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직장’이 ‘기피 직장’으로… 취업시장 ‘찬밥’ 된 금융 공기업
금융 공기관, 채용시장 인기 하락《“젊은 직원들이 한국은행을 떠나는 건 처우 문제가 가장 큽니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젊은 인재들이 잇따라 한은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최상위권 학벌과 스펙을 보유한 인재들이 한은에 들어오지만 민간 금융권에 간 친구와 갈수록 연봉 차이가 커지는 걸 지켜보면서 허탈해 하는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은은 과거 높은 연봉과 직업 안정성을 내세워 취업시장의 강자로 군림했다. 대학별로 학생들이 ‘한은 스터디’를 구성해 수년간 공부하는 모습도 흔했다. 하지만 최근 한은 직원들 사이에선 ‘신의 직장’에서 이제는 ‘기피 직장’이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은뿐만 아니라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들도 본사의 지방 이전 문제가 겹치면서 취업시장에서 점차 찬밥 대우를 받고 있다.》
● 한은사(寺) 떠나는 2030 인재들
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유동수 의원이 한은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중도 퇴직자(37명·명예퇴직 제외) 중 20, 30대 직원 비율은 73.0%(27명)로 2019년(60%), 2020년(63.64%)보다 높아졌다. 경력직도 2018∼2022년 채용 예정 인원 96명 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49명만 채웠다.
한은 안팎에서는 예고된 사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근 10년간 물가 상승률보다 낮은 한은의 연봉 상승률로 인해 금융 공기업뿐만 아니라 시중은행들의 평균 연봉보다 뒤처졌다. 한은 임직원 평균 연봉은 2012년 9390만 원에서 지난해 1억331만 원으로 늘어 10년간 10.0%(940만 원) 증가에 그쳤다. 이 기간 시중은행들의 평균 연봉은 크게 뛰었다. KB국민은행은 지난해 1억2292만 원으로 2012년(7749만 원)보다 58.6%(4543만 원) 올랐다. 하나은행은 65.0%, 우리은행 49.1%, 신한은행은 46.1% 각각 상승했다.
한은 노조는 ‘한국은행법’ 규정으로 인해 임금 인상률이 제약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은법 98조에 따르면 한은의 급여성 경비 관련 예산안은 기획재정부 장관의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기재부 눈치를 보다 보니 오랜 기간 임금이 오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과급도 민간기업과 차이가 크다. 3급 이하 직원의 경우 업무 성과 평가에 따라 기본급의 최대 80%까지 성과급을 받을 수 있다. 평균 연봉을 고려하면 600만 원 내외 수준이다. 민간기업에 비해 절대액도 적지만 최대 성과급을 받을 수 있는 인원도 10%뿐이라 동기 부여에 미흡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임직원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인재 육성 프로그램 등이 부족해 퇴직 후 민간으로의 이직 가능성이 다른 공공기관보다 떨어진다는 얘기도 나온다. 금융감독원 등 다른 공공기관 임직원들이 전문성을 살려 민간기업 고위직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은은 연구소나 대학으로 이직 대상이 한정돼 있다는 것이다.
젊은 직원들은 잦은 순환 보직과 보수적인 조직 분위기에도 불만이다. 자신의 의견을 내기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폐쇄적인 조직 문화 탓에 일부 직원들은 한은을 조용한 절간에 빗대 ‘한은사(寺)’라고 부르고 있다. 2020년 매킨지앤드컴퍼니는 컨설팅 결과 한은의 ‘조직 건강도’를 100점 만점에 38점으로 낮게 평가했다.
● 지방 이전 가능성에 국책은행 채용 경쟁률 ‘뚝’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낮은 임금 인상률과 더불어 최근 본사의 지방 이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크게 떨어졌다. 두 은행은 2020년까지 평균 50 대 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지만, 지방 이전 가능성이 높아진 2021년 하반기(7∼12월) 이후에는 채용 경쟁률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앞서 수은과 산은은 2019년 상반기(1∼6월) 채용에서 각각 80.87 대 1, 60.07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2021년 대통령 선거 당시 여야 후보들이 앞다퉈 수은과 산은 등의 지방 이전 공약을 내놓으면서 채용 경쟁률이 급감했다. 수은의 지난해 상반기 채용 경쟁률은 22.72 대 1, 하반기 경쟁률은 33.23 대 1로 떨어졌다. 산은도 지난해 하반기에는 29.7 대 1, 올 상반기엔 30.7 대 1로 예년에 비해 경쟁률이 저조했다.
한 취업 준비생은 “산업은행에 지원했지만, 복수로 합격한다면 민간 금융권에 갈 것 같다”며 “연봉도 연봉이지만 지방 근무 가능성이 큰 만큼 서울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을 택하고 싶다”고 말했다.
막강한 규제권으로 ‘금융 검찰’이라고 불리는 금융감독원의 인기도 과거보다 시들었다. 예전에는 회계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이 신입 혹은 경력 직원으로 금감원 채용에 대거 응시했으나, 최근 그 수가 크게 줄었다.
금감원은 올해 초 125명의 신입 직원을 선발했는데, 이 중 회계사 자격증 보유자는 6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7명에 이어 올해 한 명 더 줄었다. 과거 전체 신입 직원의 10∼20%가 회계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절반 이상 감소한 것이다. 올해 경력 3년 이상의 회계사와 변호사 등 전문 경력직 채용에 나섰지만, 과거 대비 지원자 수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 관계자는 “근무 강도에 비해 연봉이 낮은 데다 회계법인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면서 전문 인력 채용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과거 계약직으로 뽑았던 전문 경력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하기로 했지만 효과는 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 “금융 공공기관 인재 외면, 국가 손해로 이어질 수도”
취업시장에선 한은이나 금감원, 국책은행에 몰렸던 젊은 인재들이 시중은행이나 증권사 등 민간 금융사나 네이버, 카카오 등 정보기술(IT) 업체로 향한다고 보고 있다. 직업 안정성은 한은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높은 연봉과 유연한 조직 문화, 수도권 근무 등에서 메리트를 갖고 있어서다. 주요 대학의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졸업생들이 회계법인에 몰리고 있는 것도 금융 공기업의 인기가 떨어진 원인으로 지목된다.
회계법인은 한때 과도한 업무와 낮은 연봉으로 인해 인기가 떨어졌지만, 2018년 외부감사법 개정안 시행 이후 회계사들의 몸값이 오른 데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등으로 근무 강도가 예전보다 낮아지면서 예전의 위상을 회복했다.
국내 최대 회계법인인 삼일회계법인의 2022 회계연도(지난해 7월 1일∼올해 6월 30일) 임직원 평균 연봉은 1억7479만 원, 삼정회계법인의 2022 회계연도(지난해 4월 1일∼올해 3월 31일) 평균 연봉은 1억3040만 원이다. 회계법인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2015년 1만 명 아래로 떨어졌던 공인회계사 1차 시험 원서 접수자가 올해는 1만5940명으로 늘었다.
최근 젊은 층이 사모펀드(PEF), 벤처캐피털(VC), 자산운용사 등 단기간 내 고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선호하는 것도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얼마 전 PEF 운용사에 취직한 30대 직장인 장모 씨는 “요새 20, 30대는 이르면 40대, 늦어도 50대에 퇴직을 꿈꾸고 있다”며 “특히 금융권을 선호하는 취준생들은 근속 연수가 길고 안정성이 높은 공기업보다 PEF나 VC 운용사 등 짧은 시간 안에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우수 인재 이탈이 한은이나 금감원, 국책은행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에 따라 업무 성과와 물가를 반영한 합리적인 임금 조정과 조직문화 개선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 공공기관 고위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 최근 취업자들의 전반적인 스펙이 떨어졌고 특히 회계사나 변호사, 박사 등 전문인력 보강이 어려워졌다”며 “금융 공기업들이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우수 인력 부족은 국가적 손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훈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