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주한미군방송(AFKN) 라디오에서 토요일 아침 흘러나오던 '아메리칸 톱 40'는 미국 팝 음악에 목말라하던 이들의 갈증을 가시게 했다. 고교 시절 수업 도중 교사들 몰래 이어폰 꽂고 들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DJ 케이시 케이슴(케이젬, Casey Kasem)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는 팝 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해당 프로그램을 처음 진행한 것은 1970년 7월 4일이었다. 1988년까지 죽 진행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부터 '케이시의 톱 40'란 프로그램을 1998년 2월까지 9년이나 진행했다가 1998년 다시 '아메리칸 톱 40'이란 원 제목으로 돌아왔다.
1932년생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주한미군 방송을 진행했던 인연도 있다. 또 '스쿠비 두'란 인기 프로그램에서 '섀기'란 캐릭터 목소리를 아주 오래 맡은 성우로도 유명하다. 1969년부터 1997년까지, 2002년부터 2009년까지 활약했다.
그는 르위 보디 치매로 투병하다 2014년 6월 15일 워싱턴주 긱하버에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딸 케리 케이슴(52)이 미망인인 여배우 진 케이슴(70)이 아버지를 자식들과 격리시켜 노인 인권을 유린했다며 노르웨이 오슬로에 묻힌 부친의 유해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겨 묻고 싶다고 싸움을 벌이는 중이라고 폭스 뉴스 디지털이 18일(현지시간) 전했다.
고인은 LA의 포레스트 론 묘지에 묻히고 싶어 했다고 다른 친척들과 친구들은 주장했는데도 미망인이 한사코 고집해 오슬로로 운구해 그곳에 안장했다는 것이다.
케리는 케이슴 돌봄(Kasem Cares)이란 시민단체를 만들어 노인을 격리시켜 고립하는 일을 반대하는 운동을 펴고 있다. 이 단체는 이른바 '방문 결의안'(Visitation Bill)을 만들어 가족이 사랑하는 이를 방문하는 일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는데 미국 12개 주에서 통과됐고 9개 주에서는 변형된 결의안을 채택했다고 주장한다.
케리의 말이다. "(노르웨이는) 아마도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한 곳이다. 놀라운 나라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원했던 곳이 아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은 자신이 58년을 살았던 캘리포니아에 묻히는 것이었다."
진의 대변인과 변호사는 매체의 코멘트 요청에 즉각 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슬로의 부친 묘를 방문한 기억에 대해 케리는 "오싹한 느낌도 들었고 평화로운 느낌도 있었지만 그가 원치 않는 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 화가 났다. 다른 사람들, 가족과 팬들도 존중을 표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모셔와야겠다. 그가 묻히길 원했던 곳에 묻어줄 것'이란 감정도 자연스레 따라왔다"고 말했다.
2019년 고인의 세 자녀와 형은 34년을 함께 산 두 번째 부인 진이 고인을 방치하고 신체적으로 괴롭혀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부친을 고립시켜 자녀들이 못 만나게 막았다는 내용도 더해졌다. 그러자 미망인은 자신의 친딸과 함께 고인의 세 자녀와 형을 상대로 맞소송을 제기했다.
영화 '치어스'와 '고스터 버스터즈'에 케이시와 함께 출연했던 진 케이슴은 당연히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부친이 2012년 재정적 지원을 끊자 자녀들이 탐욕 때문에 자신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이라고 맞소송을 제기했다. 진은 자녀들이 자신에게만 아니라 부친도 괴롭혔다고 주장했다.
양쪽은 고인이 눈을 감기 전까지 고인에 대한 접근 권한과 의료돌봄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싸웠다. 캘리포니아주와 고인이 세상을 떠난 워싱턴 주의 경찰과 검찰은 고인의 치료와 죽음 과정을 샅샅이 조사해야 했다. 하지만 범죄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2019년 진은 같은 매체에 장문의 성명을 보내 부친의 뜻을 존중해달라는 케리의 요청이 점잖음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우리는 리버티란 딸을 뒀다. 케이슴이 이전 결혼에서 얻은 다 큰 자녀들 케리와 줄리, 마이크는… 그네들 엄마와 자라 그들의 삶을 재정적으로 돕기만 한 날 향해 뿌리깊은 증오를 갖고 있다. 케리와 줄리, 마이크가 (유사 종교인) 사이언톨로지에 빠졌을 때, 케이시와 난 재정적인 연결을 끊었다. 그러자 그들은 날 사악한 캠페인으로 프레임을 씌워 허위 수사로 날 몰아붙이고 돈을 내게서 뜯어내기 위해 미디어의 관심을 끌어들였다."
그 뒤로 기사는 한참 이어지고 수많은 사진들이 동원됐다. 세 자녀를 고인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주려는 사진 같았다.
이들 편가르기 맞소송의 상세한 내용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내게 고인은 1980년대 유려한 진행 솜씨로 맛깔나게 미국의 최신 유행 음악을 소개해주던 목소리로만 남아 있다. 그리고 치매로 정신줄이 느슨해지기 전에 깔끔하게 주변을 정리하는 지혜가 내게는 있길 바랄 뿐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군홧발에 짓밟힌 지 한 달이 된 시점에 전파를 탄 프로그램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