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란 무엇인가
作家란 말을 한자어로 뜻풀이를 해보면 ‘무언가를 짓는 사람’이다. ‘짓다’는 만들다 라는 뜻이다. 작가가 ‘글을 짓다’라고 할 때는 창작해야 하고, 그로 인한 인고의 고통도 많이 따른다. 단어 하나하나의 선택에서, 선택된 단어로 문장을 만드는 것까지 번민과 고민을 거듭한다. ‘글을 짓다’라고 할 때는 단순히 ‘만들다’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인고의 고통을 참으면서 창작품을 만들어 내는 행위가 내포되어 있는 뜻으로 읽어진다. 그런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수필작가라고 하면 고통을 참으면서 수필을 짓는 사람이다.
흔히들 작가를 ‘천재’라는 개념으로 보았다. 칸트가 도입한 개념이다. 천재라는 개념은 글이 쓰고 싶은 보통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도록 한다. 특히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는 보통 사람이 많기 때문에 두려움을 더 많이 느낀다. ‘나는 글쓰기에 재주가 없다.’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재주는 천재성과 연결된다. 문학작품을 좋아해서 읽기는 하나 두려움 때문에 ‘쓰기’에는 덤벼들려고 하지 않는다. 작가를 천재로 보는데서 오는 현상이다. 나는 글재주가 없는데(천재가 아닌데)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느냐, 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수필지에 등단이라도 하여 동료들이 ‘수필가님’이라고 불러주면 자신이 정말 천재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는 ‘천재’가 아니다. 더더군다나 수필작가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기를 천재로 생각하는 사람은(수필가라고 우쭐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병적인 인간일 수가 많다.
블랑쇼(프랑스 현대 문예이론가)의 말도 들어보자.
작가는 재능을 소유한 천재도 아니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이상주의자도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의해서 드러나는 사람일 뿐이다. 재능도 역시 작품을 통해서 드러날 뿐이다. 글을 쓰지 않는다면 작가가 아니다. 작가는 작품의 바깥에 있는 그 어떤 것을 작품에 투사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 무언가를 작품으로 실현한다. 작품에 그 무언가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단어이다. 작품의 가치, 진리, 현실성은 단어를 통해서만이 드러난다. 작가는 바로 이 시점에서 글쓰기를 한다.
이것은 블랑쇼가 말하는 작가론이지 작가의 일반론은 아니다. 그러나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의식과 자아에 갇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는 어떤 의미를 보여준다. 작가는 더 이상 쓸 것도 없고, 글을 쓸 어떤 방법도 모르면서 글을 쓰기를 강요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도 계속하여 글을 쓰는 사람이다.
(* 블랑쇼의 작가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블랑쇼의 주장 하나를 들어보자. 우리는 생활하면서 끊임없이 체험하고, 경험한다. 체험하고 경험하는 순간순간마다 머릿속에서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생각이라기보다는 이미지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스쳐가는 이미지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있다. 이것을 정리하여 우리는 글을 쓴다.)
미국 뉴욕에서 출판한 ‘파리 리뷰’지는 세계적인 작가 12명과 인터뷰하여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을 꼼꼼이 뒤져보아도 작가라는 말은 나오지만 천재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부단히 노력했고, 끊임없이 자기의 원고를 읽고, 또 읽었으며 수정을 거듭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쪽은 헤밍웨이가 39회나 수정했다. 움베르트 에코는 딱 들어맞는 어조를 찾아내기 위해서 같은 페이지를 수십 번이나 수정했다. 무라마키 하루키는 초고를 쓰는 기간만큼이나 수정에 시간을 보냈다. 폴 오스트는 한 단락을 완성하는데 3일이나 걸린 일도 있었다. 그들이 천재였다면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글쓰기를 두려워하는가? 천재가 주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사실은 수필쓰기를 전혀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필을 쓰려고 하는 분들은 이 점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을 들어보아야 한다. 언제 내가 글쓰기의 준비를 하였든가?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답을 들을 것이다. 쓰고 싶은 욕구만 있었지 준비는 하지 않았다.
어느 작가 지망생의 답변을 들어보자. ‘쓰기보다 읽기를 훨씬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글의 자료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서 저장되어 있다. 글쓰기를 막상 하려고 하니 글의 소재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준비라는 것은 쓰기를 위해서 뒤죽박죽인 자료를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긴다. 그 기록을 거꾸로 읽기를 하면서 정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준비이다. 또한 누군가에게 보여주게 되는 쓰기는 여러 면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쓸 때는 더 많은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잠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 생각들이 자료가 된다. 자료를 정리하는 것이 준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생각들이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 버린다. 머릿속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붙들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읽은 움베르토 에코의 답변이 공감이 간다.
'저는 틈새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항상 말합니다. 원자와 원자 사이, 그리고 전자와 전자 사이에는 많은 공간이 있어요. 우리가 우주의 질료 사이사이에 있는 공간을 없애고 축소 시킨다면 전체 우주를 공만하게 압축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틈새로 가득 차 있어요. 오늘 아침 당신이 초인종을 울리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했고, 문 앞에 도착하기까지 몇 초가 걸렸죠. 당신을 기다리는 몇 초 동안, 저는 제가 현재 쓰고 있는 새 작품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저는 화장실에서도 기차에서도 일을 할 수 있어요. 수영하는 동안에도 많은 것을 생산해냅니다.' (본문 중에서)
우리의 삶은 일상으로 만들어진다. 일상을 살펴보면 내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이 끊임없이 반복한다. 중요하지 않는 것의 반복이 일상을 만든다. 이러한 일상을 없애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에코’의 말처럼 공만하게 작아 질 것이다. 그러니 일상을 세세히 관찰해보면 수많은 틈새들이 있다. 출근길을 예로 들면, 지하철역에서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출근길의 전철 안에서 보내는 시간, 등등 수없이 많다. 그 틈새의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기차가 역에 닿고 내가 차를 타러 일어서는 즈음이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내용들이다.
작가는 작품을 쓰고 싶은 마음만 먹으면 써내는 천재가 아니다. 준비를 해야 한다. 틈새의 시간에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들, 정리가 되지 않아서 뒤죽박죽인 생각들을 정리함으로 우리는 작품쓰기의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다. 어제 꾸중을 하던 상사의 얼굴짝에 춤을 뱉는 상상을 하더라도, 그냥 허공으로 날려 보내지 말고, 의미를 찾아보고, 이야기로 만들어본다. 그때의 상황을 사진처럼 복사만 하지 말고, 형상 뒤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이유나 요소들을 찾아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의 준비이다. 준비가 되었으면 기록으로 남겨본다. 다음에는 움베르트 에코처럼, 무라마키처럼, 폴 오스터처럼 자기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수정하고, 바꾸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준비이다. 준비하여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요약해 보자. 농구선수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면 농구 시합을 위해서 끊임없이 연습하는(준비하는) 사람이다, 라고 답한다. 마찬가지로 작가란 글을 쓰기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이다. 준비가 된 후에 의미가 내포되도록 형상을 만들어 본다. 한 번 만든 형상에 만족하지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작가는 천재가 아니고 인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보통 사람이다. 다만 고통스럽더라도 글쓰기의 준비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일 뿐이다.
(* 최근에는 수많은 수필전문지에서 쏟아지는 수필가가 홍수를 이루다 보니, 등단하여 수필가라는 타이틀을 얻고 난 뒤로는 글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돈다. 이 장에 의하면, ‘작가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 등단하였다고 작가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첫댓글 이박사님 잘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경의를 표합니다