새사람이 됩니다. 세례를 통해 교회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남겨놓으신 불변의 신앙진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이 진리의 가르침을 계속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의 메시아이십니다. 2천년 전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한마음으로 고백한 그 신앙을 우리는 오늘도 똑같이 세상을 향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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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우종선 라우렌시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불신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일침을 가하면서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언행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믿지 않으려는 유다인들에게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부하면서도 혹시나 진짜 메시아가 아닐까?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이면 어떡하나? 하며 갈등과 두려움에 쌓여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 양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라고 하십니다.
참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을 한치의 소홀함 없이 사랑으로 돌보면서 마지막까지 아니 영원히 책임을 져 줍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착한 목자와 함께 있는 양을 해치거나 빼앗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변함 없는 사랑으로 양들을 보살핍니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변함없는 목자의 모습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양의 태도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의 보살핌에 자신을 맡긴다면 너무나 안전하면서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좋은 양식을 충분히 먹고 즐겁게 뛰놀며 지낼 수 있습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와 보살핌에 더더욱 귀를 기울이고 사랑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이 이상 더 부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보살핌을 참견이라 여겨 거부한다면 양은 머지않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기 전엔 생명의 위협을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양떼들 가운데서 가장 똑똑하고 건강하며 목자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있던 양이, 마음이 교만해져 우쭐되며 지내다가 ‘목장이 맘에 안 든다’며 투정부리거나 양이기를 거부하고 목자인 양 착각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하지 않아도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죽지 않는 한 다시 목자의 품에 돌아올 때까지 고통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지요.
TV를 보며 부모와 자녀가 어쩔 수 없이 헤어져 20년 30년 이상 떨어져 살다가 어느 한편에서 찾으려고 노력한 끝에 상봉하게 되는 장면을 가끔 보게 됩니다.
헤어져 살 때 겪었던 서러움과 아픔들, 그리고 죄책감이 기쁨과 고마움으로 변해 부둥켜안고 웁니다. 정말 가슴 벅찬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기쁨과 행복, 희망으로 살아가리라 여겨집니다.
이와는 달리 전혀 헤어진 적이 없는 가정 안에서 보면 부모는 자녀를 너무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자녀 마음에 들게끔 모든 것을 채워 줄 수는 없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서이거나, 자녀 교육상 다 해 줄 수 없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이때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부모처럼 좋은 부모가 되어 달라 요구하거나, 부모를 부모로 여기지 않고 집을 뛰쳐나간다면 부모의 심정은 찢어지게 아플 것이며, 자녀 역시 가정에 들어와 부모 품에 안길 때까지 고통 속에서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복과 희망이 단절된 상태인 것입니다.
실수와 고의는 분명히 다릅니다. 양이 실수로 길을 잃은 것과 지나친 의지로 거부하고 뛰쳐나가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실수로 인한 헤어짐은 목자가 끝까지 찾아 나설 것이며, 양은 목자의 음성과 비슷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며 결국 상봉의 기쁨을 나누게 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하지만 고의적인 헤어짐은 만날 확률이 아주 낮습니다. 서로의 고통만 가중될 뿐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는 관건은 변함없는 착한 목자가 아니라 양이며 그 양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움을 받았으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약속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주님의 말씀을 잊거나 거부하며, 불평을 토로하면서 떠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도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유다인들과 흡사하다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아직 전해 듣지 못해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약속한 우리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를 놓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고집을 부려 착한 목자의 곁을 떠나 놓고 “왜 목자는 나를 찾아 주지 않느냐?” 또는 “떠나지 않도록 말려주지”라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투정부리거나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아직 사랑 받을 자세가 안 된 것입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인정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실수로 길을 잃은 건지 고의로 뛰쳐나온 건지를 말입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여과 없이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같습니다. 우리가 불안과 불행을 극복하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떠났다 하더라도 빨리 되돌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착한 목자와 함께하는 충실하고 순한 양의 모습처럼 목자이신 주님을 굳게 믿으며 겸손과 순명으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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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내 행적을 보면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않겠느냐”
유다인들은 야훼 하느님을 알고 있었고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내시리라 약속하신 메시아 구세주가 오시리라는 것도 알고 믿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께서 구세주로 오셨는데도 그들은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뜻하셨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의 역할과 그들이 바라고 기대하던 구세주의 모습과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의 회복, 자기 민족의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마련해 줄 구세주를 기다렸으나, 막상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는 그들에게 그런 요구를 채워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야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선포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불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촉하시기를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이요? 진정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주시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요한 4, 26에서 보면 사마리아의 여인과의 대화에서는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 보이셨고, 요한 9, 37에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에게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주장하시기도 하셨던 것이며, 다른 수많은 말씀 등을 통해서도 간접으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구나! 그러니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을 보면 내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으며 그 증거를 볼 수 있지 않느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침묵자이신 야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그분에게 속한 양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편견에 매여있기 때문에, 입으로는 하느님을 찾으면서도 진정한 마음으로 구원이 무엇인지? 구세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에는 외면하는 까닭에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자신도 하느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 사생활이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불편이 오고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자기 성미를 거스릴 때를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처럼 "불안을 언제까지 줄 것인가?"하고 거북스럽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나를 믿음을 통해서 현세적인 생활의 평안과 안락을 내려 주실 줄 알았는데 하며 한숨짓지는 않는지?
예수님은 자기 양들에게 주실 것은 현세적인 자기 욕구의 충족을 말씀하시지 않았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이란, 세상의 생명으로 끝나는 목숨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죽음이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아니하고 멸망이 없는 끝없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이란, 육신을 벗어난 영원불멸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생명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안전이 보장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세에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슬픔과 고난,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어떠한 어려움과 암흑 속에 떨어진다 할 찌라도 그런 속에서도 영원한 당신 생명으로 지켜주시며 영생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참된 목자로서 예수님 당신이 하신 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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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 찬미예수님
가끔, 특정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윤리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할지 동료 사제들의 문의를 받습니다. 이 질문의 이면에는 제가 윤리를 전공했다는 것에 대한 신뢰가 짙게 깔려있습니다.
인터넷이나 교회 서적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 정보들이라 하더라도 직접 확인받고 싶다는 의도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어떠한 것에 대해 알고자 할 때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찾아갑니다. 아픈 곳이 있을 때 너무나도 당연히 특정 전문의를 찾아가고,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에 대해 공부를 한 사람, 혹은 직접적인 실무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래야 더 확실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이 궁금하다면, 그로부터 온 예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을 때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전문가를 찾아가면서도 그 전부터 스스로 답을 미리 내려놓고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문가의 조언을 들으면서도 원하는 답을 얻을 때 까지 재차 질문을 하곤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 자와 질문에 대해 답을 하는 자 사이의 갈등이 생겨납니다.
가령 의사가 어떤 처방을 내려주는데, 환자가 ‘인터넷에서는 다르게 이야기 하던데요?’ 라고 질문을 한다면 상호간의 관계에 불신이 생기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커다란 갈망을 갖고 있던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하늘나라에 대한 전문가로써 여러 가지 올바른 정답을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그전까지 전문가를 만난 적이 없었던 그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하느님의 전문가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너는 과연 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니? 너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심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니? 지나치게 율법에 매달린 나머지 정작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니? 너의 신앙은 과연, 올바르니?
이러한 질문들은 결코 듣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그들에게 이러한 질문들은 질책으로만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불신을 키우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유다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지혜와 기적의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로 당신에 대해 설명하시고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지만 그들이 원하는 답이 아니니,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라고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첫째 부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은총과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이들 앞에는 어떠한 인간적인 장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지혜로운 전문가인 그 아들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의심하고 시샘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결국 불신 안에서 자신 안의 악을 통제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이렇게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기적도 은총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결국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은총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신뢰하는 이들, 그분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전문가가 되는 양 무언가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 대한 답을 내립니다. 그러다 보니 허위 정보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하기도 합니다. 이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전문가의 답을 식별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마음의 움직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관계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내려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곤 합니다.
이 와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본래의 목소리에 대한 경청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겸손함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지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가 주님에 비해 미소한 존재라는 겸손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겸손함은 앞서 말씀드린 예수님의 질문들을 통해 생겨납니다. 너는 과연 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니? 너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심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니? 지나치게 율법에 매달린 나머지 정작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니? 너의 신앙은 과연, 올바르니?
오늘 하루 이 질문들을 되새기며 다시금 영원한 생명, 참된 사랑의 전문가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의사도 학자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권위자인 주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목소리에 다시금 신뢰를 보내며 성실한 양의 자세로 주님께 응답하는 기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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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을 믿지만 잘 따르지는 못하는?>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나는 주님의 양일까? 아닐까? 주님께서 너는 내 양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을까?
나는 주님의 양이 아니면서 주님께서 당신 양이 아니라고 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 주님께서 그러실 리 없다고 믿고 싶기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의 양이고 싶은 것은 분명한데 아직 주님의 양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까요? 그것은 바로 따름 때문일 겁니다.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과연 주님을 잘 따르고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닌데 ‘잘’과 ‘충실히’ 면에서 걸립니다.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환갑과 사제서품 30주년이 겹치는 해에 제 인생을 돌아보니 열심히 산 것은 같은데, 잘 살지는 못했다는 반성이 됐습니다.
목표와 방향이 잘 못 되어 인생길을 열심히 잘못 갔다는 성찰이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살면 잘 사는 줄 알고 열심히만 살았지 내가 잘살고 있는지 성찰하지 않고 산 것이 잘못 살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열심히’와 ‘잘’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은 주님을 잘 따라서 가야지 잘 사는 것인데 내가 가고 있는 것이 주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성찰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 주님을 실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면에서는 잘 따르고 있는데 이제는 반대로 열심히 또는 충실히 따르는 면에서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오늘 주님 말씀과 관련하여 종합적으로 반성하면 저는 주님이 저의 목자이고 저는 그 양임을 의심치 않고 믿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러니 믿는 것보다는 따르는 것에 문제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힘에 부쳐서 그런 면도 있는 것 같고 오롯이 주님을 따르기보다 아직 세상 걱정이 남아있어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그리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더 힘을 내고, 더 주님께 집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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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신앙의 신비!>
오늘 복음(요한 10,22-30)은 '유다인들이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씀'입니다.
그토록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온 유다인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
유다인들은 왜 메시아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을까? 그들이 찾고 있던 메시아, 그들이 만들어 놓고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강하고 힘있는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탄생에서부터 초라한 메시아였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죄 중에 있는 이들에게로 향해 있는 메시아, 마침내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메시아였습니다.
당신을 배척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26)
그런데 참으로 아니러니하게도 그 배척이, 그 십자가 죽음이 예수님의 부활로 이어졌고, 그 십자가와 부활로 복음(구원)이 온 세상으로 전해지는 신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죽음으로 시작된 교회의 박해가 오히려 복음(구원)이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퍼져 나가는 신비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메시아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런 메시아를 잘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으로 하느님과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두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유다인들처럼 배척하는 믿음은 아닌지? 한번 성찰해 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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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이미 이루어진
사랑의 상태를
드러내는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참 많이도 나뉘어
있습니다.
생각은 옳음을 주장하고,
마음은 상처를 품고,
관계는 쉽게 갈라집니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하나됨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이 하나됨은
생각이나 감정의
일치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의 일치입니다.
하느님과 하나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과도,
타인과도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곧
하느님의 행위였으며,
그분에게 하나됨은
말이 아니라
삶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생각과 말, 행동이
자주 분리되어 살아갑니다.
참된 하나됨은 타자를
지워버리는 동일성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살리는
관계적 일치입니다.
이 하나됨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우리의 본래적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히
이룬 존재가 아니라,
하나됨을 향해 끊임없이
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분열 속에서도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멀리 있는 신비가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조금 더 진실하게,
조금 더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하나로 잇는
살아있는 길은
오직 오늘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참된 일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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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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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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