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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읍
1698년에 영월부(寧越府) 소재지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부내면(府內面)이라 불렀다. 1895년 영월부가 군으로 격하되면서 군내면(郡內面)이라 부르다가 1937년에 천상면(삼옥, 거운, 문산)을 흡수하여 영월 면이라 칭했고, 1960년에 상동면 연하리를 편입하여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에는 대통령령 6542호에 의해 남면의 흥월리와 팔괴리 그리고 하동면 정양리를 편입시켰다.
영월읍은 남한강 상류로 동강과 서강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비가 많이 오면 하안 단구상에 형성된 읍내 시가지가 수몰되는 일이 자주 생긴다.
면적은 167.1km²로 27,087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영흥리, 하송리, 덕포리, 방절리, 연하리, 삼옥리, 거운리, 문산리, 정양리, 팔괴리, 흥월리의 11개 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감자, 옥수수, 깨, 마늘, 녹두,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잎담배가 많이 생산된다. 상동, 제천으로 연결되는 국도와 태백선 철도가 있어서 교통은 좋은 편이며, 단종과 관련된 청령포, 장릉, 관풍헌, 자규루 등의 단종 유적지와 천연기념물 76호로 지정된 은행나무, 그리고 효자, 효부열녀각이 많은 충절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영월 동쪽 30리에 거탄소(居呑所)와 성미탄소(省彌呑所)라는 천민집단 거주지가 있다고 기록되고 있다.
영흥리(永興里)
寧越郡 郡內面 지역으로 유교적(儒敎的)인 인간(人間)의 염원(念願)을 내포하는 의미에서 영흥리라 하였다.
1913년 12월 29일에 공포하고 1914년 3월 1일에 시행한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인 지방 행정구역 조정으로 陵洞, 上松里, 川上面의 三玉里 일부인 저사를 병합하여 영흥리라 하였다. 본 마을(本洞)은 영월읍의 중심지로 관풍헌과 자규루 부근이다. 예전에 寧越府의 官衙(관원이 모여서 사무를 보던 곳)는 48칸, 영월 부사를 보좌하던 유향소(留鄕所)10칸, 훈련청(訓練廳)8칸, 군기고(軍器庫)6칸이 군수 관사와 양주장 터 근처에 있었으며, 客舍는 29칸으로 강원은행 부근에 있었고 그 옆에는 관풍헌(觀風軒)과 자규루(子規樓)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35년전인 1759년 영조 임금 때 寧越都護府는 2,340가구에 인구 9,360명으로 府使 1명(正三品), 座首 1명, 別監 2명, 軍官 30명, 衙前 15명, 知印 6명, 使令 5명, 官奴 7명, 官婢 6명, 軍牢 4명 등이 있었다.
현재는 15개 행정리 3,199가구에 인구는 11,302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본마을, 뒷말, 창말, 늘말, 오목, 속골등지의 자연부락에서 생활하고 있다.
관풍헌(觀風軒)<지방 유형문화재 26호 >
청령포에 유배되었던 端宗이 1456년에 있었던 큰 홍수로 客舍인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하였다. 금성대군과 순홍 부사 이보흠(李甫欽)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자 세조는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을 시켜 사약을 내렸다.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단종이 17세의 어린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친 곳이다.
자규루(子規樓)<지방 유형문화재 26호 >
영월읍 중심가인 관풍헌의 동남쪽에 있는 누각이다. 세종 때(1431)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다. 청령포에서 두 달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관풍헌으로 어소를 옮긴 후 이누각에 올라 그 유명한 자규시를 남겼다.
이 누각은 선조 38년(1605) 호웃로 유실되었으며, 정조 15년(1791) 강원도 감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중건하여 자규루라 하였다.
요리골목
영월초등학교 정문에서 동쪽은 중앙시장으로 가는 골목이다. 식당(요리집)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어 '요리골목'이라 하는데 그 이전에는 '비석거리'라고 하였다.
비석거리
엽연초조합 근처와 영월초등학교 입구를 말한다. 예전의 관찰사, 부사, 군수 등의 선정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었던 곳이므로 '비석거리'라고 불렀다. 그 후, 서원 앞에 있었던 비석들과 함께 일부는 금강정의 K·B·S 영월방송국 앞으로 옮겼으나 많은 숫자가 파손되었다.
불망비(不忘碑)는 백성들이 선정(善政)을 베풀은 수령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건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수령이 자신의 악정(惡政)을 은폐하고 선정을 조작하여 출세를 노리는 수단이나, 이권을 바라는 무리들의 아부, 또는 일부관속들이 선정비 건립을 핑계로 돈을 거두어 그 일부를 척복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선정비 건립은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비춰졌으므로 원성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돌을 던져서 비석을 깨뜨리는 '비석치기'라는 놀이문화까지 생겨났다.
창말(創洞)
엽연초조합과 영월맨션 상가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이곳의 지명은 조선 후기 관곡을 보관하던 읍창(邑倉)인 창고가 있었던 곳이므로 '창마을→창말'이라고 하였다. 「寧越府邑誌」에 읍창의 규모와 위치를 『在府西一里 四十四聞. 즉 읍창은 영월 동헌 서쪽 1리에 있으며, 그 크기는 44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하동면 예밀리(禮密里)의 밀골에는 두창(杜倉), 중동면 이목리(梨木里)에 동창(東倉), 남면에 서창(西倉)이 있었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전세(田稅)나 세곡(稅穀)은 뱃길을 이용하여 원주 부론면에 있었던 흥원창(興原倉)으로 모아졌다가 원주, 횡성, 평창, 정선의 세곡과 함께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으로 옮겼다.
오무개
영월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내성초등학교, 영월중·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예전엔 큰 오동나무가 있었으므로 '오목개, 오무개'라 한다.
오동나무는 틀어지거나 벌레가 끼지 않으며 가볍고 나무 결이 아름다워서 장롱 재목으로 이용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울안에 오동나무를 심어 딸이 성장하여 시집갈 때 이 나무를 베어서 예물을 담는 함이나 장롱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장롱의 안 쪽에는 먹으로 글씨를 쓴 문종이를 발라 묵향이 은은히 배어 나오게 하여 좀과 같은 벌레가 끼는 것을 막기도 하였다.
일설에는 예전에 이곳이 넓은 들녘으로 보리밭이 많았다고 한다. 그 때는 보리밭에 인분을 주었으므로 까마귀 떼가 이것을 먹기 위해 많이 날아들었으므로 '오무개(烏舞)'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개'는 '물가'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아침저자
창말 뒤에 있는 장터로 채소, 반찬거리 등을 사고 팔기 위해 새벽에 서는 장이다. 광산 경기가 좋았을 때에는 함백, 사북, 고한 등지에서 많은 장사꾼들이 새벽장을 보러 이곳까지 왔었다.
낮저자
물거리 부근에 형성된 시장이다. 아침저자와는 반대로 주로 한 낮에 많은 거래가 이루어져 '낮시장'또는 영월의 시가지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시장'이라고 한다. 1972년과 1990년 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
매봉산(梅峰山)
영월읍의 鎭山으로 평창의 두만산맥과 접해있다. '매'는 '山'을 뜻하는 뫼에서 온 말로 '매봉산'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6·25사변 때 인민군이 파놓은 방공호와 이때 집단 학살된 주민들의 유골이 지금도 많이 발굴되고 있다. 이 매봉산 자락에는 창절서원(彰節書院)과 단종의 영정을 모신 영모전(永慕殿), 보덕사(報德寺), 금몽암(禁夢庵)이 있다.
향교골
금강정으로 오르는 골짜기로 법원 가는 길 아래에 있다. 조선 太祖 7년(1398)에 창건한 영월향교(寧越嚮校)가 있으므로 '향교골→행기골'이라 한다. 이곳은 영월 유생들의 총 본산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된 대성전(大成殿)과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8각 지붕을 한 풍화루(風化樓)가 있다.
창절사(彰節祠, 彰節院) <지방문화재 27호 >
영월읍에서 능말로 가는 입구인 본산(삼각산, 매봉산) 밑에 있다. 사육신 6人, 엄흥도 박심문 충신 2人, 김시습 남효온 생육신 2人을 모시고 봄(3.15)과 가을(8.15)에 제사를 지낸다.
원래는 장릉 경내에 있었다. 숙종 임금 때 최석정(催錫鼎)이 "육신사는 단종의 복위를 위해서 죽은 신하들이므로 죽어서도 장릉을 보호할 수 있도록 경내에 그냥 두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였지만 왕릉에 신한의 사당을 함께 두는 것이 불가하다 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경내에는 배견루(拜鵑樓), 육신사(六臣祠)가 있었다.
성인암(聖人庵)
금강정의 동북쪽 봉래산 기슭의 동굴 속에 있었던 유명한 암자이다. 한여름 철에는 우거진 나무 사이로 폭포가 흘러내리며 금장강(동강)과 덕포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절경이다. 위험하고 험한 벼랑길을 일반 신도들 보다 더 잘 다니는 앞을 못 보는 스님이 한 때 이곳에 있기도 하였으며 70년도 사찰 정비때 철거되었다.
「寧越府邑誌」에 『聖人巖在付東五里?萊山下水石淸寄有畓十庫掠...拂有三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강정(錦江亭)<지방 문화재자료 24호 designtimesp=2472>
금강장의 절벽에 있는 정자이다. 앞으로는 계족산과 태화산을 마주하고 금봉연(錦鳳淵)을 바라볼 수 있는 절경으로 1428년(세종 10)에 군수 김복항(金復恒)이 창건하였다. 그 주위에는 낙화암, 민충사, 성인암, 경춘순절비 등이 있고 정자 밑으로는 푸른 금장강(錦障江)이 흐른다.
낙화암(落化巖)
영월의 동족 금장강(동강)변의 충암 절벽에 있다. 단종이 승하한 후 그를 모시던 궁녀, 관비, 궁비, 무녀 6명과 시종 1명이 통곡을 하며 치마를 뒤집어 쓰고 푸른 금장강으로 떨어져 순절한 곳으로 '落化巖'이란 비석이 남아있다.
경춘(瓊春)이 비석께
영월읍 금강정에 있는 포도밭을 지나 낙화암 쪽으로 가다 보면 한적한 오솔길 옆 절벽 위에 『越妓瓊春殉節之處』라고 쓰인 수백년 묵은 이끼낀 비석이 있는 곳이다. 이 비석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의 기생으로서 영월 부사 신광수(申光洙)의 수청을 거절한 채 낙화암에 투신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킨 고경춘의 순절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현대 여성의 귀감이 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35년 전인 조선 후기 영조 임금때, 영월읍에 고순익(高舜益)이라는 마음씨 착한 선비가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는 평소에 단종대왕을 추모하면서 자식 얻기를 열망하였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로 端宗 大王이 돌아가신지 300년후 기일(1757년 10월 4일)에 그는 예쁜 딸을 얻게되었다. 아버지인 고순익은 端宗 大王인 魯山君이 점지 해준 옥(玉)같이 소중한 자식이라는 뜻으로 딸의 이름을 노옥(魯玉)이라 했는데, 노옥은 어릴 때부터 예의 범절이 뛰어나고 용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글도 잘하여 부모님과 이웃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옥은 다섯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3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어려운 가정을 꾸려 나갔다.
그후, 의지할 곳이 없는 노옥은 할 수 없이 이웃에 사는 秋月이라는 늙은 기생의 수양딸이 되었는데 양모인 추월이도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여, 노옥이 할 수 없이 기생이 되고 말았다. 뛰어난 미모와 능한 가무 솜씨를 가진 노옥은 경춘(瓊春)이라는 妓名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온갖 유혹을 다 받았으나, 몸가짐을 깨끗이 함으로서 그 명성은 날로 높아 갔다.
그러던 중 경춘이 열여섯살 되던 해 장릉에서 영월부사 이만회(李萬恢)의 아들인 이수학(李秀鶴)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그들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영월 부사인 아버지가 한양으로 영전하니 이수학은 과거에 급제한 후에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고, 3년만 기다려 달라면서 슬픈 이별의 눈물을 흘리며 서울로 떠나고 말았다.
그후 영월 부사인 구협(具挾)이 병으로 죽자 그 후임으로 당대의 문장가인 신광수(申光秀)가 영월 부사로 부임하여 경춘에게 수청들기를 강요하자 경춘은 점임 부사의 아들인 이수학과의 관계를 말하며 신광수 부사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영월 부사 신광수는 이를 허락지 않고 수청을 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까지 위협을 했다. 이에, 경춘은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 하직 인사를 한 후, 한양에 있는 이수학이 주고 간 사랑의 증표를 지닌채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이 투신한 금강정 낙화암 절벽에서 몸을 던짐으로써 열 여섯의 어린 나이로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1773년12월의 「승정원 일기」에 『영월 부사 신광수(申光秀)는 지난날의 속되고 모진 잘못으로 파면시켰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경춘이 금강정에서 투신한 두달 후에 영월 부사 신광수는 결국 삭탈관직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후, 경춘이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순절한지 20여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에 순찰사 손암(遜岩) 이공(李公)이 영월은 순시했을 때 경춘의 슬픈 사연을 듣고 이 비석건립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평창 부사 남의로(南義老)가 글을 짓고 영월 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써서 투신한 낙화암에다 『越妓瓊春殉節之處』라는 비석을 세워 후세에 경춘의 절개를 높이 찬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내용과 비슷한 남원의 춘향은 허구적인 소설 속에 인물인데 반하여 영월의 경춘은 실제 인물이라는 점에 대하여, 우리 영월 사람들은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다. 특히, 남원은 춘향이와 관계있는 광한루, 춘향의 생가, 춘향의 버선 등 가공적인 유적지를 만들면서까지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데 우리고장 영월도 실제 인물인 경춘의 유적지를 조성하여 하루 빨리 관광 영월을 빛내는데 앞장서야겠다.
민충사(愍忠祠)<지방 문화재자료 27호 >
단종을 모시다가 낙화암에서 순절한 官女 者介, 官婢 阿加之, 官婢 佛德巫女 龍眼, 巫女 內隱德, 巫女 德非와 시종 1명의 넋을 모신 사당으로 그들이 죽은 10월 24일에 제사를 지내며, 1742년(영조)에 洪英甫가 창건하였다.
그 당시 단종과 생이별을 한 定順王后는 시녀인 계지(戒智), 희안(希安), 지심(智心)과 함께 동대문 밖의 창신동과 숭인동 사이인 동망봉(東望峰)에서 정업원(淨業院)이라는 초막을 짓고 단종의 영혼을 기리며 생활하다가 노년에는 단종의 여동생인 경혜공주의 아들 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를 수양자로 삼아 그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으며 사능(思陵)이라 하는데 영월로 이장하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
신사터(神社)
영월 엄씨(嚴氏) 시조묘 밑으로 일제(日帝) 때 일본 황실의 조상을 신(神)으로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사당은 기둥 네 개를 세운 위에 함석으로 된 사모지붕을 얹은 형식으로 일본 국경일에는 영월의 기관장과 유지들이 참배하였으며, 일제말기에는 12시에 정오(正午)사이렌 소리와 함께 묵도를 강요당했던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파손된 신사비(神社碑)와 계단이 남아있으며, 영월의 신사(神社)를 관리하던 일본인 후꾸다는 봉래산에다 쇠못을 박아 혈을 끊기도 하였다.
오무천(烏舞川)
무랑골에서 시작하여 물거리 옆의 동강으로 흘러가는 개천이다. 예전에는 붕어, 버들치 등 많은 고기가 서식했는데, 지금은 생활 폐수로 오염되어오기가 살지 못한다. 오무개(烏舞盖)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물이라 하여 '오목천'또는 '오무천'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수해에 대비하기 위한 수압펌프식 하상정리를 하고 있다.
오리정
관풍헌이 있었던 본 마을에서 5리가 되는 영월공고와 내성초등학교 부근의 옛 지명이다. 구한말 을사의병(乙巳義兵)과 정미의병(丁米義兵)에 참여했던 정대억(丁大億)의병이 37세 때 이곳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참살 당한 곳이다.
그의 자는 경천(敬天)인데, 영월읍 삼옥리에서 출생하여 북면 연평에서 성장했으며 정의사(丁義士)의 묘는 연덕리 오만동에 묘비도 없이 방치되어 있다. 영월의 뜻 있는 사람들이 금강공원에 그의 순국비(殉國碑)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영모전(永慕殿) <지방 유형문화제 56호 >
영월의 주사인 삼각산(매봉산) 자락에 있는데 원래는 서낭당이 있었던 자리로 「영월부읍지」에 『성황단재부북이리임자개축립사방홍살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 1517년(중종)에 단종을 추모하기 위하여 새로이 사당을 건립하였다.
영월에서 승하하신 단종 혼령이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이곳 사람들의 믿음은 단종을 추모, 숭상하는 일종의 신앙으로 발전하여 영월의 영모전, 녹전 성황당, 정선 여량의 성황당, 태백 어평 성황당, 청령포의 대왕각, 보덕사의 칠성각 등에서는 지금도 단종의 위패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영모전에는 곤룡포를 입은 단종의 목상(木像)을 모셨는데 분실되었고, 1930년에 영월군수 이계진(李癸眞)이 사당을 수축하여 영모전이란 현판을 걸고 백마를 탄 단종의 영정을 모셨으나 6.25때 훼손되었다. 그 후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영정(그림, 운보 김기창 화백)과 이승만 대통령이 쓴 현판을 다시 달았다.
매둔지
오목의 동쪽 넓은 들녘 뒤에 있는 둔덕지이다. 봉래산(큰뫼) 밑에 있어서 '묏둔지'라 하는데, 일설에는 옛날 사냥꾼들이 이곳에서 매를 날려 꿩사냥을 했기 때문에 '매둔지'라고 한다는 얘기도 있다.
옛날 사냥꾼들은 새매의 꽁지 속에 주인임을 밝히는 '시침'이라는 네모진 명패를 매달았는데, 매를 훔친 사람은 이 시침(시치미)을 떼어내 임자를 찾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시치미를 뗀다'는 말이 생겼다.
장릉(莊陵), 능말<사적 196호 >
영월 읍내에서 31km 거리인 북쪽 동을지산 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문종(文宗)의 아들로 1452년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후 청령포에서 2개월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영월 관풍헌에서 승하(昇遐)하신 단종(端宗)임금의 능(陵)이 있는 곳이므로 '장릉(莊陵)' 또는 '능마을→능말'이라고 한다.
물무리골
장릉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넓은 잔디밭과 물이 많이 솟아나는 늪이 있다. 예전부터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현재 이곳은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충신의 사당과 기념관이 건립되어있다.
절골, 금몽암
능말의 북쪽 골짜기이다. 보덕사와 금몽암이 있어서 '절골'이라 한다. 보덕사와 금몽암 사이에는 얼마 전만 해도 부도 2기가 있었으나 1기는 도난 당하고 1기는 보덕사로 옮겨졌다. 절골에 있는 금몽암은 의상조사(義相祖師)가 창건하고 지덕암(旨德庵)이라고 했으나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암자를 보고는 궁중에 있을 때 꿈 속에서 본 암자와 똑같다하여 '궁중 禁'자와 '꿈 夢'자를 써서 '금몽암'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보덕사(報德寺)<지방 문화재자료 23호 >
능말 절골에 있는 절이다. 신라 文武王 8년(668)에 의상조사(義相祖師)가 창건하고 그 후 1161년 설허선사(雪虛禪師)와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 사성전, 고법당, 침운루 등을 축조하였다. 그 후 영조 2년(1726)에 보덕사로 고쳤으며 6.25때는 강원도 경찰학교로 이용되었는데 이 때 소실된 것이 많았다. 석탑과 탱화가 있었으나 1993년에 도난 당했다.
장릉저수지
영월 북쪽 능말에 있다. 저수지의 크기는 240m, 높이는 6m이며 저수량은 42,000톤으로 영월군에서는 가장 큰 저수지이다. 여름철에는 낚시터로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 옆에는 장릉 서낭당이 있다.
소나기재
능말에서 방절리 선돌과 북면 삼거리(문성개)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부터 이 고개는 푸른 소나무로 가득한 고개 였으므로 소나무 안에 있는 고개 즉, '솔안이재→소나기재'가 되었다. 일설에는 단종이 유배지인 청령포로 가면서 이 재를 넘었는데 하늘도 서러워서 많은 소낙비를 내렸다는 전설이 있으며, 또 다른 주장은 새로 생긴 고개이므로 "새내기재"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속골(솥골)
오무개 북쪽으로 첩첩산중 깊숙한 곳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이곳의 지형이 풍수학적으로 솥을 걸어놓은 형상이므로 개천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즉, 속골의 중심부인 마을회관 있는 곳이 솥의 형국이고 그곳을 중심으로 영월 읍내와 삼옥재, 분덕재로 갈라지는 삼거리 도로가 화로 속에 박아 놓고 음식물을 끓이는 데 쓰는 삼발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떡을 찌는 시루인 시루봉이 있고 시루봉과 솥사이에는 물안골이 있으므로 이곳을 '솥골'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솥골'이 '속골'로 변했다고 한다.
송산사(松山寺)
봉래산 기슭인 속골에 있는 절이다.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산사'라고 하며, 송이버섯이 많이 나는 지역이다.
갈래골
속골 본동에서 봉래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이다. 지금은 목장이 있으며 삼옥재 입구에서 갈라지는 곳이므로 '갈래골'이라 한다. 젖소를 키우는 강원목장이 있는 곳이다.
삼옥재
속골에서 삼옥으로 가는 유일한 고개이다. 삼옥, 거운, 문산리 사람들이 홍수로 인하여 배를 건널 수 없을 때는 이 재를 넘어서 영월 읍내로 왔었다. 삼옥재의 8부능선에는 잣나무와 낙엽송 숲이 우거졌으며, 그사이에는 맑은 샘물이 솟아나서 길손들이 목을 축이기도 했다. 그 옆에 있었던 산신당(山神堂)은 허물어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켜놓고 메를 지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솔가지골
속골 본동의 서북쪽에 있으며 70년대 만해도 이곳 사람들은 장작이나 숯을 만들어 읍내로 지고 가 팔아서 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이곳에서 솔가지를 다듬은 후 장작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곳을 '솔가지골'이라 한다.
골안
솔가지골 동북쪽에 있다. 송이골로 가기 직전에 있는데 속골 안에 있으므로 '골안'이라 한다.
송이골
골안을 지나서 소나무가 울창한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송이버섯이 많이나며 이곳을 지나면 '안송이골'이라 한다.
밤나무골
솔가지골과 붉은 양지 사이에 있다. 예전에 밤나무 숲이 울창했으므로 '밤나무골'이라 한다.
붉은 양지
밤나무골 옆에 있다. 정남향으로 늘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곳이다.
두목골
붉은 양지 서북쪽에 있다. 이곳은 북면 문곡리의 두목으로 넘어 갈 수 있기 때문에 '두목골'이라 한다.
삿갓봉
상봉우리의 형상이 삿갓모양이면 천지가 개벽할 때, 이 산이 삿갓만큼 남았으므로 '삿갓봉'이라 한다는 전설이 있다.
물안골(水岩洞)
이 골짜기는 장마철이 되면 많은 물이 땅속에서 쏟아져 나오므로 '수암동' 또는 '물안골→무랑골'이라고 한다. 그 뒤에 시루봉이 있다.
분덕재
속골에서 북면 마차리와 분덕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지금 이곳은 도로공사 중이며, 이 길이 완성되면 영월에서 마차까지는 15분 거리로 단축된다고 한다. 전에는 마차탄광의 탄을 실어 나르는 케이블카(삭도)가 설치되어 영월발전소까지 운반하였다. 1943년에 설치된 케이블카는 지주가 48개나 되고 그 길이는 12km나 되었는데 그 당시는 하늘로 떠 다니는 솔개처럼 생겼으므로 '솔개차' 또는 '솔개바가지'라고 불렀다.
왕서덕골
물안골 동북쪽에 있다. '서덕'이란 크고 작은 돌들이 널려 있는 곳을 말하는데, 이곳은 예전에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느라고 큰 돌무지를 만들어 놓았으므로 '왕서덕골'이라고 한다.
출처 : 영월군 관광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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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난 알어! "영월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라는 책자에 수록된 내용 이다. 이 책은 석정학교의 엄흥용 선생이 영월의 지명을 조사한 것을 내가 1994년 영월군청에 근무할 때 책으로 펴낸 것인데, 엄흥용 선생에게 많이 미안했다. 왜냐하면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영월의 구석 구석을 다니며 조사한 것인데 원고료 없이 단돈 천만원의 출판비만으로 책을 출간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책은 강원도 에서 처음 발간한 지명유래지 이며, 이 후 각 지역에서 유행 처럼 발간한 지명유래지보다 충실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아니 이럴수가 난 인터넷에서 영월을 검색 하다가 퍼온것인데 이 책을 종수가 만든줄은 꿈에도 몰랐네....내용이 좋아서 영월 친구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 퍼온것인데... 저자에게 딱 걸렸네...
글쓴 분은 엄흥용 선생이다. 나는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마련해서 책을 만들었을 뿐이지. 영월에서 경험을 가지고 원주에서도 지명유래 책자를 만들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실패작이었다.
여고시절 엄흥용 선생님이 담임이셨는데 뵙고싶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실천으로 옮기는건 왜그리 안되는지. 이책자는 나도 봤다.
그랬구나..엄흥용 선생님 나도 뵙고 싶다...
종수가 원주 지명유래 책자도 만든 것 잘 되어 있을꺼야 사진도 잘 찍지 전에 문양 책자도 넘 근사하던데.......
우리친구들 너무 자랑스럽네. 우스개소리할땐 하고 이렇게 유용한 정보를줄땐 활실히 주기도하고 말이다. 아닌게아니라 난 우리교가에 뒤에솟은 매봉산이 봉래산 인줄 알았네 근데 학교옆에 요리골목이있으면 지금같으면 엄마들 난리날텐데 ....
어쩌냐 난 울 남편이랑 친한 친구라 엄흥용씨가 스승이 아니라 남편친구라 부르는 호칭두그런데...하기사 다음엔 꼭 아는척 혀야겄다 우리집에 들르시면 꼭 고들뻬기김치만 찾으시는데....울아들에게두 알려줘야겠구 정만이를 통해서 이제사 영월을본다 난 인정 영월을 깊게 몰랐슴을......그러구 종수야 니 진짜루 큰 일 많이 혔구나...느그아들이 자랑스러워 하겄다 아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