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흩날리는 매서운 날이다. 지인들과 어울려먹는 점심시간, 부대찌개라는 메뉴 때문에 부대찌개의 원조는 꿀꿀이죽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의 추운 어느 겨울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부산 영도에서 살던 중학생 때였다. 겨울 방학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남포동 보림극장으로 영화를 보려갔다가 배가 몹시 고팠다. 영도다리를 건너와 풀빵 굽는 데를 찾아가는데 어디선가 기름기 섞인 담백한 냄새가 구미를 자극했다. 우리는 일단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 봉래동 선창가로 달려가 봤다.
시퍼런 바닷물이 냉기를 토하는 부두 가에 발을 멈추어야했다. 지붕도 없고 바람막이도 없는 한데다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쇠죽 끓이듯이 무슨 죽을 펄펄 끓이고 있었다.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선금을 내고 어른들 틈에 끼어들어 냉면그릇 같은 양은대접에 가득 담아 준 꿀꿀이죽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으깬 감자와 완두콩 소시지 토막 빵조각 등이 범벅으로 끓여진 죽을 식히려고 휘졌다가 닭다리가 드러났다. 옆에서 같이 먹던 분이 “학생 재수 좋은데 횡재 했어”라는 말에 모두들 나를 주시했다. 친구 녀석들도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행운을 잡은 기분으로 튀김 닭다리를 뜯으면서 죽 한 그릇을 개 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다음에도 기대를 걸고 갔었지만 닭다리는 없고 감자 옥수수 콩 새콤한 토마토만 들어있었다.
꿀꿀이죽을 먹었던 부산은 일본에서 나왔을 때 첫발을 디딘 고향이다. 요즘도 겨울이면 그 선창가 추억 때문에 부산행 열차를 탈 때가 있다. 꿀꿀이죽은 찾아볼 수 없지만 전설 같은 그 시절의 이야기는 전해지고 있었다. 근래는 열차에서 내리자 말자 지하도 건너 편 초량으로 간다. 화교중학교 앞에 있는 중국빵집에 들려 따끈한 콩국에 계란빵을 먹은 후 영도 선창가를 둘러보고 자갈치 시장을 거쳐 충무동으로 간다. 꼼장어 구이를 먹기 위해서다.
음식은 어떤 형태로든지 맛있게 먹으면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다. 50년대 초 부산에는 피난민들이 넘쳐났고 바닷바람이 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가난해서 하루하루 지탱하기가 힘들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지게꾼과 날품팔이 이런저런 행상꾼들과 그냥 길거리에 흘러 다니는 군상들이 즐비했다.
부산 도처와 영도에는 미군부대가 많았다. 미군들 식당에서 먹고 남은 음식이 흘러나와 한 겨울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던 게 다행이었다. 전국적으로 미군들이 많이 주둔했던 곳에서는 웬만큼이 아니면 누구도 꿀꿀이죽을 외면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낫게 사는 일부는 채면이며 자존심 때문에 꿀꿀이죽을 찾지 않았었지만 가난한 서민들에겐 값싸고 열량이 높은 꿀꿀이죽이야 말로 쉽게 먹을 수 있는 괜찮은 보양식이었다.
꿀꿀이죽은 6․25전쟁 통에 생겨난 대명사로 역사적인 산물이다. 미국에서 무상으로 보내준 분유와 옥수수 가루는 전국적으로 배급되어 전쟁에 굶주린 국민들에게 끼니를 챙겨준 샘이었다. 꿀꿀이죽 역시 미군기지 주변 도시에 사는 빈민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같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꿀꿀이죽을 먹을 사람도 없거니와 구경도 할 수 없다. 배가 부르면 배고플 때의 설음을 쉬 잊어버리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우리나라가 잘 살고 상대적으로 미군부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그 시절은 옛이야기거리로 치부하는 게 당연지사로 봐야 할 것 같다.
근래 누군가 꿀꿀이죽을 먹어본 경험으로 부대찌개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의정부-부대찌개>라는 로고를 보면 변명할 여지가 없는 꿀꿀이죽 모방이다. 부대찌개를 찾는 고객들 중에는 꿀꿀이죽 내용이 무었는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별 관심 없고 국산 소시지와 햄이 들어있는 부대찌개의 얼큰한 맛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60년대 카투사로 의정부에서 복무하면서 꿀꿀이죽을 생각해 보았다. 전쟁 통에 어쩔 수 없이 먹었던 것으로만 기억해 두고 싶었다. 국위를 생각하고 음식문화의 정서로 볼 때, 건강식으로 찾는 보리밥과 부대찌개는 차원이 어떻게 다르다고 봐야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